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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009.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by 쿠데 2020. 3. 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4

변현태 옮김 / 열린책들

 


 시작

 

 이번엔 <아저씨의 꿈>에 이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중기 소설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이다. <아저씨의 꿈>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번 작품도 기대하고 있다. 제목이 좀 읽기 어렵긴 하지만 내용만 재밌다면야 뭐! 아무튼, 제목만 봤을 때는 군상극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군상극은 그리 선호하지 않아서 어떨까 싶은데...

 

 어쨌든 지금까지 기대 이하였던 작품은 <분신> 하나 뿐이라 이번 작품도 재미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반쯤 공부하는 기분으로 시작한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읽기 프로젝트인데, 어느새 재미있어서 계속 읽고 있다. 좋은 징조다.

 

 감상

 

 이야기는 주인공인 세르게이가 사촌인 예고르의 부탁으로 그의 집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고르는 자신의 집에 있는 가정교사 나스타샤와 세르게이가 결혼을 하길 바란다며 그를 부른다. 하지만 그렇게 도착한 예고르의 집에서, 세르게이는 포마 포미치라는 정신나간 독재자와 그의 장단에 맞춰 미쳐버린 저택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소설은 가스라이팅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아서 문제인 예고르 대령과, 그런 그를 등쳐먹고 살아가는 포마 포미치라는 인물의 조합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권력 관계가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고로 이런 리뷰는 어떤 식으로 가스라이팅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위주로 작성했다.

 

 다만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가해자-피해자의 프레임은 어디까지나 일상적인 범주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가해자-피해자가 명확한 범죄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님을 밝혀둔다. 그것과 여기서 다루는 프레임은 맥락 자체가 전혀 다르다. 

 

 가스라이팅은 매우 민감한 주제가 될 수 있어 워딩을 신중히 골랐지만 부족한 식견 탓에 좁은 글이 될 수 있으므로 해당 주제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은 읽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 노파심으로 굽은 허리를 안고 스쩨빤치코보 사람들을 만나러 가보겠다.

 

 포마 포미치, 폭군의 탄생

 

 작품의 주연이자 악역인 포마 포미치는 세치혀로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을 일삼는 미친놈이다. 그는 정말 온갖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신의 또라이 같은 행위를 고결한 맥락으로 장식한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무례하고 유치한 포마의 횡포 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장단을 맞춰 이리저리 기우는 군상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상한 건가 싶을 정도다. 독자로서 함께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기분이다.

 

 어쩌다 포마 같은 이런 또라이가 태어나게 된 걸까? 나스타샤라는 가정교사는 작중 '포마 자신이 한때 광대였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광대가 생긴 것이 즐거운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바로 이것이 포마가 폭군이 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상처 받은 인물이고, 자신의 상처를 새로운 권력을 손에 넣는 것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인물인 것이다.

 

 상처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상처입힌 것을 추앙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을 상처입힐 수 있었던 그 '힘'을 추앙하는 경우가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는 존재하는 힘에 의한 권력 관계에 매료되는 것이다. 피해자는 상대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자유 의지를 억압당하기 때문에 가해자와의 힘겨루기에서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신이 패배했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 자신의 아픔을 들여다보기 보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고 압도적인 존재였는지를 되새기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린 피해자가 포마처럼 어긋나면 자신의 존재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새로운 피해자를 만드는 것뿐이다.

 

 그러나 가해자는 더 강하거나 옳은 존재가 아니다. 그는 그저 심판받아야 할 가해자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피해자 또한 더 약하거나 틀린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의 프레임은 실제적인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쉽다. 제3자인 우리는 이런 사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 수 있지만 막상 저택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다. 권력의 프레임은 그만큼 강력하다. 포마는 바로 이런 권력의 프레임을 받아들여 폭군으로 거듭난 인물인 것이다.

 

 폭군을 원하는 사람들

 

 하지만 폭군이 되고 싶다고 해서 폭군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를 왕좌의 자리에 올려줄 백성들이 필요하다. 이 저택의 사람들은 그 역할을 자처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지만, 이들이 포마를 원하는 이유는 하나다. 몇몇 소수의 정상인을 제외하면 이 저택의 인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 뿐이다.

 

 저택의 주인인 예고르는 말할 것도 없고, 매사 남탓만 하는 그의 어머니나, 주인의 사고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아바타나 다를 바 없는 수행원인 뻬레뻴레찌나, 마마보이인 오브노스낀, 이름을 계속 바꿔대는 하인인 비도쁠랴소프의 존재마저 누구 하나 자기 중심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자신에 대해 무지한 걸까? 물론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를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자신의 무지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 타인의 앎에 기대는 사람이 존재한다. 용기를 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봤을 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 두려워 기피하는 것일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의 인물들은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직시하는 것이 두려워,

  1. 내면을 들여다 보기도 전에 스스로를 보잘 것 없다고 정의하는 사람 (예고르)
  2. 타인에게 모든 문제를 떠넘기는 사람 (장군 부인)
  3. 타인의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사람 (뻬레뻴레찌나, 오브노스낀)
  4. 자신을 확정하는 것이 두려워 계속 스스로를 갱신하는 사람 (비도쁠랴소프)

 

 특히 이 작품의 주연인 동시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예고르는 현실과 이상의 자아가 만든 괴리 때문에 더욱 자신을 부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지적 욕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을 실현하지 못한 상처를 안고 있다. 그로인해 그는 자신이 멍청한 사람이라는 자아상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눈치챈 하이에나들이 몰려들어 그를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제아무리 사자라도 스스로를 토끼라고 생각하여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포식자들은 마다하지 않는 법이다. 그에게 폭군은 포마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이 저택 전체가 그의 폭군인 것이다.

 

 포마는 예고르를 비롯한 이런 사람들에게 자아를 부여한다. 그 자아는 자신이 부려먹기 좋게 만든 하인의 자아이지만, 이들은 그런 것을 구분할 처지가 아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보잘 것 없는 진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지 하인의 자아를 받아 피학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포마는 그들의 존재론적 삶에 반드시 필요한 '자아'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 자아는 강력한 폭군이 포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잘못된 것일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책임질 이유도 없다. 여러모로 저택 사람들에게 포마는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제3자의 입장에 놓인 독자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폭군은 어떻게 패배하는가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은 '자존심' 때문이다.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결국 스스로 자신의 중심을 세우지 못해 환경과 타인에 의해 휘둘리게 된다. 포마가 폭군으로 거듭난 것도 사람들이 포마를 폭군으로 추앙하게 된 것 또한 모두 이 때문이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그 모든 행위가 자신의 존엄성을 갉아먹는 행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바로 그 순간의 대처가 가장 중요하다. 이때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폭군이 될 수도 있고, 폭군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은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키고 싶다면 상처를 받는 그 순간에 가장 냉정해져야 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 사태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신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우선 상처를 받았다고 느껴지는 상황일수록 그곳에서 멀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부터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어떤 상처가 났는지 제대로 알아야 정확한 치료를 할 수 있고, 치료를 한 다음에야 평정을 되찾을 수 있으며, 평정을 되찾아야 상황을 직시하고 가해자의 가짜 권력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상처를 외면하면 자존감이 파괴된다. 훼손된 자존감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는 포마를 비롯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상처를 직시하는 것 또한 요령이 필요하다.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온 의사처럼 면밀하게 상처를 살피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리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괜한 해석을 더하거나 파고드는 것은 상처를 무시하는 것만 못하다. 가해자로부터 우릴 지키기 위해서는 의사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공부를 하듯 지적 전투력을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고르처럼 도덕성이 높은 인간일 수록 상처를 쑤시기 쉽다. 자기 비판에 능하기 때문에 상처가 생겼을 때에도 그것을 쉽게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성의 판단은 냉정을 완전히 되찾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냉정하게 분석하고 결론을 내린 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교훈이 있었다면 배우고 아니라면 버리면 되는 것이다. 상처에 함몰된 상태에서 도덕적인 판단은 내리면 이후 그것은 고스란히 자신의 가치관이 된다. 가해자가 만든 틀에 의해 자신의 신념이 형성되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한 일이 아닌가?

 

  어쨌든 포마의 악행이 줄을 잇는 가운데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향해간다. 포마는 가난한 가정교사인 나스따샤와 예고르가 서로 사랑에 빠진 것을 눈치채고 그것을 막기 위해 갑작스러운 돈벼락으로 정신이 나간 여자인 따찌야나와 예고그를 결혼시키고자 한다. 자신의 감정에 둔감한 예고르는 나스따샤를 사랑한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를 지키기 위해 주인공과 나스따샤를 결혼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예고르를 사랑하는 나스따샤가 청혼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결국 나스따샤는 예고르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예고르 자신이 나스따샤를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스따샤와 예고르의 밀회를 포마가 보게 된다. 그는 나스따샤와 예고르의 밀회 장면을 모두에게 고발하며 예고르의 도덕성을 비난한다. 이때 처음으로 예고르는 포마에게 맞서 나스따샤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나스따샤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나 닐로브나, 당신이야말로 조용하시오.

난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단 말이오.」

 

 그리하여 결국 예고르는 포마로부터 나스따샤를 지켜낸다. 폭군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승리를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예고르보다도 더 인상적인 인물이 있다. 그녀가 바로 나스따샤다. 

 

 진정한 생존자, 나스따샤 

 

 결국 포마는 한 바탕 소통을 벌인 뒤 예고르와 나스따샤의 결혼을 인정하기로 한다. 이후 포마는 성인군자에 가까운 인물로 추앙받으며 살다가 장군부인 곁에 묻히게 된다. 포마같은 놈이 왜 이런 평온한 결말을 맞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밑도 끝도 없으니, 그보다 엔딩에서 드러나는 피해자들의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개인적으로도 매우 흥미롭고 유의미한 부분이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피해자다. 심지어 독자마저 피해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작품 내내 말도 안 되는 포마의 가스라이팅과 그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아무 힘도 없이 지켜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케이스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가는 인물은 바로 나스따샤(나스쩬까)다. 

 

 나스쩬까도 한때 학대를 받았던 피해자라는 점에서는 포마와 동등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포지셔닝하고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가는 확연히 다르다. 포마는 피해자인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해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반면 나스쩬까는 피해자-가해자의 포지션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자기 자신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얻기로 결심하고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하여 독자적인 승리를 얻는다.

 

 포마의 삶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평생 화만 내다가 죽은 것뿐이다. 저택 밖으로 내쫓겨 비참하게 살다가 죽는 모습까지 보여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그의 삶은 지옥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포마가 진심으로 행복해보였던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는 화를 낼 거리, 질투할 거리를 찾아 헤매이는 하이에나와 같다. 그렇게 해야만 가해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계속 견고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면 나스쩬까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그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살기로 결정한다. 그것을 위해 나스쩬까는 포마를 용서하고 남편인 예고르를 그의 영향력에서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 결과, 포마 또한 온화함을 되찾고 적어도 그녀와 예고르에 대해서는 어느 시점부터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나스쩬까와 예고르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서로를 누구보다 걱정하고 사랑하는 이 두 사람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나스쩬까가 가해자가 형성한 가짜 권력 관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예고르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나스쩬까는 이 책에서 승리를 거둔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범죄라곤 할 순 없지만 확실한 악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문제는 나스쩬까의 방식이 유효한 답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한다. 제3자 입장인 우리로선 왜 포마를 처단하지 않느냐며 분노할 순 있지만 실제로 저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은 그렇게 딱 잘라 정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남의 연애에는 현명한 답을 내릴 수 있어도 자신의 연애에는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사태를 이겨내고 나의 삶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몸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나스쩬까다.

 

 악의 실체를 확실하게 바라보고

 → p.340 '포마는 그녀가 자신을 거의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 p.340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모욕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고'

 

 분노하기보다 용서하고 흘려보낸다

 → p.341 '자신도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왜 포마를 용서해야 하는가? 나스쩬까 자신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포마를 계속 미워하는 한 나스쩬까는 피해자의 포지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즉, 포마가 만든 가상의 권력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스쩬까가 포마를 용서하는 것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어야만 자신의 권력을 지킬 수 있는 포마의 가스라이팅에서 빠져나와 자신만의 기틀을 확고하게 세우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인 예고르의 가치는 무엇인가?

 

  해설에 따르면 포마와 예고르는 당시 러시아 사회에 존재한 모순을 보여주기 위한 인물이라고 한다. 빠른 근대화(유럽화)의 속도와 달리, 지적으로는 그만큼 성장하지 못해 열등감을 느낀 지식인들(특히 고골)의 거짓된 태도를 패러디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라는 것이다. 반면 예고르는 그런 문제에 대한 답안으로서 제시된 <아름다운 인간>의 표상이다. 포마와 예고르의 극단적인 대비는 이것을 위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예고르보다 나스따샤가 훨씬 더 이상에 부합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는 <아름다운 인간>이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몇몇 고귀한 특성 때문에 결점을 지닐 수밖에 없는 소박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그가 주연으로 선택된 것이 이해가 간다. 예고르가 가지고 있는 고귀한 특성들은 바로 그 우유부단하고 자기 확신이 없는 성격에서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타인을 생각하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으며,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그 특성말이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 된다면 이런 고귀함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예고르가 긍정적인 모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다만 고귀한 인물일 뿐이다. 그가 보여준 미덕들은 우리 가슴 어딘가에 넣어두고 항상 고려해야할 것들이지만, 자기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들은 아니다. 그는 그런 미덕이 극단으로 발휘된 인간의 표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극단에 있는 것은 경계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를 작품 자체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소화할 때의 이야기이다.

 

 폭군에 저항하는 최고의 무기는 진실이다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작품이지만 의외로 정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장 큰 테마는 위선으로 얻는 이득과 솔직함으로 얻는 불이득에 대한 대비다. 이것은 전작인 <아저씨의 꿈>에서도 드러난 테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훨씬 더 강렬하고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나 있다. 당시 러시아의 모순된 사회상(빠른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지식인들의 위선)을 포마와 예고르라는 두 인물을 통해 드러낸 것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2020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어떤 부분을 소화할 것인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선택한 답안지는 나스쩬까다. 고귀함을 지키려 하되, 악에 지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 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잡을 수 없는 빈부나 경험의 격차에 기죽어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인식하여 원하는 것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매끈한 거짓이 아닌 거친 진실을 삼키며 나아가자.

 

 

 문장

안나 닐로브나, 당신이야말로 조용하시오. 난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단 말이오.
p.106

  역시 이 문장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자기 자신이기를 선택하고 일어선 사람의 강인함이 이 한 문장에 전부 녹아있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것. 우린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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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1. 서문

 

p.20 ⎡첫째 당신의 어머니는 장군 부인의 신분이며, 그리고 둘째 덕을 쌓아 오신 분이신데 이 얼마나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만일 당신 어머니가, 물론 잘못된 일이지만, 하지만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 집 창 아래로 와서 손을 내민다면, 게다가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어딘가 부드러운 깃털 이불 속에 그리고...... 그러니까, 아무튼 사치 속에 파묻혀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후략)⎦


 사실상 <아저씨의 꿈>의 주인공이었던 마리야의 새로운 버전인 포마 포미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마리야는 그래도 어느 정도 영웅적인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포마 포미치는 대놓고 쓰레기(?) 같은 인물로 나온다. 마리야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마리야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인다면, 포마 포미치는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움직인다. 둘 다 저열하긴 그지없지만 포마 쪽이 훨씬 질이 나쁘다. 포마의 방식은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p.23 여러분, 매우 보잘것없고 매우 소심하여 사회에서 내팽개쳐진, 완전히 무용지물에다가 정말로 혐오스러운 인간,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리만큼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병적으로 자극된 자존심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해 줄 재능이란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볼 수 없는 그와 같은 사람을 상상해 보라.

p.24 즉 완전히 무시당하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자존심으로, 이런 경우 흔히 있는 일이지만, 고통스러운 과거의 실패에 의해 모욕받고 억눌리며 오래오래 곪아 왔다가 그때부터 타인이 성공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서 질투와 독을 짜내는, 그런 자존심 말이다. 이 모든 것에 추잡할 정도의 자격지심과 광적인 과대 망상이 덧붙여진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p.24 바로 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어릿광대 노릇과 바보 노릇으로 인해, 그리고 더부살이와 그 때문에 받게 되는 굴종과 비인격적인 대우로 인해 더욱더 불타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p.26 그는 어릿광대 노릇을 하면서도, 그의 앞에 경배하며 무릎을 꿇는 한 무리의 바보들을 만들어 내었다.


 독재자인 포마 포미치의 심리를 서술한 문장들이다. 정말 놀라운 통찰력이다.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심리를 긁어온 것 같다.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데다가 그것을 보완할 능력조차 없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지, 그 내면에 대해 아주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다. 이런 유형의 인물을 만날 때 참고가 될 만한 귀한 구절이라서 적었다.

 

p.29 더욱이 그가, 의지가 무르고 소심한 면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의 이익이 문제가 되었을 때이다 .하저씨는 한평생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멸시하였으며,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포마와 대조적으로 착한 사람 컴플렉스에 걸려 자존심은커녕 자존감까지 바닥을 쳐버린 또 다른 등장인물 예고르 대령에 대한 설명이다. 그의 착한 심성에 대해서는 여러 개의 문장을 통해 설명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뽑으라면 개인적으로 이 문장이었다. 사실 착하다기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 보지 못하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게 된다. 너무 안타깝다.

 

 2. 바흐체예프 씨

 

p.62 혹시라도, 우리 두사람이 포마 포미치를 잘못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그가 가진 모든 괴상함이라는 것이 어떤 특별한, 어쩌면 천재적인 기질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누가 알겠어요? 어쩌면 그와 같은 기질이 고통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짓눌린 끝에 소위 인류 전체에 대해 복수를 꾀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요. (중략) 이 사람에게는 정말로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존경할 만한 이유가 실제로 있지 않을까요?


  포마 포미치의 이야기를 건너서 듣고 그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야를 가져보려고 하는 화자의 이야기다. 본인이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그렇게 믿고 있지 않다는 게 포인트다ㅋㅋ 아무튼, 이런 태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객관적인 시야를 갖추는 건 매우 중요하니까. 뭣보다 본인도 이미 믿고 있진 않으니!

 

 3. 아저씨

 

p.40⎡(전략) 대관절 제가 뭣 때문에 그녀의 원수가 되겠어요? 사교계의 수석을 다투는 경쟁자란 말인가요? 전 그런 경쟁엔 관심이 없답니다. 그럼 그녀에게 수석의 영광을 주도록 하세요! 전 누구보다도 먼저 그녀에게로 달려가서 수석을 축복해 줄 아량을 갖고 있어요. 결국 모두 틀린 이야기예요. 전 그녀의 편이 되려고 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의무예요!(후략)⎦


  실로 현명한 처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이 사교계에서 살아남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일단 저렇게 말해놓고 이후에 한참 안나의 욕을 한다는 것이다ㅋㅋㅋ 그래 놓고 자신은 다시 그녀를 지지한다고 표명한다. 디스는 할 만큼 하고, 평판은 평판대로 유지하는 무서운 화법이다. 마리야 무서워!

 

 4. 차를 마시면서

 

p.69 그는 <학문>이라는 단어 앞에서 아무런 사심 없이 경건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 자신이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 모를수록 더욱더 사심없는 태도를 보였다.


  예고르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인물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겸손하달지, 너무 야망이 없달지.

 

 5. 예졔비낀

 

p.106 ⎡아이고, 마나님, 세상은 바보로 사는 게 더 좋은 겁니다! 이런 걸 알았더라면 젊었을 때부터 바보로 등록해 두는 건데, 그랬다면 아마 지금쯤 현명해졌을 겁니다. 그런데 일찍이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해서, 지금 이렇게 늙은 바보가 되어 버렸지요.⎦


  가정교사인 나스쩬까의 아버지인 예졔비낀의 명언(?)이다. 그는 스스로를 어릿광대로 취급하면서 이 집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사람인데, 이 문장에서 자신이 가진 어릿광대의 철학을 얘기한다. 자신의 서글픈 위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라 적었다. 이런 스탠스는 포마 포미치와도 대조되는 느낌이 있는데, 그것이 단지 예졔비낀이 아닌 포마와 같은 권력을 손에 넣지 못해서인지 인간성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

 

 6. 하얀 황소에 대하여, 그리고 꼬마린스끼의 농부에 대하여

 

  아니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포마라는 인물이 얼마나 정신이 나갔고 억지스러운 인간인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나오는 데 정말 어이가 없다. 팔랄레이라는 어린 소년이 꿈에서 하얀 황소가 나온다고 하자 그 꿈을 꾸지 말라며 윽박지르고 꼬마린스끼의 농부라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데 그것이 천박한 내용을 담은 춤이라며 추지 말라고 한다. 쓰면서도 이게 제정신인가 싶은 미친놈이다; 이런 인물을 창조하다니... 읽으면서 너무 충격이 컸던 나머지 발췌할 만한 문장은 찾지 못했다.

 

 7. 포마 포미치

 

p.140 ⎡난 이 농부를, 아마도 머리에 흰머리를 지고 있을 수도 있겠고, 숨막힐 듯한 오두막에서 가족들과 살며, 게다가 배를 곯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가난에 만족하여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을 찬양하는, 부자의 황금에 초연한 그런 농부로 그려낼 겁니다. 부자 스스로 영혼이 감동한 나머지 마침내 자신의 황금을 그에게 가져다 주게 만들 겁니다. 이럴 경우 농부의 미덕과 부자의 미덕, 아니지요, 더 나아가 귀족의 미덕들이 통일되어 하나가 되겠지요. 농부와 귀족이 다른 사회 게층에 각기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침내 미덕 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위대한 사상이 아닙니까!⎦


  포마 포미치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개소리에 가까운 주장에 고상한 근거를 들이대는 것이다. 개소리와 고상한 말의 낙차로 인해 사람들은 빠져들고 현혹된다. 고상함이란 말이 아닌 행위로 이루어져야 하는 법이다. 말로 고상한 가치를 앞세우는 사람을 조심해야겠다.

 

 8. 사랑의 고백

 

p.165 ⎡아버지가 포마 포미치의 기분을 잘 맞추어 주니까 모두들 아버지를 그렇게 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포마 포미치는 자신이 광대였던 적이 있으니까, 지금 광대를 가지게 되어 저렇게 기분좋아하고 있는 거지요.⎦


  드디어 나스따샤와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 발췌한 문장은 나스따샤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것은 포마의 문제만이 아니다. 무섭지만 사람은 자신을 상처입힌 것을 추앙하게 되는 것 같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과 멀어지는 것이 우선일 텐데 어찌된 것인지 사람이란 계속 상처를 핥게 되는 생물인 것 같다. 이런 피학성에 빠지지 않으려면 얼마나 높은 지적 전투력을 가져야 하는 걸까? 새삼 생각이 많아지는 문장이다.

 

 9. 각하

 

p.184 ⎡하지만 언제나 내가 잘못만 저지르는 것은 아니야, 포마. 내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데다가 군인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그런 거야. (하략)⎦


  예상했던 대로 예고르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해 열등감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정서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지적 전투력은 매우 모자란 사람이기도 하고. 안타깝다, 진짜로!

 

 10. 미진치꼬프

 

p.193 ⎡(전략) 뭐랄까, 그는 기질상 시인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1만 5천이라...... 흠! 아시겠어요. 그는 돈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한번 잘난 척 뽐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거지요. 이놈은 무척이나 불평도 많고 눈물도 많은 물러 터진 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존심도 강하거든요! (후략)⎦


  포마가 어떻게 그 큰 돈을 거절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제3자의 주석인데 날카롭다고 생각해서 발췌했다. 포마는 자존심의 노예이니까 충분히 이렇게 하고도 남을 인간인 것이다. 

 

p.199 ⎡(전략) 따찌야나 이바노브나는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연애를 시작하는 여자예요. 다시 말해서 아무나 그녀의 기분을 맞추어 주기만 하면, 그가 누구든 간에 그 사람과 연애를 할 수 있는 여자지요.(후략)⎦


  미진치꼬프도 포마 못지 않은... 아, 아니 포마만큼은 아니지만(..) 아무튼 가스라이팅에 꽤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기질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는 건데, 포마에 이은 따찌야나에 대한 해석이 날카로워 또 다시 발췌했다. 무서운 건 이 사람의 가스라이팅 실력이 진짜 장난이 아니라서, 10장이 끝나갈 무렵엔 왠지 나도 미진치꼬프의 계략이 맞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 이대로 아저씨의 인생을 망치느니 미진치꼬프가 따찌야나를 데리고 도망가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섬뜩했다.

 

 11. 극도의 의혹

 

  대환장 파티라서 딱히 발췌할 만한 문장은 없었다. 그냥 읽는 내내 화가 났다는 기억밖에 없다(..) 작중 화자는 예고르가 남을 속일 사람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 생각엔 남을 속이고도 남을 사람인 것 같다. 일단 그는 그 자신을 속이는 데에 천재가 아니던가. 자기자신을 속이고 있으니 남들을 속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다. 의도한 거짓만이 거짓인 것은 아니니까.

 

 12. 파국

 

p.234⎡<전 오직 당신만을 사랑해요. 그러니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어요.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해 왔어요. 하지만, 당신과 결혼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내일 이 집을 떠날 거예요. 수도원으로 들어가겠어요.>⎦


  제목이 불안해 미쳐버릴 것 같지만(?) 아무튼, 결국 나스따샤와 정을 통하고 마는 예고르다. 자기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예고르는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자신보다도 남들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용당할 수밖에. 어쨌든 나스따샤와 예고르가 결혼을 하고 포마가 내쫓기면 더는 바랄 게 없겠다. 그리고 제발 우리 주인공을 자유롭게 해달라;; (읽느라 너무 힘들다)
 

 

 제2부

 

 1. 추격

 

p.246 아저씨의 시선이나 목소리, 그리고 몸짓에서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과 함께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중대한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라는 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전신으로 체감이 되는 때가 있다. 그 순간을 포착해서 묘사한 것이 인상적이라 발췌했다. 이런 개인적이고 내밀한 순간들을 어떻게 알고 쓰는 건지.

 

p.253 사실, 그렇지 않아도 이성이 흐려져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상상해 왔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마당에 어찌 자신의 공상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 가엾은 여인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정상적인 사유의 힘마저 모조리 잃어버리게 되었다. 행복에 마취되어 그녀는 불가능한 환상과 매력적인 환영으로 가득한 자신의 매혹적인 세계로 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 버렸다.


 따찌야나는 진짜 흥미로운 캐릭터인데 어떻게 이런 캐릭터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감탄은 차치하고서라도, 극도의 애정결핍이 그것을 표출한 완벽한 무대를 만났을 때 사람이 어떻게 미치는지를 통찰한 구절이 놀라워 발췌했다. 몽상가의 극단적인 유형을 보여주는 따찌야나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2. 새소식


  어째서인지 분량이 짧다(?) 짧은 분량만큼 불안감은 더욱 고조된다. 예고르가 나스쩬까에게 청혼하겠다는 편지를 받은 포마 포미치가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미리 예견하는 듯한 챕터다. 빨리... 누가 이 놈을... 내쫓아줘... (고통)

 

 3. 일류샤의 명명일


  일이 터지고 만다. 일류샤의 명명일에 포마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는 이게 왜 큰일이지? 포마가 집에서 나가주면 해피 엔딩 아닌가? 그건 그렇고 중간에 일류샤가 읽는 시의 의미는 잘 모르겠다. 포마를 비꼬는 내용인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사건은 터졌으니 이제 어떻게 봉합되는지 구경할 차례다.

 

 4. 추방

 

p.294 하지만 아저씨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스쩬까에게로 다가가 정중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야,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예고르가 첫 변화의 한 걸음을 내딛는 장면이다. 포마가 두 사람의 밀회에 대해 공표하자 이에 분노한 예고르는 나스쩬까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발자국도 내딛지 않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이렇게까지 용감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사이다다, 사이다!

 

 5. 포마 포미치가 모두의 행복을 만들어 낸다

 

p.304 「안나 닐로브나, 당신이야말로 조용하시오. 난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단 말이오.」 


 예전 같았으면 잔뜩 주눅이 들었든 사람들의 비난에도 예고르는 당당하게 맞선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할지 알고 있는 사람이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6. 결말

 

p.339 죽기 바로 전까지도(포마 포미치는 작년에 죽었다) 그는 우울해 하며 심통을 부리고, 고집을 부리는가 하면 화를 내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하지만 <행복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은 줄어들기는커녕, 그의 변덕에 비례해서 나날이 커져 갔다.


 아, 도대체 왜...? 사실 이유는 알 것 같은데 그렇게 평면적으로 이 작품을 읽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건만 마지막까지 포마 포미치를 해치우지 못했다는 것이ㅠ 나의 그런 노력을ㅠ 멍청한 것으로 만든다ㅠㅠㅠ 인생은 포마 포미치처럼 살아야 하는가... Karma is real이라는 나의 가치관에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다... 

 

p.340 (나스쩬까) 그녀는 조금씩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포마로 하여금 양보하도록, 그리하여 순순히 굴복하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모욕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고, 결국 자신의 소망을 이루어 냈던 것이다.

p.340 그리고 또한 아마도 <수난자>이자 과거에 어릿광대였던 그에게, 많은 것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의 마음을 치유해 주어야 한다는 아저씨의 생각에 전적으로 진지하게 공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난했던 나스쩬까 자신이 <학대받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자신도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달이 지나자 포마는 잠잠해졌고, 심지어 아주 상냥하고 온순하게 굴었다.
 


 그나마 이 답답한 결말에 한 줄기 빛을 쏘아주는 것은 나스쩬까뿐이다. 그녀는 아마도 이 저택에서 포마를 상대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인물일 것이다. 그녀는 포마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그를 조율한다. 그러나 포마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저항을 부드럽게 받아서 방향을 바꾸는 쪽으로 움직인다. 포마와 마찬가지로 학대당했던 사람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처에 함몰되는 쪽보다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는 쪽으로 나아간다. 피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해자가 되기를 선택하지 않고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답이 아닌가 싶다. 

 

p.344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쌓인 증오심을 해소하기 위한 내적인 요구 때문에 일부러 어릿광대 역할을 한 것이다. (중략) 예를 들어 그는 스스로 진짜 비굴한 아첨꾼을, 희화적인 모습으로 연기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건 단지 겉모습만 그러할 뿐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따라서 그의 아첨이 비굴해지면 비굴해질수록, 동시에 그 속에 숨어 있는 조롱 또한 더욱더 신랄해지고 더욱더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스쩬까의 아버지에 대한 또다른 해설인데 흥미로워서 발췌했다. 앞에서 나스쩬까는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광대 역할을 자처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 반대였다. 예졔비낀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광대이기를 자처한 것이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서, 그리고 그것이 연기임을 은연 중에 표현하면서 진짜 자신의 고귀함을 지키고자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비열한 사람을 연기함으로서 고귀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니, 흥미롭다! 다른 방식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따뜻한 사람을 연기하면서 차가운 자신을 증명한다든가.

 

p.345 (따찌야나 이바노브나) 그녀는 아주 현명한 유언을 남겨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나스쩬까에게 주는 3만 루블을 제외한 30만 루블에 이르는 전 재산을, 가난한 고아들의 양육과 그들이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상여금으로 사용해 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읽다가 숨이 턱 막힌 부분이다. 따찌야나 이바노브나에 대해서 줄곧 바보 취급하고 있었던 자신이 급정지를 한 느낌이다. 물론 그녀가 바보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보라고 해서 고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유언마저 망상에 취해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이 이 행동이 낳을 고귀한 결과들까지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발전의 중간 단계

 

 1


 

p.349 <(전략) 여기에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희망을 걸고 있으며, 특히 제 문학적 명성이 굳건하리라는 기대를 걸고 있어요.>


 지금에 와서 보면 대작가 중의 대작가인 도스또예프스끼조차도 한때는 자신의 문학적 명성이 흔들릴까 두려워 저런 이야기를 했다는 게 인상적이다.

 

p.350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을 관련해 작가가 설정했던 창작 의도, 즉 <두 거대한 전형적 성격>의 형상화를 개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p.350 <두 거대한 전형적 성격>이란 물론 작품의 주인공 포마 포미치 오삐스낀과 예고르 일리치 로스따네프를 지칭하는 것 (후략)


 포마와 예고르, 그들의 관계는 위선과 솔직함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예고르보다 나스따샤가 더 큰 승리를 거둔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인물의 전형성 측면에서는 가장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p.350  다른 한쪽 면에는 이 소설에서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그러나 동시에 이미 도스또예프스끼적인 모양을 갖추어 나가고 있는 이른바 인물들과 그들 간의 상호 관계가 자리잡고 있다.

p.351 예컨대 『백치』에서 그가 형상화하과 했던 <아름다운 인간>의 문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이반 까라마조프와 스메르쟈꼬프로 하나의 절정을 획득하고 있는 <정신적 분신성>의 문제 등이 『스쩨빤치꼬보 마을』에서 이미 태아적 형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인간> 에 대해서는 예고르라는 확실한 모델이 있어서 알기 쉽지만, <정신적 분신성>의 문제는 아직 잘 와닿지 않는다. 좀 더 해설을 읽으면서 정리해보겠다. 

 

 2

 

p.357 러시아 근대사의 모순은 (중략) 이상과 현실의 괴리, 포즈만으로 이루어진 정의(定義)와 겉으로만 추구하는 유럽화로 점철되는 과정에서 해결 없이 쌓여만 가는 악무한(惡無限)의 과정이었다.

p.359 여기서 우리는 고골에 대한 패러디가, 포마 포미치라는 형상을 통해서 겨누고 있는 비판의 칼날이, 고골이라는 한 개인을 넘어서서 러시아의 근대화가 갖는 모순을, 그리고 그 모순에 침윤당한 러시아의 일부 지식인들의 비생산적인 삶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359 『스쩨빤치꼬보 마을』에서 문제의 출발점이 포즈뿐인 삶에 대한 패러디를 이용한 비판이라면 (중략) 로스따네프 대령의 포즈는 그 해결에 대한 길 찾기의 결과로 보인다. 그의 포즈는 모든 것에 대한 관대함, 남자다움에 대한 의식적 지향, 그리고 솔직함이다.


 아무래도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골의 『서한』이라는 작품을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 작품 전체가 서한의 패러디라는 사실이 이 책에 실려있는 논문 두 편에 빼곡하게 증명되어 있다. 서한에 드러난 고골의 종교적, 설교적 자세에 대한 패러디가 포마 포미치라는 인물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가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모순(p.357 시민 계층과 그에 상응하는 시민 의식의 성숙이 없는 상태에서 서유럽의 제도와 정치 사상을 위로부터 이식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포즈이기도 하다. 근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사회의 미성숙한 시민으로서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마치 근대화를 따라잡은냥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포마라는 인물 그 자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를 들여다 보는 예고르는 그와는 정반대에 있는 모델인 것.

 

p.359 <위대함이라는 구름으로 위장하는 것은(예를 들어 『서한』에서 고골의 어조가 그러하지요) 솔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솔직하지 못한 것은 심지어 경험없는 작가일지라도 본능적인 감각으로 알 수 있지요. 이것은 <제일 먼저 드러나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하지 못한, 허세로 위장한 태도에 대해 도스또예프스끼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누구나 허세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위대함으로 치장하는 것은 또한 별개의 문제이며, 작가로서 경계해야 할 부분기도 하다. 맥락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잘못 응용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3

 

p.361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러한 인간 유형(로스따네프 아저씨)을 <아름다운 인간>으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완전성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결함(아저씨의 소박함이 불러일으키는 웃음, 미쉬낀의 백치성)과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그들의 소박한 본성에 있다.

p.362 로스따네프 대령이 가진 힘은 무엇보다도 모든 것에 대한 관대함이며 타인에 대한 사랑이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이다.


 개인적으로 문제라고 생각했던 대령의 너무 우유부단하고 무른 부분조차, 완전함의 영역으로 넘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시선에 대한 해설이다. 너무 멍청하고 바보 같지만 그래서 그가 더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는 역설이다. 

 

 4

 작품의 유쾌한 분위기가 서구의 축제인 '카니발'과 유사하다는 설명이다. 딱히 발췌할 문장은 없어서 이 정도로 정리한다.

 

도스또예프스끼와 고골

 

 이 작품과 고골이 쓴 『서한』의 패러디적 유사성을 하나 하나 짚어주고 있는 논문이다. 인용문이 많아 참고용으로 읽기에 좋다. 별도로 발췌하고 싶은 문장은 없어서 이 정도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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