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

008. 아저씨의 꿈

쿠데 2020. 2. 29. 09:30

 

아저씨의 꿈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23

박종소 옮김 / 열린책들

 


 시작

 

 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생판 모르는 아저씨의 꿈에 내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란 말인가? 가뜩이나 전작인 <네또츠까 네즈바노바>가 흥미로운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한 소설이었기 때문에 비교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도스또예프스끼의 아저씨는 조금 다를 거란 기대를 가져본다. 평범한 인물에게 열심히 개인성을 부여하는 것이 도스또예프스끼식 캐릭터 작법의 특징이고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니까.

 

 어떤 아저씨가 대체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그리고 그걸 내가 왜 읽어야 하는지 알아볼 때다.

 

 감상

 그런데 이게 웬걸... 책을 펼치자마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저씨가 아니라 귀부인이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모스깔료바라는 이름을 가진 이 귀부인은 모르다소프라는 소도시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귀부인이다. 무능한 남편과 절세미녀에 도도하기 짝이 없는 딸이라는 양극의 두 존재를 데리고 살아나가야 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는 처세와 허세에 아주 도가 튼 사람이다. 성공과 명예를 위해서라면 무서울 게 없는 교활하고 단단한 인물이기도 하다.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좁은 사교계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인물이며, 그녀가 사실상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마리야는 특정한 부분에서 귀감이 될 만한 소질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작가적 재능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든 매력적인 맥락을 자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이 있었기에 그녀는 살얼음 같은 사교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위기에 처하는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이 작품은 마리야가 자신의 작가적 재능을 어떻게 발휘하여 이득을 취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리포트나 다름없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고유한 작가적 재능으로 사교계에서 자신의 평판과 이득을 관리하며 지내던 마리야 앞에, 한때 모르다소프에서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녔던 K공작이 다시 나타난다. 그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늙었지만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마리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딸인 지나를 공작과 결혼시키기 위한 계략을 세운다. 공작의 재산을 차지하고 무한한 부와 명예를 누리기 위해서...

 

 줄거리만 봐도 마리야의 천박함이 느껴지지만 의외로 작품 초반에 묘사되는 마리야의 자질들은 귀감이 될 법한 부분이 있다. 작가는 심지어 그녀를 나폴레옹에 비견하기도 하는데, 높은 자리에 올라간 뒤 사정없이 무너져 내린 나폴레옹과 달리 사교계의 높은 자리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점 때문에 그러하다. 작중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서 '무슨 짓을 해도 무너지지 않을 여자'라는 평가를 내린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녀가 매우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귀족들과 달리 그녀는 상황 전체를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자존심을 내어줄 줄도 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무능한 남편이 일자리에서 잘린 사실이 사교계에 알려져 망신을 당할 뻔한 사건인데, 이에 대해 마리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남편을 시골로 보내고 빠르게 사건을 정리한다.

 

 그녀의 발 빠른 대처에 사람들은 오히려 마리야의 판단력을 높이 사게 되고 그녀를 더욱 존경하게 된다. 그녀는 위기 속에 놓인 기회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교적인 입꼬리 안에는 한 번 문 것은 놓치지 않는 불도그의 악력을 숨기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엄격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현실을 그려내어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이런 능력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간혹 영웅적인 면모까지 엿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일일이 주석을 달아서 설명하기보다 마리야의 행동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마리야의 위대함을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초반부를 읽는 동안에는 나도 그녀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부정적인 모델이다. 그녀의 작가적 재능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독점적인 이익을 위해서만 발휘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라면 딸의 약한 마음을 건드려서 공작과 결혼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도 불사한다. 윈윈 전략을 구사하는 것처럼 상대를 설득하지만 사실 승자는 그녀뿐이다. 그녀의 설득에 휘말린 사람들은 결국 불행한 미래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득을 취한 뒤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상대를 버릴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마리야는 거짓을 위해 거짓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걸출한 상상력을 이용해 모든 상황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맥락을 끄집어낸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야기로 세상을 지배하려 드는 독재자다. 아마 남자로 태어났거나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녀는 훌륭한 독재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로 세상을 지배한다고? 조금 과장한 부분이 있기야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 인류는 상상력으로 세상을 구축한다. 즉, 상상력은 설계도 같은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기 위해 스케치북에 자유롭게 끄적일 때 사용하는 물감이 바로 상상력이다. 인간의 사고는 상상력에 의해 형성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상상력을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든 구조물이다.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없던 것을 만들기도 하고,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한다. 바로 이 해석의 과정을 통해 태어난 것이 이야기이고, 그 과정이 정교한 만큼 이야기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후반으로 갈수록 마리야의 간계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강력해진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맥락을 빚어 사람들을 기만하는지 보고 있노라면 경이로운 느낌마저 든다.

 

 마리야가 매력적인 맥락을 빚어내는 비결은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마리야는 설득하고자 하는 대상이 가진 욕망과 그것이 좌절된 이유를 완벽하게 파악한다. 그녀는 대상이 가진 욕망을 직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좌절된 까닭에 공감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물론 이 해결 방안은 어디까지나 마리야 자신에게만 이득이 되는 방법이지만, 대상의 욕망과 직결되어있기 때문에 마치 윈윈 전략처럼 보인다. 

 

 욕망을 바라보고 그것이 좌절된 이유를 알아보는 것까지는 누구나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작가적인 영역에 있다. 그전까지가 해석의 영역이라면 여기서부터는 순수한 상상과 창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상상의 달인인 마리야에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정도는 간단한 일이다. 그녀는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거기서 생겨난 빈틈에 상상을 채워 넣는다. 이런 식으로 마리야의 스토리텔링이 완성된다.

 

 저 훌륭한 재능을 보다 이롭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더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는 창작자로서 가져야 할 소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흥미로운 캐릭터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지 눈여겨보는 것이 이 책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위기에 빠진다. 스스로를 과신하고 사람들을 무시한 대가로 주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 된다. 평소라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지만 이번엔 욕심이 과했던 것이다. 사실 당연한 결과다. 사람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타인을 교묘하게 조종하려고 하는 사람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들통나게 된다. 그녀의 작가적 재능이 완벽하게 꽃을 피우지 못하는 한계 또한 이 점에서 비롯된다. 사람에 대한 오만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돌아오는지 똑똑히 볼 수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거짓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란 기본적으로 허구지만 거짓은 아니어야 한다. 허구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축조된 도구로서의 거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작가란 궁극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짓을 위해 허구를 구축한 시점에서 마리야는 실패한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 잠깐 대중을 매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언젠간 대중에게 반드시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행동을 통해 제일 기만당하는 사람은 바로 마리야 자신이다. 애초에 정말로 자신의 욕망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그녀 자신조차 자신의 욕망이 정당하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이고 조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가장 많은 업보를 짊어지게 되는 것도 자신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진실을 타인이 믿어주리라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작가로서는 지양해야 하는 자세다.

 

 그런 마리야의 안티테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바로 지나다. 지나는 그야말로 작가가 추구해야 하는 진실의 메타포 그 자체다. 지나는 거짓을 견디지 못하는 인물이다. 거짓을 추앙하는 마리야와 달리 지나는 거짓을 경멸한다. 그리고 마리야에게 마지막 탄환을 쏘는 인물 또한 바로 지나다.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면 마리야의 뒷담을 듣고 화가 난 하인이 그녀를 배신하고 사람들에게 마리야의 은밀한 계획을 모두 퍼뜨리게 된다. 마리야가 딸인 지나를 늙어빠진 공작에게 결혼시키기 위해 갖은 비열한 수단을 쓰고 있음을 알게 된 사교계 사람들은 마리야를 비난하고 공작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쳐들어 온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달아 터지는 배신에 위기에 처한 마리야 앞에서, 지나는 고결한 결심을 한다. 자신과 어머니가 세웠던 비열한 계획을 모두에게 폭로하고 그것을 조롱하러 온 귀족들을 비판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구정물에 던져 자신의 고결함을 지킨다. 뻔지르르한 거짓으로 배를 채우기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포용하기로 결심한다. 마리야는 절대로 할 수 없을 진실에 대한 투신을, 지나는 기어코 해내고 마는 것이다.

 

 마리야와 지나 두 사람을 작가의 표상이라고 했을 때, 확실히 마리야 쪽이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꾼일 수는 있다. 하지만 마리야의 이야기는 드는 사람을 기만한다. 반면 지나의 이야기는 지루할 순 있지만 그만큼 진실하다. 그녀는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 타인을 속이지 않기로 결심한 인물이다. 이런 작중에서 지나의 행위는 '영웅적(p.221)'이라고 표현된다. 무엇이 영웅적인가? 자신의 존재를 성사시키기 위해 타인의 동의를 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나가 가지고 있는 영웅성이다.

 

 결국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지나로 보인다. 에필로그에서 지나는 시장 부인이 되고 남편의 사랑을 받는 생활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마리야는 더 이상 지나를 좌지우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p.253) 마리야는 이후 딸의 말이라면 절대 거역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는 인물이 된다. 어쩌면 남편 또한 지나가 직접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리야와 지나는 새롭게 짜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거친 진실은 매끈한 거짓을 압도한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쓰고자 하는 작품도 결국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매끈하게 잘 만든 작품이 아닌, 거칠더라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실된 작품 말이다.작품 속 공작의 흉내를 내는 걸 즐거워했을 정도로 공작과 자신을 일체화했던 도스또예프스끼가, 공작의 입으로 지나에게 '혼자만이 덕성을 지닌 인물(p.231)'이라고 표현했던 것만 봐도 말이다.

 

 마리야로 시작한 작품이지만 지나로 끝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작가론에 대비하여 읽는 것은 상당한 오독일 수 있겠지만 어째서인지 죄책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화자의 입김이 매우 적어 자유로운 해석을 추구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등장인물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실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존재감은 확실히 작품 안에 있다. 3인칭 소설에서 화자는 신과 같은 존재다. 화자의 시점과 생각에 따라 이야기가 통제된다. 하지만 이 작품 속의 화자는 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독자들과 함께 객석으로 내려오려고 한 것이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독자들을 작품 속의 인물처럼 취급하며 무대 위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로서 묘한 자유도가 느껴진다.

 

 실제로 수록된 해설에서도 이런 화자의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화자가 직접 나서서 인물들의 행동에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 독자와 함께 인물을 관찰하는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다. 최근 연극계의 새로운 트렌드인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er)의 화법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애매하게 풀어 관객이 무대 위로 손을 뻗을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화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독자와 같은 위치에서 작품 속을 거니는 것, 그것이 이 작품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추구한 서술 방식이 아닌가 싶다.

 

  매력적인 허구를 만드는 능력을 가진 마리야, 대조적으로 그럴듯한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없지만 진실을 무기로 사람을 압도하는 지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커튼 뒤에 숨어서 바라보는 작가. 이 세명의 작가가 빚어내는 이야기의 구도가 흥미롭다. 진실하지 못한 허구는 무너진다. 작가는 마리야처럼 그럴듯한 이야기를 마음대로 자아내기보다, 자신의 권위를 한 단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하고자 한다. 바로 지나의 방식대로 말이다.

 

 더 좋은 글쟁이가 되고 싶어서 도스또예프스끼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때문에 훌륭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그의 전집을 읽는 내내 나의 주된 테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저씨의 꿈>에 등장한 지나는 내가 추구하고 싶은 작가상을 지닌 모델로 기억될 것 같다. 궁극적으로 이야기란 진실을 기반으로 해야 하며, 작가 자신의 신적 권능에 의지한 것이 아닌 등장인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또한 이 모든 것은 독자의 참여를 북돋는 것이어야 한다.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는 작가가 되지 않기 위한 훌륭한 지침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진실한 사람인 동시에 진실한 작가가 되고 싶다. 그것을 위해 지나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치부와 밑바닥을 폭로하고도 그런 자신을 당당하게 인정할 수 있는 자신이 되고 싶다.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는 진실한 글을 쓰고 싶다.

 

 문장

그녀는 자신의 모든 과거가 가슴에서 뜯겨 나가고, 음산하면서도 위협에 찬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흐리멍덩한 가운데서도 깨달을 수가 있었다.
p.244

  모든 아픔과 진실을 목도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를 수 있는 어떤 경지에 도달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음산하면서도 위협에 찬'이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것은 자신이 현재 위치한 곳을 직시하고 '새로운' 생활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고 싶다. 그런 바람을 담아 이 문장을 골랐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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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의 꿈

 

 제1장

 

p.7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모스깔료바) 그녀는, 마치 자신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반대로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중략) 이러한 요구는 이미 그녀가 높은 단수의 정치력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표시이다.


 제목이 아저씨의 꿈이라 아저씨부터 나올 줄 알았는데 웬걸, 고고하고 약삭빠른 부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아직 초반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부인이 마음에 든다. 실제로 만나면 싫겠지만 등장인물로서는 마음에 든다ㅋㅋ

 

p.8 그녀에겐,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를 가지고도 경쟁 상대를 때려눕히고,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말살시켜 버리는 수완이 있어서, 우리들도 그런 일을 여러 번 목격했다. (중략) 이런 제스처는 아시다시피 최상류 사회의 것이다.


 이런 부분을 보고 멋있다고 느끼는 건 내가 잘못된 걸까? 중상모략이 활개 치는 사교계에서 저런 능력은 최상위 포식자의 능력이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사교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꼭 얻고 싶은 능력이다.

 

p.10 (나폴레옹과 달리)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무슨 까닭으로, 언제 어떤 경우에서도 현기증을 일으키는 일 없이 모르다소프에서 최상급의 귀부인으로 줄곧 통하고 있는가.

p.10 <이번에는 제아무리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인들 저런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라고 말할 만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어려움은 순식간에 해결되고 (중략) 오히려 이전보다 한결 형편이 나아질 지경이었다.

p.10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제 이쯤 되면 아무리 부탁하고 다녀 봐야 헛수고라는 것을 깨달아 요령껏 일을 정리하고 말았기 때문에 사교계에선 그녀의 영향력이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고, 그녀의 집은 여전히 모르다소프에서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그렇게 강한 이유에 대한 내용이다. 요점만 정리하자면, 그녀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에 구애받지 않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성적으로 판단한 결론을 주저 없이 따르기 때문에, 이런 점이 그녀와 다른 귀족들을 구분하는 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귀족이란 족속은 자존심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들이니까.

 

 제2장

 

p.23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모두 해결하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당사자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집을 들러 보아야만 하고, 또한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도 같이 방문해 보도록 권하고 싶다. 지금 시간이 사실 아침 열 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가까운 친구의 방문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해 마지않는다. 적어도 우리들이라면 틀림없이 맞아들일 것이다!

p.23 아침 열 시. 우리는 큰길가에 있는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집의 한 방에 와 있다. 우리가 안내를 받은 이 방은 무슨 파티라도 있을 때면 안주인이 살롱이라 부르는 방이다.


  재미있는 서술이라서 옮겨 보았다. 보통 관객에 불과한 독자를 등장인물의 하나처럼 취급하는 뻔뻔한 서술이 흥미롭다. 3인칭을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 싶어 발췌했다.

 

 제3장

 

p.40⎡(전략) 대관절 제가 뭣 때문에 그녀의 원수가 되겠어요? 사교계의 수석을 다투는 경쟁자란 말인가요? 전 그런 경쟁엔 관심이 없답니다. 그럼 그녀에게 수석의 영광을 주도록 하세요! 전 누구보다도 먼저 그녀에게로 달려가서 수석을 축복해 줄 아량을 갖고 있어요. 결국 모두 틀린 이야기예요. 전 그녀의 편이 되려고 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의무예요!(후략)⎦


  실로 현명한 처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이 사교계에서 살아남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일단 저렇게 말해놓고 이후에 한참 안나의 욕을 한다는 것이다ㅋㅋㅋ 그래 놓고 자신은 다시 그녀를 지지한다고 표명한다. 디스는 할 만큼 하고, 평판은 평판대로 유지하는 무서운 화법이다. 마리야 무서워!

 

 제4장

 

p.43 그의 행동거지엔 오랜 바람둥이 생활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어딘가 어수룩한 면이 있었다.


  지금은 늙고 볼품없어진 그의 몸에 남아있는 바람둥이 시절의 정력적인 흔적을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이 문장 하나로 공작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5장

 

p.75 ⎡네가 사랑한 것은 그 사나이, 그 서먹서먹한 숙맥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하고 아름다운 꿈, 잃어버린 자신의 행복, 자신의 고상한 이상이란 말이다.⎦


  제5장에서는 어떻게든 딸인 지나를 꼬드겨서 공작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는 마리야의 혓바닥 대전이 시작되는데(..) 이 문장만큼은 좋은 통찰이라고 여겨서 따로 발췌했다. 진짜 사랑이 아닌 가짜 사랑은 보통 이런 형태로 끝을 맺는 것 같다. 지나의 경우에는 진짜 그 선생을 사랑했던 것 같지만.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기준은 끝나고 돌아봤을 때 내가 사랑한 것이 상대방 그 자체였는지, 아니면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진 상대방이었는지라고 생각한다.

 

p.86 그녀는 예리하게 지나의 마음속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면서 그녀의 버릇대로 고상한 감정이란 것을 들먹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리야가 지나를 꼬드기는 부분들은 여기에 따로 발췌하지 않았지만, 정말 압도당할 정도로 엄청나다. 읽는 나조차 서서히 마리야의 말에 설득이 될 지경이었으니까! 마리아의 그 모든 화법을 요약한 문장이라 이것을 발췌하기로 했다. 공작과 결혼하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이득이 될 뿐 아니라 고상한 일이라는 식으로 지나를 계속 공략한다. 어미이기 때문에 딸의 약한 부분을 가장 잘 알아서 쉽게 공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마리야라는 인물 자체가 사람을 어떻게 흔드는지 잘 아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 초반에 나왔던 마리야에 대한 평가를 단지 평가로 두는 게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보고 느끼게 만드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상한 감정을 건드리는 것만큼 타인을 쉽게 움직이는 방법도 없다.

 

 제6장

 

p.87 대령 부인인 소피야 뻬뜨로브나 파르뿌히나가 까치를 닮았다는 비유는 정신적으로 볼 때의 이야기이지 몸의 생김새로 볼 때 오히려 참새 모습에 가까웠다.


  내용 자체는 별 게 없는데 도입부의 문장으로서 흥미로워 발췌했다. 구구절절하게 누가 있었고 누가 어떤 행동을 했고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뻔뻔하게 소피야에 대한 사견을 밝히면서 들어가는 도입이 마음에 든다. 이런 방식도 언젠가 써봐야겠다.

 

p.101 음...... 그 애가 공작부인이 되면 얼마나 훌륭해 보일까! 나는 그 높은 기품과 사람이 감히 접근하지 어려운 교만함과 대담한 점이 좋더라! (중략) 무슨 일에든지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게 될걸! 내가 없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순 없어!


  앞선 장에서 지나를 구구절절 설득했던 말들의 본심이 드러난 부분이다. 딸을 사랑해서기도 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렇게 움직인다는 점에서, 앞으로 삶에서도 마리야 같은 사람을 만나면 정말 주의해야겠다 싶고...... 나도 고귀한 이상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니 이번 기회에 마리야의 화법과 사고를 완전히 독파해야겠다 싶다. 마리야처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리야 같은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제7장

 

p.104 그러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흥분하는 것은 실패를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아니고말고!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일에 착수하고, 가능한 한 빨리 싸움을 벌이고 싶었던 것이다.


  지나가 공작과의 결혼을 받아들이자 잔뜩 고양된 마리야의 모습이 재미있다. 정말 도전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인 것 같다.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이 시대에 한몫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p.106 (지방의 수다쟁이들) 이들은 서로가 오랜 세월 동안 같이 흥미를 나누어 왔고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방을 서로 연구해 왔기 때문이다. 지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유리 뚜껑 밑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에서 산다. 존경할 만큼 예민한 이웃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숨기려 해도 이건 도무지 불가능한 노릇이다. 누구나가 당신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심지어 본인조차도 모르는 일까지 꿰뚫고 있는 것이다. 지방 사람들은 천성이 원래 심리학자이고 인간 영혼의 통찰가임이 당연한 것 같다.


  폐쇄된 소규모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짚어낸 통찰력이 돋보인다. 기본적으로 우리도 이런 공동체에서 살아갈 일이 많으니 자신의 행동을 더욱 주의해야겠다. 유리 뚜껑 밑에서 살아가는 만큼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일은 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것에 대해 남들이 어떻게 해석하든 그건 알 바가 아니지만, 우선 자기 자신에게는 당당해야겠지. 그런 점에서 마리야는 참 이런 소규모 공동체의 일원으로 적합 하달 지.

 

p.110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그녀의 적대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단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비록 말썽이 눈 앞에 보이더라도 성공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는 원리를 적용시켜 거기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리야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이 어떤 마인드에서 나오는지 서술하고 있다. 뭔가... 잘 나가다가 한 번 고꾸라지면 밑바닥까지 직행할 것 같은 그런 삶의 방식이긴 한데, 과연 마리야의 이번 계획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다. 진짜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 기분이다ㅋㅋ

 

 제8장

 

p.123 ⎡당신의 젊었던 황금 시절, 아무 근심 없이 지낸 황금 시절을 돌이켜보시고 이를 부활시켜 보세요! 자신을 한번 부활시켜 보세요!⎦

p.125 ⎡누가 공작님더러 늙었다고 하던가요? 누가 그런 소릴 했어요! 공작님께서는 그토록 풍부한 감정과 사상을 갖고 계시고, 쾌활하고, 위트가 이만저만이 아니시고, 생활력이 강하신 데다가 언동도 세련된 분이 아니십니까!⎦


  어떻게든 공작의 마음을 사려고 열심히 혓바닥을 돌리는 마리야다. 사람 마음은 저렇게 사는 거구나 싶고(..)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저런 얘기에 넘어가지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공작은 툭 치면 쓰러질 만큼 빈약한 사람이라 이 이야기에 홀랑 넘어가고 만다. 왠지 안쓰럽다.

 

 제9장

 

p.141 ⎡제가 그 애 앞에서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을 뿐 아니라 어쩌면 당신을 모함도 했겠지만, 제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 애에게 당신을 버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힘이 무척 들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왜 그렇게 멀리 보실 줄 모르세요!⎦


  마리야와 공작의 이야기를 엿듣고 분노하는 모즈글랴꼬프를 설득하는 장면인데 정말이지; 너무 뻔뻔하게 얘기해서 읽는 나조차도 설득이 된다(?) 이야기를 만드는 마리야의 능력을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이 여자는 작가가 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아마 글을 썼어도 한몫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제10장

 

p.162 그녀는 자기의 성질을 끊임없이 아파나시 마뜨베이치에게 퍼붓고 싶은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제(專制)를 하게 되면 마침내 그것이 습관화되고 습관은 필요로 변하게 되는 까닭이다.


  전제가 습관이 되기 쉽다는 통찰이 놀라워서 발췌했다. 하기사 전제는 습관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늘 조심해야겠다.

 

p.162 (전략) 상류 사회에 속하는 우아한 귀부인 가운데는 무대 뒤로 가면 살롱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언동을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대조적인 면을 그리고 싶다.


  중간중간 저렇게 작가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부분이 재미있다. 3인칭 적극적 작가 시점이라고 해야 하나? 잘못 사용하면 거슬릴 수 있는 화자 타입이지만 이런 코미디 중심의 작품에서는 괜찮은 것 같다. 언젠가 써볼 일이 있으려나.

 

 제11장

 

p.173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해보았겠지만,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거리에서 길을 잃게 되면 똑바로 걸을 수가 없는 법이다.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을 받아서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나타나는 거리란 거리, 골목이란 골목을 하나하나 더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빠벨 알렉산드로비치는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길을 잃는 감각에 대해 구체적이고 재미있게 묘사했다. 마리야에게 속은 것을 은연중에 깨달은 빠벨의 심상과도 동기화가 되는 장면이다. 역시 사람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마리야는 너무 교만했다.

 

 제12장

 

  딱히 발췌할 문장은 없었던 챕터라 간단한 감상으로 대신한다. 본격적으로 마리야가 위기에 빠지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나딸리야 드미트리예브나의 배신으로 모든 사람들이 마리야의 간계(공작과 지나를 결혼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방해하러, 그리고 실패를 조소하러 저택에 몰려든다. 설상가상으로 꼬드긴 줄 알았던 빠벨마저 돌아선다. 그녀가 가장 만만하게 여기고 조종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칼을 들이민 셈이다. 조금 통쾌하면서도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과연 마리야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극복하면 안 되지만! 뭐 그런 느낌ㅋㅋ

 

 제13장

 

p.207 지금까지 그녀는 자기의 계획이 무참히 짓밟히고 적의 방해가 너무 앞질러 있음을 깨닫고 있기는 했지만, 말없이 형세를 살피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다름 아니다. 마침내 그녀는 모든 형세를 알아 버렸기 때문에 단 한 번, 한 번의 타격으로 수백 마리의 히드라를 때려 부수기로 결심했다.

p.209 비밀을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보다 선수를 쳐서 그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그녀를 위협하고 타격을 주되, 지금은 그저 암시만을 주어 골탕을 먹이려고 계획했던 속이 검은 부인들은 이렇듯 대담하기 그지없는 고백을 듣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겁 없이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마리야 정말 대단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지 궁금해서 계속 기웃거렸는데 정면돌파를 해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한다. 결과야 실패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런 수단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정말 장군이 되었어도 될 인물. 그러기엔 인성적으로 많이 모자라긴 하지만, 어쨌든 저 상황을 저만큼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면 대단한 부분도 있다.

 

 제14장

 

p.223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분들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어요. 저는, 저희를 놀리려고 몰려온 이분들의 의견 따위는 경멸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모욕을 당하고 그냥 있을 수 없어요. 이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제게 돌을 던질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저나 어머니보다 30배나 뒤떨어진 인간임을 스스로 인정하려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저희에게 판결을 내릴 용기가 감히 있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바로 그 마리야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지나다. 성급한 행동이었을지는 몰라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고결함을 지킨 사람은 지나밖에 없는 것 같다. 스스로 공작을 유혹하기 위해 비굴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람들의 실없는 경멸을 비판하는 이 용기라니! 너무 멋지다. 동시에 유전학적으로 이게 마리야와 아파나시 사이에서 태어날 수 있는 생명체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정말 영웅적이고 멋진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p.232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제 이전과 같은 위치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오랜 세월 동안 이 거리의 사교계에서 떨쳤던 전제 군주와도 같은 위력은 이제 형체도 없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러면 그녀에게는 무엇이 남았는가? 철학자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철학자같이 행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면서 밤새도록 뜬눈으로 새웠다.


  큰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철학자가 된다... 그런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는 듯한 문장이라 발췌했다. 실제로 상실을 경험한 뒤에는 그 자리를 철저히 돌아보고 채워나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기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상실은 더욱더 커질 것이기에. 어쨌든 마지막까지 반성하지 않는 점(?)이 참 마리야 같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도 인격적으로 성숙하기보다 더 철두철미해지는 것을 선택하겠지. 뭐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될 수 있는 것도, 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니까.

 

 제15장

 

p.244 이러는 사이에 겨울의 짧은 해는 기울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별을 서러워하는 듯한 마지막 광선이 단 하나밖에 없는 얼어붙은 조그만 창문을 황금빛으로 물들였고, 이때 고통받던 이의 영혼은 사라져 가는 광선의 뒤를 따라 병으로 남루해진 그의 육체를 떠나갔다.

p.244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해 눈앞에 누워있는 것을 본 늙은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마주 잡더니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의 가슴에 목을 던졌다.


  지나가 사랑했던 바센까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존재를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으로 묘사한 것이 가슴이 아팠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한 줄로 묘사하자면 이런 것이 아니려나.

 

p.244 그녀는 자신의 모든 과거가 가슴에서 뜯겨 나가고, 음산하면서도 위협에 찬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흐리멍덩한 가운데서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바센까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의 곁을 지킨 지나의 결론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기에, 도리어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예감하는 모순이 아프다. 한편으론 희망이 느껴지기도 한다. 완전한 상실을 완전한 새 출발을 의미하니까.

 

p.252 그의 눈앞에 서 있는 부인은 눈부신 야회복 차림을 하고 온몸에 다이아몬드를 반짝이면서 거만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나, 바로 그녀였다.

p.253 마지막으로 <
시장 부인에게는 같이 살고 있는 어머님이 계신데 이 어머니가 최상류 사회 출신으로 아주 똑똑한 분>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어머니조차도 딸의 의사에는 절대로 거역하는 일이 없고, 시장 그 사람만 하더라도 아무리 보아도 지겹지 않다는 듯이 아내를 극진히 사랑한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수치를 견디지 못해 모르다소프를 떠난 마리야와 지나. 이후 모즈글랴꼬프는 엄청나게 성공한 둘을 다시 만나게 된다. 지나는 시장 부인이 되어 있었고, 마리야 또한 사교계에서 훌륭한 평판을 얻으며 출세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솔직히 조금 씁쓸했겠지만 이후 마리야가 지나의 뜻에 절대 거역할 수 없게 되었다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에 선수였던 마리야도 결국 지나의 고결함에는 패배했다는 뜻이니까. 이 문장을 읽기 위해서 한 권은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식한 고결함의 가치를 재확인시켜주는 결말이라 마음에 든다. 역시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는 모양이다.

 

 도스또예프스끼 창작사에서의 위치와 드라마적 특징에 관한 몇 가지 관찰

 

p.261 초기의 박애주의적이고 감상주의적인 경향성과 고골적인 과민하고 포화된 문제 지향적인 특성에서 점차로 벗어나 후기의 도스또예프스끼만의 작품 세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가 바로 그의 창작의 중기에 해당한다.

p.261 (아저씨의 꿈은) 그의 창작 과정의 중기적 특성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중략) 중기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 풍자적 드라마 혹은 사회소설적 성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이 해설 너무 어렵다ㅠ_ㅠ 죄송해요 교수님ㅠㅠㅠㅠㅠ 인터넷 문명사회에 태어나서 가뜩이나 떨어지는 가독력 때문에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ㅠㅠㅠㅠ 그래도 이해되는 선에서 발췌해볼게요... 여하튼 (다시 톤을 바꾸어) 아저씨의 꿈이 중기 작품인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읽고 있었는데, 해설을 보고 이게 중기 작품이라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가난한 사람들이나 백야와는 다른 느낌이긴 했지만 작품 분위기가 밝게 바뀌었을 뿐이지 작품의 성질이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찰에 도움이 되는 해설이었다. 앞으로 읽게 될 중기 작품들을 준비하는 마음 가짐으로 해설을 읽고자 한다.

 

p.262 이와 같은 줄거리의 『아저씨의 꿈』은, 위에서 언급한 도스또예프스끼 창작 발전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작품의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몇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p.262 1. 『아저씨의 꿈』에는 전기 도스또예프스끼 창작의 감상주의적 특성과 후기 창작에서 나타나는 사실주의적 특성이 함께 섞여 있다.

p.264 2.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의 일반적 특징으로 언급할 수 있는 드라마적인 성격이 이 작품에서도 역시 매우 강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중략) 연극적 요소에 대한 고려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p.265 2.1. (드라마적 특성은)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이 일정한 몇몇 세트와 같은 (중략) 좁은 공간에 한정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시간적 구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p.265 2.2. 『아저씨의 꿈』이 띠는 시공간의 무대적인 특성 외에도 화자의 역할과 인물들의 성격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전기 작품들에서 보이던 화자들의 적극적인 작품 내에서의 역할이 그의 중기 작품들에 이르면 상대적으로 매우 축소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후기 작품들에 이르면 인물과 인물들의 대화가 화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p.266 2.3. 개성화되는 작품의 인물들의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략) 화자는 공작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성격에 대한 가치 평가에서 어떠한 적극적인 역할도 삼간 채, 오히려 화자 자신은 작품의 한 등장인물로서 그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

p.267 2.3.1. 여기서 우리는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의 형식에 나타나는 다성악(多聲樂)적 성격에 대해 언급할 수가 있다.

p.267 2.3.1.1. 즉 주인공이 갖는 사상적 내용의 면에 얽매인 연구는 도스또예프스끼 창작의 구도 속에 있는 보다 본질적인 다수의 비융합적인 의식들을 무시하여 주인공들을 하나의 체계적, 독백적 전체로 축소시키고 있으며 (하략)

p.268 2.3.1.2. 독립적이며 융합하지 않는 다수의 목소리들과 의식들, 각자 완전한 가치를 띤 목소리들의 진정한 다성악, 동등한 권리와 각자 자신의 세계를 가진 다수의 의식들이 각자의 비융합성을 가진 채 어떤 사건의 통일체 속으로 결합하는 과정으로서의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속에서의 대화는, 따라서 결코 드라마의 대화적 성격과는 그 본질에서부터 다르다. 

p.268 2.3.1.3. 드라마는 언제나 확고부동한 독백적 테두리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결코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진정한 다성악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p.268 2.3.2. (그러나) 오히려 이와 같은 언급 속에서 우리는 그의 소설의 다성악적 성격이 드라마의 특성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소설에서 작가뿐만이 아니라 인물들이 독립적이고 완전한 가치를 지닌 관념과 의식의 담지자가 된다.

p.268 2.3.2.1. (드라마가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등장인물의 존재론적 측면이 3인칭 소설에서는 화자의 중재를 통해 약화된다면,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p.268 2.3.2.2. 바흐찐이 지적하는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의 다문체성과 비문체성에 대한 언급도 결국은 드라마에서 각 인물들이 띠게 되는 소리와 감정, 언어 구사 측면에서의 다양성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런 언급은 그의 소설의 드라마적 특성에 대한 언급에 다름 아니다.


  이 부분은 요약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위계화했다. 요약하자면 <아저씨의 꿈>은 초기의 감상주의와 후기의 사실주의가 뒤섞인 형태를 하고 있는 과도기적 작품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의 특징인 드라마(연극)적 성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데 제한된 시공간을 소재로 삼은 것이 그러하고, 화자의 역할을 축소하여 등장인물들이 서로 대화하고 싸우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게 만든다는 점이 그러하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화자가 등장인물에 대해 서술하는 형태이지만, 이 작품은 화자 또한 등장인물의 하나인 것처럼 만들어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이 하는 행동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 발췌할 문장이 이 내용을 더 명확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p.269 소도시 사교계 인물들에 대한 희극적인 성격 부여는 결코 화자의 평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인물과 인물들의 대화적 관계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계속해서 독자에게 보여지고 그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직접 판단하도록 만든다. 작품 속의 화자가 끊임없이 독자에게 말을 걸어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점은, 단순히 소설 작품의 대화적 성격뿐만 아니라 독자의 존재론적 위상이 드라마에서 관객의 위상만큼이나 작품의 구도에서 중요시됨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가장 독특한 부분이 바로 화자가 관객과 자신을 일종의 등장인물처럼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기법으로서의 서술 연출이 아니라 신의 권위를 갖춘 화자의 렌즈를 버리고, 작품 속에 살아가는 인물의 렌즈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였다는 해설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화자가 아닌 독자의 관점이 존재감을 갖추기도 한다.
확실히 마리야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작품에 대놓고 등장했다면 나도 이 정도로 마리야의 긍정적인 부분을 바라보지는 못했을 것 같다. 흥미로운 서술 연출이다.

 

 <아저씨의 꿈> 들여다보기

 

p.281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지요. 나는 좀 더 많은 것을 기대하였지만 소설은 서두르는 느낌을 줍니다. 몇몇 장면들은 과장되어 있으며, 지노치까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위적인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소설의 도입은, 제 생각으로는, 상투적이며 약간은 신문의 칼럼과 흡사합니다. 이런 것들이 결점으로 보입니다.


  이번엔 러시아 평론가의 글이다. 아무래도 자국 평론가의 글은 좀 더 작가와 밀접한 느낌이 있어서 좋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편지나 기사 등을 인용하여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작품과 연계하는 점이 재미있다. 이번 칼럼 역시 흥미로운 문장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 선생이 이번 작품에 대해 이렇게 평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좋다고 느꼈다는 부분에 대해서 도스또예프스끼가 전부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도감이 있고 희극적인 전개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 점이 모자라다고 느꼈다니... 섭섭하면서도 신기한 기분이다.

 

p.284 도스또예프스끼가 『아저씨의 꿈』에서 관심을 보였던(이는 아마도 쉬체드린의 영향이겠지만) 스캔들을 다루는 지방 신문 사회 면의 형식으로 되돌아온 것은 유형 이후의 문학 시기에 해당하는 『악령』부터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장르의 틀을 상당 부분 확대시킨 후, 여기에 당대의 새로운 정치적 성격을 덧붙였다.


  신문 칼럼 형태의 서술 방식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이 문단을 읽고 나니 악령이 너무 읽고 싶어 졌다. 악령에서는 이보다 더욱 발전된 방식으로 서술할 텐데,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매우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