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매핑 도스토옙스키
매핑 도스토옙스키
대문호의 공간을 다시 여행하다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시작
본격적으로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읽기 전에 가이드로 선택한 것이 바로 석영중 교수님의 '매핑 도스토옙스키'다. 도스토옙스키에 관련된 서적은 엄청 많지만, 개인적으로 그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 자체에 초점을 맞춘 책을 읽고 싶었다.
일전에 죄와 벌과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었을 때도 도스토옙스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는데, 내용의 문제라기보다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글을 쓰고 싶어한 작가인지 전혀 몰라서 생긴 문제였다. 다시 도스토옙스키를 읽게 되면 반드시 평전이나 자서전을 읽고 시작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때 바로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도스토옙스키 권위자인 석영중 교수님이 직접 러시아에서 그의 발자취를 좆은 기록을 담은 책이다. 레퍼런스가 문헌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도스토옙스키의 공간과 시간을 함께 좇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어서 골랐고 장대한 대서사시가 될 도스토옙스키 전집 읽기에 앞서 좋은 가이드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 리뷰는 모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책의 리뷰는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모두 읽은 후에 작성되었습니다.
감상
연구자는 연구 대상을 닮는다고 하던데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확보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을 받으셨는지 몰라도 이 책은 유익한 데다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만약 도스토옙스키 전집 읽기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후로 이 책을 한 번씩 읽기를 권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심오한 세계관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지루하기는커녕 무척 재미있다.
이하의 글에서는 이 작품의 도법(=공간을 따라가는)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관과 어떻게 궤를 이루는지 설명하고, 그 과정을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예술을 추구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 그가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리하고자 한다.
현실을 살면서 이상을 그리다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를 시간과 공간의 좌표 선상 위에 그려낸다. 기존의 저술이 도스토옙스키의 문학관이나 개인적인 철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작품은 그 시대의 그 환경 속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한다.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도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쌓여가는 과정을 함께 포개어 그려낸 것이 경이롭다.
도스토옙스키는 언제나 자신이 머문 장소에 깃든 혼과 교류했다. 시베리아의 차가운 공기는 그를 고독하면서도 자유롭게 만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번잡한 혼은 그를 대중 속으로 깊게 침전시켰다. 현실은 비참하고 가혹했음에도 그는 항상 지상에 발을 디딘 채 하늘을 보려고 했다. 이 모순된 삶의 장력이야말로 그가 펜을 들게 만든 힘이었다.
퇴고할 시간 없이 끊임없이 글을 짜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작품의 완성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분투는 러시아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소설가를 넘어 '예언자'라고 불렸다. 현실의 비참함에 매몰되지도 이상의 달콤함에 현혹되지도 않은 날카로운 객관성의 승리였다.
좋은 작가는 삶의 모순에 주목하고 좋은 작품은 그 경계 선상에서 태어난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대의 분열상을 그려내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다. 그는 자극적인 이야기로 우리를 잠시 현실에서 도피시켜주기도 하지만, 마지막에는 항상 작은 희망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며 현실로 돌아갈 힘을 준다. 도피성 문학과 교조적 문학 사이에서 놀라운 줄다리기를 하며 독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이 문학적 위대함을 쟁취하기 위해 도스토옙스키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삶의 고통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일련의 과정을 마치 여행기처럼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찬란한 욕망 대신 누추한 자유를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는 어떻게 이 아픈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걸까? 그는 이것을 선택이 아닌 의무의 문제로 보았다. 현실이 아프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게 된다. 가령,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다시 잠들어 버리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고자 했던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조각하려면 이런 불편함을 감당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자유와 불편함은 같은 것이었다. 불편함을 감내하지 않고 자유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에겐 소설을 쓰는 것 자체가 '자유'의 표현이었다. 소설을 쓰는 불편함을 감수하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생각한 진정한 자유였다.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으려 하는 삶은 자유가 아닌 파멸이었다.
결국, 도스토옙스키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현실로 뛰어들기를 선택한 것이다. 현실은 후줄근하고 찌질하고 더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들여다볼 용기를 내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행여라도 후줄근하고 찌질하고 더러워질까 봐 두려워 끊임없이 사회의 눈치를 보게 된다. 돈이 위대한 것은 이 모든 디테일을 간단하게 제거하기 때문이다. 돈은 사람을 말끔하고, 멋지고, 깨끗하게 만든다.
하지만 자유는 지저분한 것이다. 자유는 우리가 털어버리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디테일 속에 있다. 수치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오염을 기피하지 않을 때, 우린 비로소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진정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그 디테일을 들여다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삶 속으로 뛰어들 용기를 낸 이유였다.
예술의 쓸모
지저분하고 추악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뛰어들고자 했던 결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예술 작품으로서 독보적인 가치를 얻게 되었다. 그전에 예술의 가치가 무엇인지 얘기해보자. 글, 그림, 음악을 위시한 예술은 무슨 쓸모가 있는 걸까?
사실 예술은 인간의 생명 활동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글을 읽는다고 배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그림을 그린다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문명이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쓸모가 없다고 하기엔 인류는 너무나 예술을 사랑한다. 예술이 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기에 이러는 걸까?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숨만 쉬고 밥만 먹으며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본능을 표현할 기재가 필요하고 예술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감정의 표현이야말로 바로 '자유'의 핵심이다. 물질과 육체의 자유는 감정적인 자유를 느끼기 위한 부차적인 방법일 뿐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정신적인 자유가 반드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자유는 또 다른 영역에 걸쳐 있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특성상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마음껏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란 내가 저 사람을 때리고 싶다고 해서 때리고 밥을 먹다가 갑자기 울고 싶다고 해서 큰 소리로 엉엉 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예술은 이런 감정을 사회가 아닌 글과 그림과 음악이라는 도화지를 통해 배출하게끔 만든다. 예술을 통해 우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우리를 자유케하는 셈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한 것은 우리의 이런 억압된 감정을 현실적인 배경 속에서 솔직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인물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하며, 남에게는 얘기할 수 없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적인 제약에 의해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내밀한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닫혀 있던 시야가 널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욕망의 한풀이에만 충실해서는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예술은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도 다시 삶으로 뛰어들 용기를 주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단순한 오락 소설이었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당시 러시아 사람들의 실제 삶의 문제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그 속에서 희망을 한 조각 캐어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대문호조차 신문을 달고 살았다던 이야기에 마음이 겸허해진다.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생존, 즉 자유를 위해 존재한다. 자유는 감정의 표현에서 비롯되며 예술은 사회적 제약에 의해 억눌린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기재이다. 여기에 더해 위대한 예술은 온갖 거미줄로 뒤엉킨 사회 속을 살아갈 용기를 준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이런 예술의 본질을 구현하려고 했던 사람인 것이다.
삶 속으로 뛰어들 용기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도스토옙스키처럼 용기를 내서 삶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또 다른 원동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는 도스토옙스키가 평생에 걸쳐서 말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주제이기도 하다. 사랑만이 인간을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유와 욕망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바라본다. 자유는 의지의 산물이지만 욕망은 본능의 산물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욕망을 따라가는 이들은 결국 파멸한다. 욕망의 본질은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의 말처럼 우리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자원이 한정된 세계 속에서 타인이 무언가를 차지하는 행위는 나의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욕망의 궁극적 체현은 타인의 파괴를 담보로 한다. <악령>의 스따브로긴이 그러했듯 모든 욕망이 체현된 세계 =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마지막엔 자신조차 필요 없게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끔찍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항상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욕망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욕망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 정도다. 타인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끄는 방향으로 욕망의 좌표를 틀 때, 그것은 욕망보다 '자유'에 가까운 것으로 거듭난다. 저 사람이 미우니 죽여야겠다는 감정은 욕망이지만, 저 사람이 미우니 나의 시간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결단은 자유이다. 이런 결단을 내리려면 타인을 사랑/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본질을 '영원한 미성년'이라고 생각했다. 미성숙한 아이들이 실수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듯, 인간은 당연히 실수하는 존재이고, 당연히 사고를 치는 존재이며, 당연히 가혹한 존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런 관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보았을 때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지?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기보다 당연히 저럴 수 있다고 생각한 뒤 그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 그의 작품인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망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욕망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대로 비틀면 그것은 자유가 된다.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타인을 미워하는 한 우린 영원한 피해자가 될 뿐이다. 법정에 갇힌 상태로는 진정한 삶 속으로 뛰어들 용기를 낼 수가 없다. 우리의 삶은 법정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드미트리가 법정을 나오면서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뭐가 가라앉아 있는지도 모르는 늪으로 뛰어들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늪 속에 뭐가 잠겨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몸을 더럽힐 용기를 내야 한다. 그 용기를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사랑'이다. 세상과 사람이 무서워 눈을 감고만 있으면 내 발로 직접 앞으로 걸어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을 달래고 세상을 이해해보기로 마음먹는 것,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고 나면 그럴 용기가 생긴다. 이것이 그의 작품이 위대한 이유이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할 용기를 준다.
도스토옙스키는 누구보다도 현실의 문제에 천착한 작가였다. 그는 시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신문을 늘 손에 들고 다녔고 당대의 중요한 사건들을 소재로 작품을 써왔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그곳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작가적 자유를 위해 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결과, 그는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러시아와 그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나 안나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던 남편을 부둥켜안고 울던 장면이다. 안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말년의 걸작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결국 도스토옙스키를 완성한 것은 안나의 사랑이었다. 욕망의 태아로 점지받아 태어난 인간이 불편함을 감수하며 자유를 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을 해낸 작가였다. 그는 자신의 밟은 모든 땅과 접촉하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써냈다.
도스토옙스키의 전집을 다 읽은 지금에 와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그를 만든 것은 사랑이었고 그의 작품이 전하고자 했던 것 또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도스토옙스키를 만나 행복한 2020년이었다. 이 포스팅을 읽는 분들께도 이 사랑이 전해지길 바란다.
문장
<읽는 법을 배우도록 하세요. 무거운 책을 읽으세요. 나머지는 삶이 다 알아서 해줄 것입니다.>
p.72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고 그것이 내 삶에 영향을 주는 것들을 확인한 지난 1년이었다. 이 문장은 그런 나에게 도스토옙스키가 건네는 조언처럼 들렸다. 평생 안고 갈 것이다.
본문
머리말 : 대문호의 역마살
p.6 나는 이 책에서 저자의 물리적인 이동과 정신적인 움직임을 동시에 살펴보고자 했다.
p.8 나를 사로잡게 된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어디에 가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가 나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였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살았던 작가가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사실 긴가민가하면서 고른 책이었는데 머리말을 보고 제대로 골랐다는 확신이 들어서 기뻤다. 모든 고전 읽기가 그렇지만 현대에 살고 있는 내가 왜 이걸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선행되어야 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기 전에 나름대로 그 답을 찾고 싶었는데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다. 그런 확신이 드는 머리말이었다.
1부 야망의 여정,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장 모스크바 : 예언자의 탄생
화합에 굶주린 러시아를 울리다
p.31 도스토옙스키는 푸시킨에 관한 말이 아닌 분열과 불안 속에 있던 러시아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했다. 화합과 화해와 상생과 공존을 강조했고 오로지 러시아인만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역설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푸시킨 축제를 시작으로 러시아의 예언가 같은 존재로 떠오른다. 대중 작가였던 도스토옙스키였기에 현재 러시아 사회의 시민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긁어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2장 모스크바 : 고통을 보다
연민, 실존의 법칙
p.34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에게 고통은 어떤 특정 이념이나 이론의 옳고 그름을 재는 척도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다.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며 인간에 관한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다. (중략)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며 인간에 관한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다. (중략)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두드러진 테마다.
p.37 따뜻하고 안전한 방 안에서 날마다 빈곤과 질병과 죽음을 내다보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략) 타인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척, 타인의 고통을 못 본 척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p.38 그가 고통에 대한 대안으로 찾은 것은 그 어떤 논리도 이념도 원칙도 아닌 연민이었다는 점만은 미리 말해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중략) <연민은 가장 중요한, 어쩌면 유일한 인간 실존의 법칙이다>
p.38 도스토옙스키는 물질의 분배가 아닌 고통의 분담에서 공존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p.40 인간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꼭 붙잡아 주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 붙잡을 데라고는 결국 인간밖에 없을 테니.
도스토옙스키에게 고통은 발작적인 감정이 아닌 인간의 본질 그 자체였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고통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쌓아올린 후에 해야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염세적이고 우울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오류는 보통 여기서 발생한다.
3장 모스크바 : 돈을 읽다
극빈자 병원과 거액 기부자, 돈의 두 얼굴
p.45 도스토옙스키가 돈과 관련해 일관되게 우려했던 것은 병적인 집착에서 촉발되는 맹목적인 <축적>이었다.
p.46 높이 올라가는 부와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가는 인간. (중략) 축적과 단절이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언제가 함께 가는 이유다.
p.47 흐르지 않는 시간과 막힌 공간은 정체된 인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돈, 죽음 같은 삶에 대한 환유다.
낭비벽이 있는 사람답게 그는 맹목적으로 돈을 축적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실제 작품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다.
4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도스토옙스키의 도시
신기루가 빚어낸 견고한 문학
p.55 환상적인 외관 속에 담긴 진짜 러시아는 무엇인가? 러시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역사의 공백을 채워 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러시아를 러시아로 만들어 주는가? 러시아는 이 문제의 답을 문학에서 찾았다.
p.46 아이러니하게도 표트르 대제가 도구로만 취급했던 문학은 이제 그가 창조한 이 기이하게 멋지고 환상적인 도시의 본질이 되었다. 그리고 물론 그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도스토옙스키였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진보를 향한 극단의 욕망이 부른 것은 텅 빈 현재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문학이었다. 즉, 러시아에서 문학의 역할은 가상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5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글 쓰는 인간
가난한 하급 관리의 존엄한 이미지
p.57 <형,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연구하는 데 꽤 진척을 보이고 있어. 인간은 신비 그 자체야. 우리는 그 신비를 풀어야 해. 그러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결코 시간을 허비했다고 할 수 없을 거야.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나는 이 수수께끼에 골몰하고 있는 거야.>
p.59 인간이고 싶다면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때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춘다.
p.62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한 <루저>가 어떻게 글쓰기를 통해 품격을 가진 인간으로 되살아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p.63 일단 글의 소재로 넘어가면 궁핍도 고독도 그를 비천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는 궁핍한 인간이 아니라 궁핍에 관해 쓴 <저자>가 된다. 그는 쓰고 또 쓴다. <매시간 매분을 아껴 모든 걸, 모든 걸 쓰고 싶습니다!>
p.63 글을 쓰고, 누군가가 읽어 주고, 그 누군가가 대답해 줄 때, 그는 살아 있는 인간이 된다.
p.64 도스토옙스키는 동정의 대상일 뿐인 하급 관리로부터 <글 쓰는 인간>을 창조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인간성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자본과 이성에 의해 쉽게 지워지는 인간성을 보존하려 했고, 그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했다.
6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책 읽는 인간
책이 팔려야 입에 풀칠이라도
p.69 <독자는 게걸스럽게 내 책을 읽을 거야. 1년 내에 2천 부는 팔릴 거야. 권당 1루블 25코페이카라고 치면 1년에 2천 루블이 생기는 거야!>
p.70 <당장 입에 풀칠할 일을 걱정해야 하는 판에 명성이 무슨 소용이겠어!>
p.70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무조건적인 독서 예찬은 하지 않았다. 독서는 소통과 고립 둘 다를 의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책을 통해 만나고 서로를 이해한다. (반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독서는 인물들을 무기력하고 위험한 이른바 <몽상가>로 변형시킨다.
p.72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 독서광이었다. 그에게 책은 창조의 원천이었다. <형, 나는 엄청나게 읽어. (......) 거기서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끌어내.>
p.72 <읽는 법을 배우도록 하겠어. 무거운 책을 읽으세요. 나머지는 삶이 다 알아서 해줄 것입니다.>
대중 작가로서 글밥을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모습과, 독서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취했던 모습을 함께 다루고 있다. 작가로서 자극되는 부분이 많은 파트라서 열심히 발췌했다. 열심히 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자 노력했던 이 과정을 통해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난 것이리라.
7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불안에서 분열로
나를 좀 인정해달라
p.76 『분신』의 핵심은 불안이다. 주인공 골럇킨은 불안의 하중을 견디다 못해 분열되고 붕괴되는 개인의 비극을 보여 준다.
관등 사회 속에서 열등감을 이기지 못하고 분열했던 골럇킨의 모습을 통해 러시아 사회를 표현하고 싶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8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하얀 밤>의 추억
사랑이여, 그 젊은 날의 아스라함이여
p.88 그에게 몽상은 부정과 긍정의 두 가지 면이 있다. 현실에서 누적된 불안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몽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중략) 그러나 몽상은 다른 한편으로 현실의 일부이자 인간 내면에 있는 보편적 성향이다.
p.89 <아 나스텐카,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 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오, 신이여! 한순간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잠시 현실로부터 벗어나 몽상에 잠기지만 결국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에 생겨나는 애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백야>의 저 구절은 몇 번을 봐도 인상적인 것 같다.
2부 시베리아, 다시 태어남
9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두 번째 생
삶은 선물이고 행복이다
p.99 체포, 독방 수감, 신문, 재판, 가짜 처형, 유형으로 숨 가쁘게 이어진 사건들은 이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다른 작가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강렬한 인물과 장면과 소재로 재생되었다.
p.100 <사랑하는 형, 지금 이 순간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사랑하고 포옹할 수 있을 것 같아. (중략) 삶은 선물이고 행복이야, 형! (중략)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이것이 내 희망이자 위안의 전부야!>
p.101 그의 소설이 한결같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사형 선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던 것과 유형 생활의 경험으로 그는 삶을 긍정하고 약자를 포용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우울하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그 무엇보다도 진한 긍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그의 작품이다.
10장 옴스크 : 사람들 속으로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p.109 <(전략)심지어 어떤 때는 이러한 고독을 나에게 보내 준 운명에 감사했다. 이 고독이 없었더라면 자신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지난 삶에 대한 엄격한 비판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얼마나 커다란 희망으로 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던지! 이전에 했던 어떤 실수나 방종도 앞날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심하고 다짐했다.>
p.110 내면 여행을 거치며 그는 서서히 소생했다. (중략) 악의 심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오물 속에서도 보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어떤 낙인도 족쇄도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옥 생활을 통해 오히려 어떤 악의로도 가릴 수 없는 인간성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은 이후 그의 작품의 근간이 되었다. 이상주의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인간성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11장 옴스크 : 자유!
본능의 극복이 자유다
p.112 <인간은 불사신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p.113 그가 유형지에서 발견하고 탐구했고 이후 소설에서 끝없이 발전시키게 될 인간 본성의 출발점은 <자유>다. (중략)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로 들어오면서 그것은 한 개인으로 하역ㅁ 현실 속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일종의 <인격 수양> 비슷한 어떤 것이 된다.
p.114 도스토옙스키는 자유를 본능과 가치로 나누어 보았다. 자유는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본능과 정반대되는 최고의 가치를 향한 지향이다.
p.115 본능이자 가치로서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중성으로 이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전에서 악이란 본능으로서의 자유 추구가 극대화된 상태를, 선이란 가치로서의 자유 추구가 극대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p.117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최고의 가치로서의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지향을 둔 삶을 강조한다. 자유를 지향하는 삶은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삶,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삶이다. 그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것은 자유를 획득한 인간(어차피 그것은 불가능하다)이 아니라 자유라는 궁극의 종착점을 향해 온갖 고난과 좌절을 무릅쓰고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자유'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본능으로서의 자유는 욕망에 가깝고, 가치로서의 자유는 삶의 방식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12장 다로보예 : 아, 불쌍한 아버지!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어린 시절, 다로보예 마을에서 온갖 폭력의 현장을 접하며 삶에 대한 자신만의 통찰을 키워간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13장 다로보예 : 나는 러시아인이다
민중의 내면을 보다
p.136 <그냥 부질없이 보낸 시간은 아니었어. 유형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민중의 유형과 성격을 알게 되었는지 몰라. 얼마나 놀라운 민족인가. 러시아 민중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다로보예에서의 유년기, 그리고 유형지에서의 청년기를 경험하며 그는 이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겨내고 살아가는 러시아의 민중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이후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코드 ㅡ 희망이 된다.
14장 세메이 : 한숨 돌리기
시베리아에서 만난 젊은 귀인
p.137 <나는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나 마찬가지였다. 사경을 헤매던 환자가 살아났을 때 생명의 환희를 더 강하게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희망으로 넘쳤다. 나는 너무나 살고 싶었다.>
p.140 <행복이란 외적인 조건에 있는 게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맑은 시선 속에, 부끄럼 없는 가슴속에 있는 것이다.>
유형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품게 되었던 시절의 도스토옙스키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가 그나마 성실하고 건전하게 지냈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15장 세메이 : 별이 빛나는 밤
신과 화해하고 신의 의지에 복종하다
시베리아 유형 생활 이후 그에게 나타났던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신앙관에 있다. 기독교적 관점을 배제하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고난을 이겨내는 힘을 러시아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예수만큼 그의 삶을 긍정해주는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16장 노보즈쿠네츠크 : 미친 사랑
가난한 술꾼의 아내와 늙수그레한 로미오
마리야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무리하게 결혼을 강행했으나 그 후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던 도스토옙스키다. 자신의 삶에 대한 안목도 없는데, 제대로 된 연애와 결혼을 할 수 있을 리 없었겠지.
17장 노보즈쿠네츠크 : 비참한 결혼
이 모든 상실에도 불구하고
p.167 <이 모든 상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을 사랑한다, 열렬히 사랑한다. 삶을 위한 삶을 살아한다. 나는 지금도 내 삶을 다시 시작한 준비가 되어 있다. 내 나이 벌써 쉰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내 인생을 마무리 짓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시 시작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점이 내 성격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의 간질 발작을 보고 정이 떨어진 아내와, 이윽고 시작된 불행한 결혼 생활 등등. 이 당시의 도스토옙스키의 삶은 불행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을 칭송한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고 싶었기에 이런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3부 러시아와 유럽, 나의 <정신>과 남의 <이론>의 교차로에서
18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저널리즘의 시대
더 빨리! 많이! 재미있게!
p.177 그의 천재는 통속성과 융합하여 지극히 멜로드라마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심오한, 극도로 독창적인 소설을 만들어 냈다. 그의 목적은 인간을 그리는 것이었지 고결한 인간을 그리는 게 아니었다. 인간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통속적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그 통속적인 부분을 고도의 문학성으로 공략한 것이다.
p.177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매 순간 <소식>을 만들어 내는 신문의 역동성은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과 화학적으로 결합했다.
p.177 <예술은 항상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이다.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존재해 본 적도 없고 존재할 수조차 없다.>
저널리즘이 유행하면서 연재 소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자, 도스토옙스키는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매일 빠짐없이 신문을 읽고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소설을 쓰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가 단순한 통속 작가로 남지 않은 것은, 문학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속적인 이야기를 쓰는 와중에도 그는 시대에 대한 자신의 통찰과 예술성을 놓치 않으려 했다. 이것이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19장 유럽 : 최악의 여행기
인간의 물질화를 거부하다
p.187 바흐친의 지적처럼 그는 놀라운 혜안으로 인간을 물질화하는 경향이 인간 사고의 토대까지 파고들어 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영혼이란 백지 혹은 한 덩어리의 납과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 지금이라도 당장 인간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서구 문명의 결실을 응용하고 두세 권의 책만 보면 된다>는 생각에 그는 경악했다. 그의 창작의 핵심이 <모든 인간적 가치의 물질화와 벌이는 투쟁>인 이유다.
도스토옙스키는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절어 있는 유럽의 모습을 보고, 그 모든 물질화에 맞서는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작품을 쓰게 되었다. 물질의 강력한 힘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인간이 물질에 맞서 투쟁한 장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20장 런던 : 디스토피아의 비전
기술이 권력을 넘어 종교가 될 때
p.195 <시간이 갈수록 데이터베이스는 커질 것이고 통계는 더 정확해질 것이고 알고리즘은 더 개선될 것이다. 그 시스템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기마 하면 그날로 자유주의는 붕괴될 것이다.>
현대의 빅데이터 시대를 예견이라도 한 듯, 도스토옙스키는 놀라운 혜안으로 현대의 기술 문명을 바라본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는 상황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1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반역
냄새나는 <지하실>은 당신에게도 있다
p.200 자유 의지, 변덕, 멋대로 하고 싶은 욕구야말로 <지하실>에 존재하는 최고의 이익이다. 자유 의지는 <이성, 명예, 평안, 행복에 반대되는, 그러면서도 그것을 얻기 위해 인간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이익>이다.
p.201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의미는 주인공의 반항 그 자체에 있다. 그는 반역을 위해 반역한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반역한다. 그의 반역은 비장하고 처절하다.
자유는 행복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예, 평안, 즐거움과는 정반대선상에 있다는 저자의 의견을 밝힌 파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편한 자유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도스토옙스키는 후반부 작품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22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더 미친 사랑
열여덟 살 연하의 <팜파탈>
<죽음의 집의 기록> 발간 후, 만나서 미친 듯이 사랑했던 수슬로바라는 여인에 대해 말한다. 신여성의 성향을 가진 그녀의 담대하고 패기 넘치는 태도를 사랑했지만 결국 그 사랑은 최악의 말로를 걷고 만다.
23장 비스바덴 : 중독
그때 돈을 따지 말았어야 했다
p.217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고통과 질병을 문학으로 바꾸는 데 천재적이었던 작가가 이번에도 도박 중독이라는 질병을 문학으로 변형시켰다는 사실이다. 소설의 제목은 『도박꾼』이다.
도박에 본격적으로 빠져 들면서 엉망진창이 된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그 와중에도 <도박꾼>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저력에 대해 얘기한다. 개인적으로도 <도박꾼>은 매우 좋아하는 작품이다.
24장 비스바덴 : 감각의 지옥
도박장에서 인간 본성을 읽다
p.224 알렉세이의 본심은 그가 카지노 측이 지불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돈을 많이 딴 그 순간 드러난다. <어제 내가 돈다발을 긁어모으던 그 순간부터 어쩐 일인지 나의 사랑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에게 소중한 것은 폴리나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내게 감탄하고, 그 일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도박꾼>의 주인공인 알렉세이가 도박을 통해 어떤 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간략히 설명한다. 한번 도박으로 번 돈은 영원히 도박에 쏟아붓게 되어있다. 알렉세이는 돈이 주는 권력을 탐닉하며 서서히 말로를 향해 걸어간다.
25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인생 역전
26일 만에 완성한 소설과 결혼
p.235 안나 부인의 태도는 놀라웠다. <난생 처음 간질 발작을 보았음에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이 어린 신부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대신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 늙은 남편을 끌어안았다.
안나와 관련된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은 에피소드이다. 안나가 얼마나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했는지는 이 장면만 보면 알 수 있다. 말이 필요 없다.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의 인생 최고의 선물, 아니, 그의 삶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6장 모스크바 : 범죄 소설의 태동
『죄와 벌』로 살인 사건을 예언하다
신문에서 범죄와 관련된 뉴스를 활발하게 다루기 시작하면서, 도스토옙스키도 범죄를 다룬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이 그 유명한 <죄와 벌>이다. 이 작품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꽃피운다.
27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죄와 벌, 그리고 정의
라스콜니코프는 정의로웠나?
p.235 『죄와 벌』을 시작으로 쏟아져 나온 일련의 대작들에서 그가 제기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 중의 하나는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p.249 처벌과 분배는 정의 실현의 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분노는 정의를 촉발시킬 수 있지만 정의 자체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훗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의를 완성시키는 것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라는 사상을 발전시킨ㄴ다.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은 바로 그것, 용서와 사랑을 결여하기 때문에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죄와 벌>의 메시지, 그러니까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삶을 침해하는 것이 옳은가? 약육강식의 원리를 현실 사회에서 적용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양심'의 무시무시함을 먼저 이야기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타인의 삶을 침해하면 그에 따르는 양심의 대가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자유를 위한 살인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 된다.
28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첫 문장
청년은 <작은 방>을 <나왔다>
p.251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 살고 있는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p.251 첫 문장은 우선 픽션과 리얼리티의 경계를 허문다. 당대 러시아 독자들에게 도입부는 현실 그 자체다.
<죄와 벌>의 첫 문장을 분석한다. 이 문장이 얼마나 많은 서사를 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당대 러시아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설명한다.
29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형사와 매춘부
형사 콜롬보의 모델이 바로 그였다
<죄와 벌>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예심판사 포르피리의 심문 장면을 분석한다. 형사 콜롬보의 오리지널이 포르피리 판사라는 분석 또한 흥미롭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실제 추리 소설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므로.
30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어떻게 살 것인가
성장의 시간, 희망의 시간
p.266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삶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 긴밀하게 엮어진다.
p.267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은 가장 깊은 심리적 차원에서 <시간 범죄>다. <삶은 내게 단 한 번만 주어질 뿐, 그 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자각이 살인을 부추긴다.
p.268 라스콜니코프의 <단번에>는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 방식이 아니라 시간에 대응하는 특정 방식이다. (중략) 라스콜니코프의 <단번에>와 짝을 이루는 시간 체험은 전당포 노파가 보여 주는 점진적인 <축적>이다.
p.269 라주미힌의 모든 긍정적인 자질은 시간을 의식하는 독특한 방식과 연관된다. 그에게는 시계 자판 위를 굴러가는 시간의 속도와 양을 초우러하는 자신만의 시간이 있다. (중략) 그에게 <시간은 언제나 충분하다>.
p.371 라주미힌이 강조하는 <살아 있는 과정>의 삶이야말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문호의 잠정적인 답이 아닌가 생각된다.
돈이 아닌 시간의 테마에서 <죄와 벌>을 분석한 글은 처음이라 몹시 흥미로웠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시간이니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라스콜니코프의 조급함과 대조해 라주미힌의 여유로움을 이끌어 낸 고찰도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삶이란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4부 문학이 된 유럽
31장 유럽 : 삼십육계
절대적인 사랑의 절대적인 확신
p.282 안나 부인은 해외에서 보낸 세월을 오로지 감사하는 마음으로만 회상했다. <정말로 깊고 눈부신 기쁨의 감정>을 경험했다며 늘 감격스러워했다.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다 잊게 만들어준 것은 단 한 가지, 남편과의 <완전한 사랑>이었다.
해외에서의 삶이 절대로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텐데도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사랑으로 그 모든 수모를 견뎌낸다. 그리고 누구보다 단단하고 강직한 여성을 다시 태어난다. 이런 건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안나를 보면 그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안나가 쓴 일기도 빠른 시일 내에 속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32장 바덴바덴 : 인격 살인
도스토옙스키와 투르게네프
투르게네프에게 돈을 빌리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모욕감을 견디지 못해, 역으로 투르게네프를 모욕하면서 서로 사이가 틀어져버렸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사건은 백번 다시 봐도 도스토옙스키가 찌질했던 것 같지만, 그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든다. 물론 내가 투르게네프라면 기억하기도 싫은 일이겠지만.
33장 바젤 : 실패한 그리스도
절망의 심연에서 담금질된 기쁨
<백치>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백치>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구상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림인 <무덤 속의 그리스도>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본 순간 도스토옙스키는 완전히 압도되었다고 하는데 이해가 된다. 페이지에 두쪽으로 갈려 실린 그림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림이다.
34장 제네바 : 남자가 통곡할 때
소설을 써야 했기에 그 모든 걸 견뎌 냈다
p.309 마이코프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이 모든 것을 다 견뎌 내면서 어떻게 소설을 쓸 수 있는지>라고 물었다. 어쩌면 소설을 써야 했기에 이 모든 것을 다 견뎌 냈는지도 모른다. (중략) 『백치』는 세상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는 무기력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마무리 된다. 딸을 앗아 간 신을 향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문학적인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치>를 쓰던 당시에 사랑하는 딸을 잃고 극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소설을 쓰며 견뎌낸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보여준다. 모든 아픔과 고통, 상실의 순간에도 그는 소설을 놓지 않았다. <백치>의 비극적 결말조차 그의 삶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숙연해지는 부분이 있다.
35장 브베 : 보이지 않는 돈
나스타샤, 10만 루블 줄 테니 같이 떠나자
<백치> 최고의 명장면인 나스탸사가 사람들 앞에서 10만 루블을 불태우던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장면은 돈이 절대로 불타지 않는 존재임을 시사하며, 그 사실에 대한 저자의 절망감을 표현한다.
36장 피렌체 : 여인의 얼굴
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
p.319 도스토옙스키에게 인간의 선악은 타인의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된다.
p.325 우리 보통 사람은 그 누구도 미시킨처럼 볼 수 없다. 인간이 그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지상에는 벌써 낙원이 도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치』는 여전히 나에게 다른 가능성을 속삭인다. 보는 법을 조금이라도 배울 수는 있지 않을까. 시각도 훈련이 가능하지 않을까. 설령 평생이 걸릴지라도.
미쉬낀은 사람의 내면 속 어린아이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추악함 뒤에 감춰진 인간의 나약함을 바라보고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야말로 예수와 같은 인물이었지만 결국 그는 실패했다. 그도 실패했는데 우리라고 해낼 수 있을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쉬낀은 타인의 내면 속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 관점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백치>는 문학적 의의를 다한다.
37장 피렌체 : 유한한 삶, 행복한 삶
순간을 1세기처럼 살 수 있다면
p.332 사형수의 생각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를 보여 준다. 매 순간을 1세기로 체험할 수 있다면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죽음의 확실성도 의미가 없다. 불멸도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득도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지상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부 아닌다.
p.334 도스토옙스키는 1분 1초를 아껴 쓰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인간의 유한성에 대응하려 했던 것 같다. (중략) 문제는 삶에, 오로지 삶 하나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지 그 삶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p.334 삶을 중단 없이 추구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때에 죽음은 더 이상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사형수 생활을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깨달은 삶의 진리는, 바로 이 순간의 삶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보류된 삶이야말로 진정한 낭비이며 빈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시간이기에 매순간에 집중하며 소중하게 살아갈 때에 비로소 우린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진정한 부를 얻게 된다. 돈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부를 찾고자 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몸부림이 함께 드러난 부분이다.
38장 드레스덴 : <악령>들의 우두머리
지상 낙원과 절대 권력
네차예프 사건을 소재로 쓰여졌던 <악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악령은 단순히 인물의 전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전형을 의미한다. 그리고 작중 인물인 스테판의 회개 장면을 통해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거두어낸다. 자기 내면의 <악령>을 인정하는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
39장 드레스덴 : <쓸모>의 문제
쓸모없는 것들은 왜 필요한가
p.345 예술은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가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드레스덴에서 쓴 『악령』 은 「마돈나」를 중심으로 예술의 쓸모에 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p.349 <인간은 먹을거리나 음료수 못지 않게 예술을 필요로 한다.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이 구현하는 창조성에 대한 욕구는 인간 본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p.349 예술의 용도에 관한 그의 생각은 『백치』에서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p.350 진리가 아닌 것들은 예술로 전환되는 시험을 견뎌 내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난다. <그러나 진리를 퍼내어 생생하고 압축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작품들은 우리를 휘어잡아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아무도, 절대로, 설령 수세기가 지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반박하지 못한다.>
p.350 예술은 직설적인 사상과 직설적인 도덕이 제 구실을 못할 때 진과 선이 역할까지 대신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예술의 쓸모에 관해 논하려고 했지만, 사실 명확하게 그 근거를 대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논설가가 아닌 소설가이기에 자신의 입으로 구구절절 예술에 대해 논하기 보다 작품으로 얘기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어 보면 왜 예술이 필요한 것인지 알게 된다. 우린 예술을 통해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그로 인해 이 폐색감 넘치는 삶(=죽음)을 생생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5부 다시 러시아, 영광을 향하여
40장 트베리 : 마음속의 <변두리>
당신은 중앙과 그물망에서 소외되어 있는가
p.362 진짜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중심>에서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상상이 깊어지면, 인간은 결국 자신의 본질로부터 분리된다. 본질에서 분리될수록 인간은 외부와의 연결에 집착하고 집착은 더욱 큰 소외를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저지르는 많은 우행들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자기 소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악령>의 배경 중 하나로 추측되는 트베리를 통해, 중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의 삶은 결국 파멸로 나아가게 된다는 고찰을 보여주고 있다.
41장 상트페테르부르크 : 소설가에서 <멘토>로
그는 1인 미디어의 선구자였다
p.367 새 잡지의 제목은 『시민』지 칼럼 제목과 동일한 <작가 일기>였다. 그는 새 월간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자 유일한 기고자였다. 러시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1인 미디어가 탄생한 것이다.
p.369 『작가 일기』의 의의는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지속적으로 강도 높게 독자와 <직접> 소통했다. 아니, 독자들로 하여금 이 대단한 작가가 자기네들과 <직접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도록 해주었다.
p.370 <러시아 전국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하고 그를 청년층뿐 아니라 저주받은 문제로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의 스승이자 아이돌로 만들어 준 것은 『작가 일기』였다>
p.370 그가 칼럼을 쓰기 위해 샅샅이 뒤져본 <현실의 모든 디테일>,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나눈 <직접적인 소통>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가 에언자로 불렸겠는가.
<작가 일기>라는 잡지를 통해 1인 미디어의 로망을 실현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이다. 1인 미디어는 요즘 시대에 가장 화두가 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보니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저 당시에 1인 미디어를 구현한 것도 흥미롭지만, 그의 저널리즘적인 성향이 <작가 일기>를 통해 빛을 발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나도 좀 더 현실에 흥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42장 바트엠스 : 인간의 품격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p.378 무엇이 인간의 품격을 완성할까. 예의범절, 교양, 독서, 안목은 품격의 시작이지 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절제와 강인함과 너그러움과 자유로움을 배우고 익혀 자기 자신과 삶과 세계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때 품격이 획득되는 것 아닐까.
<미성년>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성숙하는지를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작품인지라 박한 평가를 볼 때마다 조금 안쓰러운 느낌이 드는데,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질지언정 주제와 테마는 절대 떨어지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3장 스타라야 루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 명성의 절정
문학의 땅에 한 알의 밀알로 죽다
도스토옙스키는 스타라야 루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 마지막 대작인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썼다. 그토록 원하던 경제적인 지원 속에서 원하는 글을 마음껏 쓸 수 있었으니 도스토옙스키에게 어울리는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그의 대작이 경제적인 여유 속에서 탄생한 것은 조금 슬프게 느껴진다. 좀 더 일찍, 좀 더 여유로운 상황에서 글을 썼더라면 까라마조프 이상의 작품을 볼 수 있었을까 싶어서.
6부 <매핑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모든 길은 바다로
44장 매핑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1 : 아버지 죽이기
저 따위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걸까
카라마조프 씨네 가족을 다루기 전에 한 번 이야기를 훑고 간다. 어떤 점에서 잘 만들어진 소설인지, 그리고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인 카라마조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45장 매핑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2 : 열린 문
인생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p.402 한 번 태어난 걸로 인생이 완결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다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남> 또한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열린 문>이 존재한다.
유형수로 판결을 받고도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었던 드미트리의 모습을 통해 인생이 우리의 생각과 달리 얼마나 불연속적인 것인지 설명한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전부 무너지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조각을 끼워넣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진다.
46장 매핑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3 : 두 가지 사랑
사랑을 실천하라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대심문관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대심문관이 말한 사랑은 관념적이고 탈인격적인 것으로, 도스토옙스키가 추구하고자 했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은 언제나 현실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실천적 사랑은 이 세상을 지옥이 아닌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47장 매핑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4 : 얼어붙은 손가락
무감각한 사회는 결국 무너진다.
p.410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동안 고통을 성찰했다. 그에게 고통 중의 고통, 모든 고통들의 원형은 어린아이가 당하는 고통이다.
p.410 무너진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나 가장 두려운 특징을 도스토옙스키는 <무감각>이라 보았다. 고통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인간은 감각을 상실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보는 인간은 항상 '어린아이'였다. 어른과 어린아이가 고통스러워 하는 지점은 똑같다. 어른이라고 해서 더 성숙한 아픔을 맛보는 것도 아니고, 아이라고 해서 미숙한 아픔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에 무감각해진 인간이야말로 진정 무너진 존재라고 보았다. 스메르자코프처럼 말이다.
48장 매핑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5 : 기억의 힘
<착한 그 시절 서로를 잊지 맙시다>, 대문호가 꿈꾼 공동체
p.419 기억의 대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조건하에서도 그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을 추려 내어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은 행복할 수 있는 능력과 동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가 꿈꾼 공동체는 모두가 행복했던 시절과 순수를 잊지 않고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면의 어린아이를 달래고 일깨워 순수함은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한 사랑의 진짜 역할인지도 모른다.
맺음말
끝나지 않은 여행
p.423 도스토옙스키의 여행도 그랬다. 그는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달라졌다. 매번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은 읽었다. (중략) 그의 삶도, 문학도 다시 태어남의 끝없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p.424 <영원한 추구, 우리는 이것을 인생이라 부른다.>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여행이 저자의 철학에 미친 바를 이야기한다. 부럽다. 존경하는 작가의 행선지를 쫓으며 그와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문득 여행이 가고 싶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를 쫓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