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

011. 죽음의 집의 기록

쿠데 2020. 4. 26. 15:59

죽음의 집의 기록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05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시작

 

  도스또예프스끼의 유형 생활을 담은 이야기까지 왔다. 아마 이 작품 전후로 작풍이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달리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군들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 온 것 같아서 기대된다. 그 신호탄으로 <죽음의 집의 기록>을 펼친다. 예전에는 암울한 제목 때문에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떤 화려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할지 기대된다. 또 하나, 도스또예프스끼가 경험한 감옥을 텍스트로나마 나도 함께 느껴보고 싶다.

 

 감상

 

 이번 작품에서 가장 염두에 두고 읽고 있는 부분은, 바로 유형수들의 생활과 사고 방식이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유형수들만의 독자적인 문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고 경험해서도 안되는 일이니까(?) 이런 점에선 문학이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유형수들의 삶은 현대인과 그리 다르지 않다. 폐쇄적인 환경에 있는 현대인이라면 더욱 공통 범위가 좁혀진다. 현대인은 유형수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책이 더는 '감옥'에 대한 책으로 읽히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현대인이란 직장과 사회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 감금된 유형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현대인의 본질이 유형수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유를 추구할 수 있을까? 사회라는 거대한 감옥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메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주 유의미한 독서가 될 거라는 예감이 초장부터 들었다.

 

 우선 현실 세계와 비교하여 감옥이 어떤 곳인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유형수들의 삶의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분석한 뒤, 현대의 유형수인 우리들은 이 사회를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에 대한 나름의 소견을 써보고자 한다. 유의미한 독서였던만큼 유의미한 글이 되었으면 한다.

 

 감옥은 어떤 곳인가

 

 일반적으로 감옥을 떠올리면 무법 지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감옥은 감옥 고유의 질서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세계다. 실제로 죄수들은 폭력 사태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의 난처한 상황들을 피하기 위해 다들 암묵적으로 질서를 지키며 살아간다. 또한 감옥 안에도 부자와 빈자가 있으며, 선인과 악인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감옥이라는 곳은 어찌되었든 사회로부터 배제된 공간이기 때문에, 정상 사회에서 요구되곤 하는 일부 자질들이 무시된다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책임'과 '유대'가 바로 그것이다. 유형수들은 기본적으로 어린아이들처럼 무절제하고 무책임한 동시에, (감옥에서 만난) 타인과의 유대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현실에도 이런 사람들은 존재하지만 유형수들은 보다 극단적인 범위 안에서 다양한 케이스로 존재한다.

 

 우선 책임감의 부재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유형수들은 질서를 지키기는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아이들처럼 무절제한 모습을 보인다. 기껏 힘들게 모은 돈을 하룻밤에 술로 다 탕진해버린다든가,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소매치기를 한다든가, 그렇게 해놓고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점이 그러하다. 책임감이라는 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니, 사회로부터 배제된 이들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은 일견 당연해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어른스러움이라는 것이 성숙의 결과가 아닌 적응의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어른스러움이란 미덕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부여된 일종의 임무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의 형태에 따라 책임감의 형태도 달라지지 않을까? 북한 같은 감시 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것이 책임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책임감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책임감의 가치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특수한 것이 바로 유대감의 부재다. 유대 관계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본질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 유형수들은 깊은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을 기피한다. 필요한 최소한의 인간 관계만 맺을 뿐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려하지 않는 것이다.

 

 p.216

죄수들 사이에서 우정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일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죄수가 다른 죄수와 우정을 맺는 개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은 감옥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현저한 특징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대 관계를 맺어서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대 관계를 통해 사회적인 기반을 확보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타인과의 연결망 속에서 좌표를 찍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유형수들은 대부분 사회로부터 배제된 이들이다. 그들과 관계된다는 것은 '범죄자'라는 연결망 안에 자신의 좌표를 찍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제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스스로를 범죄자로 인식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유형수들 간에 유대감이 생성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유형수들은 이렇게 희박한 인간 관계 속에서도 잘만 살아간다는 것이다. 타인과 연결되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아갈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어쩌면 사회성이라는 것은 너무 과대평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의 삶에서 사회적인 유대 관계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행복이 아닌 생존의 차원에서는) 반드시 깊고 두터워야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책임감과 유대감, 둘 다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미덕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가변적인 합의의 산물이다. 오늘날 요구되는 책임감과 유대감의 형태가 미래에도 온전히 제값을 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니 이들을 무작정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항상 그 함의를 재해석할 준비를 해야한다. 특정한 세대의, 특정한 신념의 가치관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유형수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러나 이 왜곡된 사회 속에서도 선인과 악인은 존재한다. 범죄자라는 점에서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악의 꽃들이지만, 범죄자들만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는 그들도 저마다 다른 양상으로 존재한다. 재미있는 점은 선인과 악인 모두 마치 하나의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기주의'다.

 

 감옥의 선인들은 감옥의 고달픈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애쓴다.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또한 감옥이라는 환경에 집착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미래에 집중한다. 감옥에서조차 인간은 발전할 수 있으며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같은 유형수들 사이에서도 존경받고 감옥에서 나간 이후에도 자신의 삶을 잘 복구해나간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선인'이라 표현한 것이다.)

 

 반면, 악마와 같은 죄수들도 존재한다. 그들의 악마성은 폭력성이나 잔혹한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둔함'에서 나온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를 '육(肉)이 그의 모든 영(靈)적 특성을 제압(p.96)'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육체의 본능과 욕구에만 충실한 동물과도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을 도스또예프스끼는 타락한 존재라고 부른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은 선인들과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타인을 파괴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화자인 주인공은 이런 선인과 악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낼 방법을 고민한다. 어떻게 이 험난한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게 바로 이 수기를 남기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주변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글로 적어내는 행동을 통해 메타적인 관점을 가지려 애쓴다. 환경에 사로잡히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보다 더 높은 시야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뿐이기에.

 

p.434

나는 우리 감옥 전체와 내가 이 시기에 경험했던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고 분명하게

하나의 광경으로 제시하고 싶었다.

 

 더 나아가 그는 자기 자신를 바라보는 시선조차 바꾼다. 감옥 생활이 준 근엄한 고독이 그를 각성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과 사회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한다. 적어도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만큼은 그러했으리라 믿는다.

 

p.435

정신적으로 고독했던 나는 나의 지난 전생애를 되돌아보았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것을 다시 취해서

나의 과거를 깊이 음미해 보고 용서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평가해 보았으며,

심지어 어떤 때는 이러한 고독을 나에게 보내 준 운명에 감사할 정도였다.

이러한 고독이 없었다면 자신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지난 생애에 대한 엄격한 비판도 없었을 것이다.

 

 왜곡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굴절상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독이 조금 필요하다. 책임감과 유대감이라는 사회적인 연결망에서 벗어나 잠시 잠깐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초라하고 나약한 자신을 발견함으로서 우리는 진정으로 단단해진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결국 현실도 감옥과 마찬가지다. 단단한 철창을 책임감과 유대감이라는 그물로 엮어 만든 거미줄이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거미줄에 사로잡힌 벌레가 아닌 거미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죽음의 집의 기록>에 등장했던, 감옥에서조차 존경받았던 존재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인물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구태여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애쓰지 않아도 모두가 알게 마련이다.

 

 타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제레뱌뜨니꼬프 중위와 스메깔로프 중위다. 가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체벌 자체를 즐기며 죄수들을 괴롭히는 제레뱌뜨니꼬프 중위와 달리, 스메깔로프는 체벌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즐거움을 투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제레뱌뜨니꼬프와 같은 특권 의식이 없다. 그리고 죄수들은 스메깔로프에게 엄청난 존경심과 지지를 보낸다. 왜냐하면 그는 사적인 감정으로 죄수들을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가 타인을 '평가'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평가하지 않을 것

 

 평가라는 것은 어떤 기준에 따라 혼돈을 질서로 나열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 기준이라는 것은 항상 모호할 수밖에 없으며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모호성에 따라 삶을 분류하다 보면 우린 환경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대학의 간판을 기준으로, 재산의 양을 기준으로, 직업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비교하는 행위를 그만둬야 한다. 모호한 기준으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거미줄 속에 살아가는 한 그런 평가를 완전히 그만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크든 작든 우리는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남과 비교할 것이다. 더군다나 힘과 특권을 가진 사람일 수록 이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더욱 어렵다. 도스또예프스끼도 이야기 하듯 '나는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 해도 이러한 타성 때문에 짐승처럼 우매해지고 광포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피와 권세는 인간을 눈멀게 하는 법이다.(p.311)' 라는 인간의 특성 때문이다. 

 

 힘과 권력 앞에서 특권 의식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나로서는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스메깔로프 중위는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낸다. 스메깔로프 중위가 체벌 전에 사소한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서 체벌의 분위기를 나쁘지 않게 끌고가는 것 또한 그런 행동의 일환이다. 그는 체벌을 눈 앞에 둔 죄수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고 한다. 어차피 처벌을 하는 거라면 뭐가 다를까 싶지만, 이 작은 차이로도 죄수들은 크게 감동한다.

 

 어떻게 그는 특권 의식에서 벗어나 상대를 평가하지 않고 온화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는가? 이것의 기반은 상대를 이해하고 그 마음에 공감을 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 이 능력을 후천적으로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하고 그들의 본질을 파악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가장 훌륭한 매체가 바로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라벨 너머의 인간을 그려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CEO, 그러나...' 문학은 바로 이 그러나에서 부터 시작한다. 죄수가 아닌 인간을 그려내고자 했던 도스또예프스끼의 시도 또한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평가를 멈추게 하는 문학의 힘

 

 결국 이 작품은 인간이 가진 고유의 개별성을 말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같은 죄수복을 입고 획일적인 행동을 강제받는 감옥에서조차 인간의 고유성은 훼손되지 않는다. 사회적인 라벨을 모두 떼어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p.390

지금 나는 우리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분류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중략)

현실은 세분화를 지향한다. 그것이 어떠하든지 모두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자신의 고유한 인생이 있고,

그것은 획일적이고 공식적인 삶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자신만의 고유한 삶인 것이다.

 

 그리고 관념이 아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비로소 자타를 비교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에게도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뿌리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완성이 된다. 어떤 직급의, 어떤 직업의, 어떤 계층의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과 만나고 그 뿌리를 다져가는 과정에 있어서 사회적인 관념들은 일종의 노이즈라고 볼 수 있다.

 

 단단한 삶을 위해서 나 또한 그렇게 편견없이,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을 사람으로서 바라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관념 외에 그 사람이 가진 기질 자체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는 결국 그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앞으로도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계속 읽어 나가고 싶다. 나는 단단해지고 싶다.

 

 이 모든 고찰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감옥에서 겪은 고독의 시간들을 축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지금 겪고 있는 이 고독의 시간들을 온전히 삯혀내어, 나 자신의 뿌리를 단단하게 얽어가는 과정으로 승화시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보는 훈련을 해야겠다. 더 많은 작품을 읽어야겠다. 사회적 관념에 가려진 인간을 보고, 그 눈으로 나를 볼 수 있어야겠다.

 

  문장

현실은 끝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분명하고 큼직큼직하게 구별하기는 어렵다. 현실은 세분화를 지향한다. 그것이 어떠하든지 모두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자신의 고유한 인생이 있고, 그것은 획일적이고 공식적인 삶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자신만의 고유한 삶인 것이다.
p.390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테마인 '사회가 규정할 수 없는 개인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문장이라 선택했다. 죄수이건, 호인이건, 부자이건, 거지이건 우린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개개인만의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평가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체득하기엔 정말 어려운 관점이지만 인생에 걸쳐 두고 두고 내면화하고 싶은 관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며, 너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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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의 기록

 

제1부

 

 서론

 

 10년 동안 유형수 생활을 했던 남자의 기록을 들춰보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과묵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듯한 이 유형수(=도스또예프스끼)가 경험한 감옥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1. 죽음의 집

 

p.22 그렇다, 인간은 불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일지도 모르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발췌했다. 그 끔찍하고 노린내나는 감옥 생활조차 인간은 적응한다.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런 삶의 위대함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했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문학적으로 그것에 접근할 것으로 보인다.

 

p.25 대개는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별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 흘러가 버린 일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중략) 보통 자기 인생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그래서 호기심 역시 유행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습관이 되지 못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p.26 대체로 말해서 이곳의 대부분의 죄수들은, 물론 지나치게 쾌활하여 이 때문에 경멸을 받는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 음산하며 시기를 잘하고, 무섭도록 허세를 부리며 오만하고 화를 잘 낼 뿐만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형식주의자들이었다.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는 능력이 최상의 미덕이었다.

p.29 유언비어, 음모, 아낙네와 같은 중상, 시기, 말다툼, 악의가 언제나 이 절망적인 생활 속에서 제일 중요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부분은, 유형수들의 생각과 행동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설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그들의 모습이 현대인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합당한 가설인지 계속 지켜보려고 한다.

 

p.31 사람은 흔히 몇 년씩 참고 굴복하며 가장 가혹한 체벌도 이겨내지만 갑자기 어떤 사소하고 하찮은,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폭발하는 법이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실제로 그래서 일을 저지르기도 하니까 말이다.

p.31 나는 이러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그마한 참회의 징후나, 자신의 죄에 대한 고통스러운 생각들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대부분이 마음속으로 자기가 완전히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췌할 문장이 많아서 재미있다. 이런 부분은 유형수들만의 독특한 성격이라 눈길이 간다. 역시 형벌을 받는다고 해서 죄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반항심 때문에 더 뻔뻔해지는 케이스가 많다니 신기하다. 사람을 회개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매질이 아닌 사랑인가 싶기도 하고.

 

p.33 특히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의 기억이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중략) 나와 함께 사는 동안 줄곧 그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쾌활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는데, 절대 바보는 아니라고 해도 극히 무분별하고 경솔하며 판단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결코 한번도 그에게서 어떤 특별한 잔혹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판단력 없는, 즉 사고하지 않는 사람들이 범죄자와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보여준다. 공감의 결여는 범죄의 씨앗이다.

 

  2. 첫인상

 

p.41 노동 자체는, 사실 강제 노동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괴로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는데, 아주 오랜 기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이 강제 노동의 어려움이, 고달픔과 끝없음 때문이 아니라 몽둥이 밑에서 의무적으로, 강제적으로 해야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p.42 만일 사람을 완전히 짓밟아 버리거나 없애 버리고 싶어서 가장 참혹한 형벌로 그를 벌하고 싶다면 (중략) 그것에 아주 전적으로 쓸모 없고 무의미한 성격을 노동에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무의미한 노동의 무서움을 말하고 있다. 어쨌든 노동은 시간과 삶을 소모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것에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면, 그것만큼 존재를 훼손하는 행위도 없는 것이다.

 

p.43 유형 생활에는 다른 무엇보다 더욱 힘든 고통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강제적인 공동 생호라>이었다. 물론 공동 생활은 다른 곳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감옥에는 어느 누구도 그들과는 친숙해지고 싶지 않았을 사람들도 들어오게 마련인데, 나는 모든 죄수들이, 물론 그것이 대부분 무의식적이라고는 해도, 이러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읽으니 군대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의 본질은 감옥인걸까? 새삼 군대라는 조직이 무섭게 느껴진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결국 유형수 생활을 한 번씩 해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지.

 

  3. 첫인상

 

p.43 죄수들은 돈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돈을 모든 것 이상으로, 자기의 자유와도 견줄 만한 것으로 평가했으며, 그래서 만일 돈이 호주머니 속에서 딸그랑거리면 그들은 벌써 위안을 받을 정도가 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감옥에서 만난 군상들의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죄수들의 인상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돈과는 이미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듯한 죄수들도 누구보다 많이 돈에 집착한다는 점에 흥미로웠다.

 

p.70 어쩌면 내가 틀렸는지도 모르지만, 웃음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데, 만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웃음이 처음 만나서부터 만족스러운 것이라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이다.


 죄수의 이야기와는 크게 관계가 없지만 사람의 미소에 대한 통찰이 마음에 들어 발췌했다.

 

p.71 죄수들이란 자기 본능에 따라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잠시라도 자기의 근심을 잊기 위해 갑작스레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고>, 음악과 고함소리에 맞추어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는 것에 마음을 쏟는 그런 경솔하고 무질서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p.72 옷을 잘 차려입었을 때의 만족감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는데, 사실이지 여러 가지 면에서 죄수들은 완전히 아이들이었다.


 어른스러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는 구절. 사회와 괴리된 인간은 어린아이처럼 본능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어른스러움은 사회를 구성하는 본질인 걸까.

 

p.76 감옥에서 밀고자는 조금도 멸시를 받지 않으며 그에 대한 분노조차도 생각할 수 없다. 그를 따돌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와 계속 친밀함을 유지하기 때문에, (중략) 감옥에서는 모든 죄수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이 쓸모없는 자를 벌하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비난조차도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는 가장 악질인 케이스에 속하는 밀고자들이, 감시 사회인 감옥 속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는 존재로 치부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마 극장 국가인 북한도 이런 상황이지 않을까.

 

p.86 살인 혹은 살인의 음모는 지극히 불쾌한 일로 감옥 전체를 위협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리 되면 심문과 수색과 가혹함이 강화되기 시작할 것이므로 죄수들은 전력을 기울여 대개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자제하려고 애쓰는데,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두가 잠잠해져서는 관망만 하고 있었다.


 감옥에서도 지켜야 하는 평화가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보통 감옥이라고 하면 언제 누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살벌한 사회를 생각하게 되는데, 현재까지 묘사된 감옥의 모습은 폐쇄적인 사회 이상 이하도 아니다. 사람들이 갖는 이런 일반적인 편견에는 뒤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된다.

 

p.88 그렇다, 감옥에는 이러한 사람들도 들어온다. 예를 들면, 깨끗한 양심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요양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이러한 사람과 나란히, 자기가 저지른 살인에 대해서는 결코 한 번도 되새겨 보지 않고서 자신의 일생을 전부 감옥에서 보내는 사람도 있다.

p.89 과연,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벌이 주어져야 하는 것인가?


 감옥에서도 존경할 만한 사람과 인간 말종이 공존하지만, 처벌이란 과정이 아닌 결과에 행해지는 것이기에 이 둘이 같은 형벌과 취급을 받게 되는 아이러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감옥에 다녀온 사람만 해볼 수 있는 생각이 아닌가하여 발췌했다.

 

  4. 첫인상

 

p.90 죄수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죄수들을 어쩐지 과장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그들은 죄수들이 갑자기 불쑥 자신들 중의 누군가에게 칼을 들고 덤벼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서 매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p.91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죄수들 스스로가 사람들이 자기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으로, 바로 이 점이 아마도 죄수들에게 배짱과 같은 어떤 것을 가지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죄수들에게 가장 훌륭한 간수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개 이러한 배짱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은 자기들을 신뢰해 줄 때 비할 바 없이 유쾌해진다.


 아마 이후로 별다른 문단이 없다면 아마 이 문
단이 이 책에서 고를 한 문단이 될 것 같다. 죄수들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그들을 과장해서 바라보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고 기고만장해지는 죄수들과, 그런 그들의 본질을 간파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던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허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들여다 보지 못하고 있는가. 두고두고 읽어보고 싶은 문장이다.

 

p.96 나는 살면서 그처럼 강하고 강철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p.96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무제한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어떤 종류의 고통과 형벌도 무시했으며,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그에게서는 끝없는 어떤 에너지의 활동의 욕망과 복수의 욕망, 예정된 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을 찾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의 이상스러운 오만한 때문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는 믿기 어려울 만큼 오만하게 모든 것을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일부러 허세를 부리느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놀라게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결코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을 예기치 않은 침착함으로 바라보곤 했다.


 죄수이긴 하지만 (그리고 아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겠지만) 강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라서 발췌했다. 강함이란 결국 타인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넓은 의미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는 인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움직이고 있는가.

 

  5. 첫 달

 

p.133 죄수들에게 돈 이상의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 혹은 자유에 관한 어떤 꿈 같은 것이다. 하지만 죄수들은 그 이상의 것을 꿈꾼다. (중략) 그러나 돈을 쓰면서 죄수는 벌써 <자기의 자유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p.134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인생의 어떤 환영과 자유에 대한 요원한 환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p.135 죄수에게서 거의 모든 자의적인 개성의 표명은 죄로 간주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고려하기로 하자.


 실제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하는 죄수들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또한 이런 자유를 얻게 만드는 기재는 바로 '돈'이다. 결국 돈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죄수란 인간으로서의 개별성을 허락받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가 더욱 큰 환영으로 다가온다는 설명이 인상적이다. 죄수의 본질을 꿰뚫는 문장이다.

 

  6. 첫 달

 

p.138 나는 그때 웬일인지 감옥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나를 속이며 나에게 두 번, 세 번, 심지어 다섯 번이나 돈을 빌리러 왔던 죄수들에게 순진하게도 심하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중략) 돈을 다섯 번이나 빌려줬다고 나를 비웃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무척이나 화가 났다는 점이다.

p.138 만일 반대로 내가 그런 부탁을 거절하고 그들을 쫓아 버렸다면, 확신컨대 그들은 나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존경하게 되었을 것이다.


 감옥에서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이건 사회에서 마찬가지지만. 자기 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p.146 선량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들은 이내 멸시를 당했다. 이러한 사실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쾌활한 사람들 중에서도, 으르렁거리거나 그런 것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결코 어느 누구도 용서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존경을 받았다.

p.147 그러나 <심각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렇게 격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감옥에는 우월감과 모든 일에 대한 박식함과 재치와 강직함, 지혜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은 다른 죄수들을 품위와 관용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므로, 불필요한 말싸움은 상대도 하지 않았으며, 간수들도 이들을 좋게 보고 있어서 노역에서는 감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감옥 생활을 하는 중에도 줄곧 내게 무척이나 공손했지만 말수는 아주 적었는데, 그것도 품위를 지키려는 까닭인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을 현명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례들이다. 자기 자신을 지킨다고 해서 격정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현명하고 강직하게 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감옥 내에서도 높은 취급을 받았다는 레포트다. 이런 사람들이 왜 감옥에 갔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삶의 자세이기도 해서 발췌했다.

 

p.154 나는 그들 앞에서 내가 받은 교육이나 내 사고의 형상을 비하하는 행동은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만일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도록 기분을 맞추기 위하여 그들에게 아첨을 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말에 동의를 하기 시작하며, 그들과 허물없이 지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질>을 용인하기 시작했다면, 그들은 내가 겁이 나고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고 나를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인공 나름대로 생각해낸 처세 방법이 이것이다. 자신을 비하하거나 그들에게 아첨을 하는 행위를 일절 하지 않음으로서 중심을 지키고자 한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는 행동이 중심을 흔드는 게 아닌가 싶다. 평가를 함과 동시에 중심이 흔들린다는 것을 기억해둬야겠다.

 

  7. 새로운 지기(知己)들, 뻬뜨로프

 

p.160 나는 노동이 나를 구할 수 있으며, 나의 건강과 육체를 튼튼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략) <자주 바람을 쏘이고, 매일 피곤하게 하며,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을 배우는 일>, 바로 이러한 것들이 최소한 내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몸을 단련하여 건강하고 활기에 넘치며 힘센 젊은이가 되어 세상에 나가리라>하고 말이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일과 운동은 내게 무척이나 유익한 것이었다.


 감옥에서도 노동과 일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아니, 감옥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인간은 움직여야 한다. 움직일 때만이 인간은 자신이 인간임을 확신할 수 있다.

 

 8. 단호한 사람들 ㅡ 루츠까

 

p.176 한 사람이 온순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는 괴로운 운명을 감내하고 있다. (중략) 만일 감옥에 와서 그를 보게 된다면 <정말로 이 사람이 사람을 대여섯이나 죽인 사람이 맞을까?> 싶게 코와 침을 흘리고 학대받는 사람이 되어 있으므로 다시금 놀라게 된다.


 p.176에서 p.177까지 이어지는 긴 문단이라 여기서는 앞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요약했다. 평범하고 온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고, 반복하고, 변화하는지를 고찰한 무서운 문단이다. 이 문단은 통째로 죄와 벌의 내용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와 벌을 읽을 때 다시 염두에 두고 봐도 좋을 것 같다.

 

p.184 죄수들은 지나치게 친밀한 것도, 상관의 <지나친> 친절도 좋아하지 않는다. 상관을 존경하고 싶어하면서도, 그렇게 되면 웬일인지 그를 존경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죄수들은 자기의 상관이 훈장이 있거나 풍채가 좋거나 윗사람으로부터 총애를 받거나, 엄격하고 무게가 있으며 공정하고 자기의 위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면 마음에 들어 한다. 죄수들은 그러한 상관을 훨씬 사랑한다. 말하자면, 자기의 위엄을 유지하면서도 죄수들을 모욕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금상첨화인 것이다.


 감옥이나 죄수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사람들은 잘해주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면서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

 

 9. 이사이 포미치, 목욕탕, 바끌루신 이야기

 

 유대인인 이사이 포미치의 기행과 바끌루신이 끌려오게 된 사연, 그리고 죄수들이 단체로 목욕탕에 갈 때의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에피소드다. 목욕탕을 묘사한 장면이 정말 인상적인데, 인계에 떨어진 지옥이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지옥의 모습이 의외로 그렇게 끔찍하지 않으며, 나름대로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묘한 기분이 든다.

 

 10. 성탄절

 

p.216 죄수들 사이에서 우정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일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죄수가 다른 죄수와 우정을 맺는 개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은 감옥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현저한 특징이다. 자유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지만 말이다. 이곳에서는 대개 모든 사람들이 남과 교제를 할 때면 냉담해지고 메마르곤 하는데, 아주 드문 예를 제외한다면, 이러한 것은 형식적이고 일정하게 정해진 분위기를 갖게 마련이다.


 유대감이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낮아지진 않을 것 같았는데 유대를 쌓는 행위 자체가 묘하게 금기시되는 분위기에 놀랐다. 사회로부터 배제된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 사회성도 저하되는 것일까? 사회성이라는 것은 삶에 있어 필수이긴 하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최저한의 사회성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의미하는가? 여러가지 질문이 떠오르는 문단이라 발췌했다.

 

 11. 연극 공연

 

p.247 죄수들 전체를, 아무런 개인적인 구분 없이 다수로, 하나의 무리로 볼 때, 일반적으로 감옥에서는 돈과 부에 대해 어떠한 존경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앞에서는 죄수들이 돈에 환장한다고 서술되어 있어서 일견 모순된 문장처럼 보이지만 돈 자체에 대한 존경심은 없다는 의미로 보았다. 돈이라는 것도 사회적인 재화니까, 그 물질적인 필요성(매매)를 제외하며 죄수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p.262 이 같은 불행한 사람들에게도 잠시나마 자기 식대로 살 수 있는 것, 인간답게 웃을 수 있는 것, 일순간이라도 감옥 같지 않은 현실을 느끼는 것 등이 허용됨으로써, 그들은 잠시나마 정신적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수라도에도 빛은 존재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보았던 진리가 이곳에도 비춰지고 있다. 가장 추악한 범죄자들에게도 위안 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해서 살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제2부

 

 1. 병원

 

p.274 어떻게 항상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내게 친절을 베풀며 시중을 들려는 여러 사람들을 거절할 수 없었고, 그들은 언제나 자진해서 내게 접근했으며, 결국에는 완전하게 나를 소유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내 상전이며 오히려 나는 그들의 하인인 꼴이 되었지만, 외면상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은 어찌된 셈인지 하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귀족 나리가 되어 갔다.


 떠받들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에게 종속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표현된 문장이다. 인간 관계에 아래 위는 없다. 기대는 사람과 기대어주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대어주는 사람이 더 강한 것은 당연하다. 기대는 사람은 지지대가 없으면 무너지니까.

 

 2. 계속(병원)

 

p.292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미결수들은 체형 집행을 지연시키기 위해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곤 했다. 예를 들면, 형 집행 전날 관리나 동료 죄수들을 칼로 찔러 새로운 재판에 회부됨으로써 두 달 정도 후에 형벌이 두세 배가 될 것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지금 당장 며칠이라도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일단 벗어나기만 하면, 후에 무슨 일이 생겨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체형이 얼마나 아프기에 이런 짓까지...? 또 하나, 미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당면한 과제에만 급급한 죄수들의 모습에서 인내심 또한 사회적인 기질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로 변화했으니 인내심이 떨어지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p.296 나는 맞은 사람이 자기를 때린 사람과 그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때렸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남다른 선량함과 선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그 천진함을 보고 항상 놀라곤 했다는 것이다. 내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고 떨릴 정도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금도 증오나 원한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개 어린애처럼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p.297 죄수들은 관리에게 죄를 범했을 경우 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범죄 그 자체에 관한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실제로 관리가 그의 범죄를 보는 시각이 자신과 완전히 다음으로 해서 벌을 받았다고, 관리는 그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297 그는 증오나 원한을 품지 않으며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닌 매우 오래 전부터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수동적이긴 하지만 계속되는 투쟁의 양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떤 병사일지라도 터키 군과 싸울 때는 개인적으로 터키 병사를 증오하지는 않는다.


 체형에 대해 증오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신기해서 그 이유를 파헤쳐 보려고 여러 문장을 발췌했다. 정리하자면 자신이 처벌을 받는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어떤 규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증오하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어떤 문제로 상처를 받거나 힘이 들 때, 그것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확장시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가령 일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혼이 났을 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사회에 널려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상처를 달래는 식인 것이다. 어떻게 응용하느냐에 따라 독도 되고 약도 되는 방법이다.

 

p.303 (스메깔로프 중위) 중요한 것은 그의 채찍 자체가 우리에게는 왠지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 정도로 죄수들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으로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무엇으로 그는 그런 인기를 얻었단 말인가?

p.304 스메깔로프는 죄수들을 <자기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그들에게는 하얀 손을 가진 귀족 자제 같은 구석이 없다. 오히려 특별히 우리 민중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게 되는 평민다운 냄새가 난다. 우리 민중은 이 냄새에 얼마나 민감한가! 그들은 이 냄새를 위해 무엇도 아끼지 않는다! 만약 민중과 다른 특별한 삶의 냄새를 가지고 있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아무리 고질적인 것이라 해도 민중에게 자비로운, 인기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고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에 비록 자기 방식대로라도 선ㄹ야하기까지 하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 인간의 가치는 무한한 것이다!


 똑같은 체벌자지만 죄수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메깔로프 중위의 인기 요인을 분석하고 있다. 그에게는 특권 의식이나, 체벌로부터 얻는 희열 같은 것이 없다. 그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죄수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대할 줄 안다. 특권을 가진 인물이 특권 의식 없이 사람들과 어울릴 때,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거나 동경하게 되는 것 같다.

 

p.292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미결수들은 체형 집행을 지연시키기 위해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곤 했다. 예를 들면, 형 집행 전날 관리나 동료 죄수들을 칼로 찔러 새로운 재판에 회부됨으로써 두 달 정도 후에 형벌이 두세 배가 될 것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지금 당장 며칠이라도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일단 벗어나기만 하면, 후에 무슨 일이 생겨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체형이 얼마나 아프기에 이런 짓까지...? 또 하나, 미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당면한 과제에만 급급한 죄수들의 모습에서 인내심 또한

 

 3. 계속(병원)

 

p.312 자발적인 형리는 물론 모든 면에서 후자의 형리보다 더 악독하다. 사람들은 자발적인 형리들을 혐오하고 증오하며 알 수 없을 정도의, 거의 미신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외시한다.

p.313 마지못해 의무 때문에 하는 형리 (중략) 의무에 의해서 때린다 할지라도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자신을 못마땅해 하면서 때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때라도 맞는 자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은 거의 갖지 않는다.


 타인을 대할 때에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이들과, 감정을 개입하지 않는 이들의 차이다. 앞서 보았던 두 중위의 케이스도 이것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을 듯하다.

 

 4. 아꿀까의 남편 ㅡ 한편의 이야기

 

p.129 일은 보통 이렇게 진행되었다. 알료샤가 나와 함께 들어서서 소심하게 그녀에게 말을 붙이고 겁먹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를 본다. (중략) 반대로 그녀는 한층 더 애교부리고 더 부드럽고 명랑하게 대한다. (중략) 마치 알료샤를 용서하는 바로 그 과정 가운데서 그녀는 특별하고 세련된 즐거움을 찾는 듯했다. (중략) 그녀가 온순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자 알료샤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래서 이내 마음을 가볍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가 말하듯 모든 것을 이전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묻지도 않는데 모든 것을 스스로 털어놓는다. 용서를 받고 나면, 그는 희열에 젖어 들고 이따금 기쁨과 감동에 사로잡혀 울기도 하며, 그녀에게 입맞추고 끌어안는다.


 알료샤와 나따샤, 이 정신나간 커플(?)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이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는 게 맞는 것인가? 죄를 저질러놓고도 아이처럼 응석부리고 싶어하는 알료샤와, 그런 알료샤를 어머니처럼 관대하게 품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나따샤다. 왠지 이 커플은 마지막까지 절대 헤어지지 못할 것 같다. 이렇게 나쁜 쪽으로 서로 궁합이 맞아도 연인이 되는 거구나 싶다.

 

 5. 여름철

 

p.349 숲속의 방랑 생활은 감옥 생활에 비하면 천국과 같은 생활인 것이다. (중략) 비록 괴롭기는 해도 자신만의 충만한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p.350 이같이 무한대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선고받은 죄수들은 10년 쯤은 감옥에서 보냈다 하더라도 언제나 운명을 바꿀 꿈을 꾸고 있다.


 감옥에서 자유가 얼마나 큰 가치인지 느낄 수 있는 문장이라 적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자유를 매일 누리고 있음에도 불행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p.355 감옥에서는 갖가지 물질적인 불편이 수반되는 저주스러운 생활을 견뎌 내기 위해서 육체적 힘이 정신적인 힘에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다.


 무언가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육체와 정신 양쪽의 힘이 모두 필요한 것 같다. 한쪽에 치우쳐져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6. 감옥의 동물들

 

p.378 <기쁨을 표시하는 데는 체면치레 같은 것을 차려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중략) 나는 이 작은 영물을 말할 수 없이 사랑했다. 그의 운명은 기쁨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 느껴졌다.


 가장 몰입해서 읽은 에피소드 중 하나였는데 (동물을 워낙 좋아해서 그런 듯) 그 중에서도 벨까와 더불어 가장 마음에 남았던 꿀쨔쁘까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고양이보다 개를 더 사랑하는데, 그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는 꿀쨔쁘까다. 개들만이 가지고 있는 그 순수하고 솔직한 호의란. 벨까의 이야기는 너무 아파서 발췌하지 않았다.

 

 7. 항의

 

p.389 목적과 희망을 잃은 사람은 슬픔으로 인해, 악인으로 변해 버린다....... 우리 모두에게 목적은 바로 자유이고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보통 악역을 만들 때는 목적 의식이 확실하고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악인은 이런 부류가 더 많을 것이다. 대다수의 절망자들은 권력도 힘도 없기 때문에 픽션에서나 나올 법한 악역이 될 수 없다. 이런 유형을 악역도 잘 만들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p.390 현실은 세분화를 지향한다. 그것이 어떠하든지 모두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자신의 고유한 인생이 있고, 그것은 획일적이고 공식적인 삶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자신만의 고유한 삶인 것이다.


 고유한 삶을 가지지 않는 존재는 없다. 모두에게 획일성을 강요하는 감옥에서조차 인간은 고유한 것으로 존재한다. 왠지 위안이 되는 구절이다.

 

p.391 무엇보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교육받지 못하고 가장 압박받은 계층일지라도, 정신적으로 가장 섬세하게 발달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하층민에 대한 애정과, 인간을 인간 자체로 보려고 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휴머니즘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발췌했다. 인간은 인간이다. 계층은 (강력한) 사회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8. 동료들

 

p.424 무엇 때문에 죄수들을 그렇게 사랑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는 죄수를 보면 상냥하게 유쾌한 말을 건네고, 그들과 농담하며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고압적인 태도나 상관이기 때문에 보여주는 너그러움 같은 것이 전혀 풍기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죄수들도 자신의 동료이자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의식이었다.

p.425 그가 죄수에게도 인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고, 대개의 상관들이 갖는 멸시하는 듯한 태도가 그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이 죄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죄수들로부터 무척 사랑 받았던 독수리 사령관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어떻게 죄수들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저자 나름의 통찰이 담겨 있다. 핵심은 역시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현재 있는 위치의 고저차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존재하는 사람 그 자체로서 대하는 것. 나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것을 인지할 때, 진정한 여유가 생기게 되고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나의 뿌리가 세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노력으로 가능한 부분일까.

 

p.426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때때로 이상하고 예외적이었다. 어떤 사람들, 특히 매우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종종 완전히 역설적인 개념이 박혀있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인생에서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것을 너무 귀중한 가치로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그것을 떼어낸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거의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사례가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너무 똑똑한 나머지 사이비에 빠지게 되는 그런 케이스를 말하는 건가 싶다.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케이스는 종종 있으니까. 역시 극과 극은 닿는 모양이다.

 

p.431 그러나 그가 제복을 벗는 순간, 그의 모든 영화는 사라진 것이다. 제복은 입은 그는 천둥이자 신이었지만, 외투를 입은 그는 갑자기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마치 하인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제복이란 얼마나 많은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놀라운 일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결국 하나인 것 같다.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 사회적 지위와 관념이 그 사람 자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

 

 9. 탈옥

 

p.435 수많은 동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나는 극도로 고독했고, 결국은 이 고독조차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정신적으로 고독했던 나는 나의 지난 전생애를 되돌아보았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것을 다시 취해서 나의 과거를 깊이 음미해 보고 용서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평가해 보았으며, 심지어 어떤 때는 이러한 고독을 나에게 보내 준 운명에 감사할 정도였다. 이러한 고독이 없었다면 자신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지난 생애에 대한 엄격한 비판도 없었을 것이다.


 너무 큰 위로가 되는 문장이라 발췌했다. 이 문장을 발췌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외롭다. 행복해지고 싶다.

 

p.450 꿀리꼬프는 어디에서나 항상 처신을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은 이제 그를 존경하지 않게 되었고, 어째서인지 친구처럼 허물없이 그를 대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탈옥이 실패로 끝난 다음 꿀리꼬프의 명성은 심하게 실추되었던 것이다. 성공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도 많은 것을 의미했다.......


 사회적인 성공과 실패가 사람들의 관념에 미치는 영향을 얘기한다. 이 작품의 핵심인 사람을 사람으로서 보는 것과 맞닿아 있는 구절이다.

 

 10. 출옥

 

p.452 자유로운 생호라로부터 얼마나 많이 뒤쳐져 있는가? 그들은 거기서 나 없이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가? 지금 그들을 동요시키는 것은 무엇이고, 그들은 어떠한 문제에 전념하고 있는가? (중략)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만 했고, 새로운 세대와 친숙해져야 했다.

p.
457 그렇다,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자유, 새로운 생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깊은 고독과 단절의 생활을 끝내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며 작품이 끝을 맺는다. 작품 도입에 나온 그의 미래를 생각하면 조금 씁쓸하지만 이 순간의 환희와 희망은 거짓이 아니었으리라. 새로운 삶을 시작한 주인공을 축하한다.

 

 러시아적인 선(善)을 찾아가는 도정: 악(惡)의 꽃들

 

p.461 도스또예프스끼는 있는 그대로 겪었던 그대로의 파블라적 사실들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식주의자들의 용어로 가공하여 여기에 창조적 상상력의 예술성을 부가하고 있다. (중략) 『죽음의 집의 기록』을 발견하여 세상에 소개하고 있는 <나>와 『죽음의 집의 기록』을 썼던 <나>라는 서술자의 설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단순한 르포가 아닌 소설로서 어떻게 예술성을 확보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도입에서 화자와 주인공을 분리함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p.472 (죽음의 집의 기록은) 라스꼴리니꼬프가 7년 동안의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그 작품의 속편으로도 읽힐 수 있다.

p.472 과연 인간의 범죄에 대한 형벌이 죄의식을 불러일으켜 뉘우침에 스스로 이르도록 할 수 있는 제도인가

p.472 <(상략) 감옥의 죄수에게 가장 힘든 강제 노동은 오히려 증오와 금지된 향락에 대한 욕망과 무서운 경솔함을 부추기는 역할을 할 뿐>

p.4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옥과 형벌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며, 도스또예프스끼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 주고자 의도했던 바는 무엇일까?

p.472 이에 대한 유추적인 대답을 우리는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감시와 처벌 Surveiller et punir, 감옥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의 감옥과 형벌 제도는 (중략) 오히려 새로운 범죄자를 만들어 내는 제도적 장치로 전락하고, 권력은 이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할 뿐이다. 푸코는 바로 이러한 근대적 권력의 은밀한 정체를 밝히기 위해 감옥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p.473 그러나 동시에 죄에 대한 종교적 참회와 고난stradanie이 수반되지 않는 형벌은 일순간의 육체적인 고통일 뿐, 죄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을 상실한 비인간적인 학대로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화자 고랸치꼬프는 인식하고 있으며, 그러한 까닭에 자연법이 실정법에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

 
 <죽음의 집의 기록>에 나타난 죄와 벌에 대한 고찰을 말하는 부분이다. 감옥과 형벌 제도가 실제로 죄수들의 마음을 감화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이어지는 까닭은, 이 제도가 근대적 국가 권력과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감시와 처벌을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확 와닿는 주석을 달기는 어렵지만 감옥과 형벌 제도가 죄수의 감화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는 논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양심과 고통의 문제

 

p.476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그는 죄수들 사이에서의 양심과 고통의 문제에 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가 일기>의 한 파트인 <환경>이라는 글에서 볼 수 있는 양심과 고통의 문제를 이 책의 주제와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 논문이다. <작가 일기>도 따로 번역된 책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1

 

p.479 죄수들에게서 양심이나 후회의 감정을 찾을 수 없음에 대해 고랸치꼬프가 여러 차례 한 단언들은 그의 발견(즉 도스또예프스끼의 발견)이 적어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으며 충격적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믿을 수 없는 발견은 도스또예프스끼로 하여금 러시아 민중의 의식을 형성하는 비극적인 사회, 역사적 조건들을 좀 더 심층적으로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유형 생활을 통해 죄수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이 자신의 범죄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며 도덕주의자였던 도스또예프스끼가 느꼈을 충격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죽음의 집의 기록>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도.

 

 2

 

p.480 죄수들에게 죄의식이나 후회의 감정이 없음은 스스로의 제어력을 넘어서는 운명에 자신이 지배받고 있다는 의식, 즉 체념과 연결된다.

p.481 모든 곳에 존재하며 월등히 우월한 자신의 적에 대한 죄수들의 증오는 특히 수동적이며 승화된, 그래서 불유쾌한 형식 - 고통이나 처벌을 일부러 받아들니는 - 을 띤다.

p.482 지하 생활자 역시 처벌과 모욕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인간다움을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극도로 불행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p.486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가 개인적 양심의 징후를 죄수에게서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 분명 충격을 받았던 때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완전한 정신을 인류가 채택함으로써만 사회적 관계들의 문제 일반이 해결될 수 있다고 깊이 확신하게 된 때였다.

 
 죄수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어찌할 도리없는 거대한 거대 권력 또는 처벌 기관과의 대립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강제적이고 확실한 처벌이기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여유도 없이 그 처벌(환경)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니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 한 가운데에는 이런 체념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 박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도스또예프스끼였지만...

 

 3

 

p.487 『죄와 벌』 전체의 메세지는, 인간에게서 양심은 그 본성상 초월적 요소라는 것이다.

 
 아무리 양심을 벗어던지고 싶어도 인간은 양심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죄와 벌의 이야기를 잠깐 가져오고 있다. 이 이야기는 5장에서 같이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발췌만 해둔다.

 

p.493 감옥은 러시아 민중과 국가의 비극 전체를 도스또예프스끼에게 확신시켰다. 이것은 민중의 소외와 추함의 비극이자 러시아라는 국가가 삶과 역사에 있어 두 줄기 - 지배 계급과 하층 계급 - 로 분리되는 데서 오는 비극이었다.

p.494 유형 이후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 삶의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깊은 골을 메우는 것(그러나 혁명적인 수단으로써가 아니라)을 계몽된 러시아의 중심 과업으로 보게 된다. 이때 문학은 <오물 속의 다이아몬드>를 찾아냄으로써, 즉 민중들의 이상과 그들의 <단순한 마음, 순수함, 온순함, 넓은 마음, 친절함>을 열어 보이면서 그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

 
 감옥의 존재로 인해 상류층과 하류층의 구분이 더욱 확실해졌고, 이 강제성이 하층민들에게 체념을 불러일으키면서 범죄에 대한 양심을 마비시켰다는 설명이다. 이 갭을 메우기 위해, 체념한 민중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순수한 선의들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나이브한 생각인 것 같기도 하고,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4

 

p.498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의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태도들은 감옥에 있을 때 엄습했던 증오와 슬픔, 절망을 넘어서려는 도스또예프스끼 스스로의 투쟁이라는 배경 아래서 생겨난 것이다.

p.498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의 이후 작품 속에서 러시아 민중의 거대한 고통, 표현할 수 없는 증오와 분노, 절망으로 가득 찬 고통을 포착하여 그것을 미덕으로 변형시킨다. 그는 분노를 사랑, 겸양, 자기 희생의 도덕으로 승화, 또는 전환시킨다. (중략) 그럼으로써 도스또예프스끼가 도덕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려 했던, 러시아 인에게 존재하는 폭력적인 반항과 수동적인 복종의 모순성을 보여 주는 일종의 모델이다.

 
 같은 논지의 이야기이다. 본인이 유형 생활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감옥이라는 장소가 주는 폐색감과 그로 인한 체념, 그리고 촉발하는 분노를 표면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고 당시 러시아 사회의 문제로 보려고 했다는 것. 이 시점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죄수들을 '죄수'로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죄수라는 라벨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로는 이런 생각을 하기 어려우니까. 죄수 너머의 인간을 보고,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얘기하려고 했다는 생각이 든다.

 

 5

 

p.498 유형 후의 작품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극화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사상들 중 하나는, 인간은 자유로우며 환경이나 운명이 책임 회피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략) 고랸치꼬프가 주장하듯 환경은 우리 안의 많은 것을 잠식하지만 모든 것을 삼켜 버리지는 않는다.

p.499 (그러나) 농민 죄수들은 실제로 환경에 잠식된 사람들로 등장한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 (중략) - 저항할 수 없는 무력감과 절망감에 억눌려 있다.

p.499 그러나 기독교 인으로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운명에 속박된 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정식적인 구원을 향한 그의 첫째 걸음은 신이 부여한 자유에 대한 인식임에 틀림없다. (중략)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 삶에서 자신이 발견한 절망과 추악함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 방안을 기독교의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교리에서 찾는다.

p.501 그들은 <환경>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로 환경이 자신들에게, 자신들의 끝없는 회개가 자기 완성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에너지와 노동, 노력만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 노동과 노력에 의해서만 스스로의 존엄성에 대한 감각과 통일성을 성취할 수 있다. <스스로를 더 좋게 만듦으로써 환경을 더 좋게 할 수 있다.>

 
 어렵게 쓰여있지만,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 온전히 나쁜 환경의 탓만은 아니라는 논지다. 인간은 계몽될 수 있고 숙련될 수 있으며 그렇게 자신의 환경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p.504 「환경」은 유형 시기 러시아 삶 속에서 발견했던 냉혹한 진실에 저항하고, 러시아 민중을 발전시키기 위해 새롭고 건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중략) <9천만의 러시아 인이 모두 언젠가는 교육받고 인간화되고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나는 생각하거나 살고 싶지도 않가>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환경의 진리는 일시적인 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진리, 그 자유와 책임의 사상에 길을 내주어야만 한다.

p.504 도스또예프스끼가 감옥에서 주목하고 열중했던 것은, 죄수들이 환경의 진리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던 의지였다.

 
 도스또예프스끼가 환경 보다도 개인의 의지에 더 많은 희망을 건 것은, 실제로 감옥 안의 죄수들 - 정말 양심이 가책이 없고 사악한 부류 - 조차도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본능적인 순간마다 표현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강압적인 환경에서조차 인간은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이는 인간이 환경에 100% 좌지우지되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며, 때문에 우리는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