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

003. 분신

쿠데 2020. 1. 5. 17:37

분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116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시작

 무사히 <가난한 사람들>을 읽고 다음 작품인 <분신>을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무척 좋았기 때문에 도끼 선생의 글에 대한 편견이 조금 사라졌다. 좋은 스타트라고 생각한다. 이 기세로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까지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작품... 상당히 읽기 힘들다ㅠㅠ 가독성은 좋지만 다른 의미로 읽기 어렵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책을 읽고 도끼 선생 작품에 학을 뗄 수도 있을 것 같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알고 싶다면 밑으로...

 

 감상

 앞서 읽은 <가난한 사람들>은 도끼 선생 답지 않은 글이라며 놀랐었지만, 이번 글은 너무나 도끼 선생님다운 글이라서 놀랐다. 아, 그래... 이런 느낌이었지. 종잡을 수 없는 등장인물의 강박적인 심리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의 향연ㅠ 기존에 읽었던 <죄와 벌>이나 <가난한 사람들>과 비교해도 이번 책의 주인공은 정말 압도적으로 찌질하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나의 가난한 언어 구사력...) 그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일단 시놉시스는 정말 흥미롭다. 하급 관리로서 소소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야꼬프 뻬뜨로비치 골랴드낀. 어느 날 그와 똑같이 생겼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인물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도플갱어는 골랴드낀의 삶은 파괴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이 도플갱어의 정체는? 골랴드낀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여기까지 읽으면 흥미로운 도플갱어 서사로 보인다. 순수문학에서 장르문학 수준의 드라마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소재인 도플갱어를 도끼 선생이 썼다니 몹시 기대가 됐다. 우리의 대작가님은 이 매력적인 소재를 어떻게 다루셨으려나? 펜을 들고 본격적으로 책에 몰입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몰입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골랴드낀이라는 하급 관리가 등장해서 자의식 과잉으로 보이는 행동만 반복할 뿐,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그가 무슨 상황에 놓인 것인지 전혀 파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갑자기 파티에 간다더니 도시를 나돌지 않나, 도시에서 같은 관리들을 만나니 도망다니질 않나, 어쩌다 파티에 가긴 했는데 초대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쫓기더니 다시 쪽팔려 하면서도 억지로 파티에 들어가질 않나...

 

 사실 도끼 선생의 글을 읽을 때 가장 난감한 게, 주인공들이 무슨 이유로 늘 자의식 과잉에 시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두 가지의 추론을 해보았는데, 첫 번째는 인물이 아닌 아이콘으로서 주인공을 다루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의도적으로 그런 의도를 숨겨서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첫 번째부터 알아보자. 석영중 교수님의 해설을 보면 도끼 선생이 이런 인물들을 다루는 것은 기존의 자연주의 문학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다루는 '하급 관리'라는 인간상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도끼 선생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사적인 사정을 가진 개인적인 인물이라기보다 '하급 관리'라는 사회적인 아이콘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주인공이 어쩌다 자의식 과잉이 존재가 되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는 자연주의 문학에서 다루던 '영혼없는 하급 관리'의 안티테제로서 존재하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도끼 선생의 인물들은 캐릭터 자체로서 존재한다기 보다 기존의 문학적 전통에 대한 해석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두 번째는 의도적으로 그런 서사들을 숨였을 가능성이다. 도끼 선생은 윤리 문제에 매우 민감한 작가였다. 여기서 민감하다는 건 단지 선과 악을 나누는 것에 민감하다는 게 아니라, 선과 악의 문제를 천편일률적으로 보지 않고 심연까지 파고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물 개인의 서사가 짙어지면 그만큼 감정 이입의 소지가 커지게 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 인물을 보는 것이 어려워진다. 어쩌면 인물 개인의 서사를 일부러 은닉해서 감정 이입의 여지를 줄이려던 게 아닌가 싶다. 확실히 <죄와 벌>을 읽을 때에도 라스꼴리니프에게 쉬이 감정이입되지 않는 효과가 있긴 했었으니까. 인물의 사정을 뒤로 제쳐두면 그 인물의 행동과 맥락만을 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거기서 비롯되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했던 게 아닐까?

 

 아무튼, 어떤 이유든지 간에 골랴드낀의 행동을 납득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병적인 자의식 과잉이 극에 달했을 때 그의 분신인 작은 골랴드낀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나타나는 5장부터는 상당히 몰입감 있는 전개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거의 라이트 노벨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렇게까지 쓱쓱 읽힐 일인지!

 

  특히나 골랴드낀의 분신인 작은 골랴드낀이 그의 삶을 본격적으로 침범하는 부분부터는 스릴러 못지 않은 전개가 이어진다. 오죽 흡입력이 강하면 발췌할 문장이 없어서 곤란했을 정도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전개가 지루하다는 평가에는 좀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전개는 매우 드라마틱하며, '갑자기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같은 화법을 여러 번 쓰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 작가 또한 의도적으로 극적인 전개를 추구한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도플갱어라는 소재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자신과 가짜 자신이 부딪치면서 생겨나는 스파크가 짜릿하고 즐거웠다. 소심하고 찌질하기 그지 없는 골랴드낀과 달리 작은 골랴드낀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다. 한편으론 비열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기도 한다. 골랴드낀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행동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것을 보며 점점 미쳐가는 골랴드낀의 묘사가 작품의 후반부를 채운다.

 

 골랴드낀은 이상적인 자신을 그리면서도 그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상처를 자처하는 자의식 과잉의 인물이다. 작은 골랴드낀은 그 상처 틈에서 태어난 골랴드낀의 은닉된 자아다. 그는 골랴드낀과 달리 일도 잘하고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골랴드낀이 되고 싶었던 자아인 동시에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식의 분열을 통해 골랴드낀을 입체적인 인물로 출력된다.

 

 이상x현실의 작법은 목적어가 무엇이 되었든 늘 흥미롭다. 이상적인 나와 현실적인 나가 되었든, 이상적인 세상과 현실적인 세상이 되었든 그러하다. 이는 대중 문학에서도 자주 쓰는 문법이기 때문에 당시에 도스또옙스키의 작품이 너무 대중적이라서 욕을 먹었다던 이야기가 새삼 이해가 되는 작품이기도 했다. 소재도 자극적이지만 그걸 표현하는 화법도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고찰이 느껴지진 않지만 적어도 읽는 동안엔 쉽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전혀 대중적이지가 않다.

 

 바로 주인공의 조형이다. 주인공 화자의 피해망상/편집증/의심/자학의 성향을 견디기가 생각보다 너무 버겁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생각하나? 싶은 부분이 줄줄이 이어지다 보니 솔직히 읽기가 좀 힘들다. 마음이 고장난 사람의 내면을 필터 없이 지켜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책이겠지만, 읽기로 결정했을 때 이런 부분에 대한 각오가 좀 부족했던 것 같다. 도끼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미친놈이 안 나오길 바라다뇨? 그래, 내가 잘못했다orz 앞으로는 좀 더 염두에 두고 볼 것 같다.

 

 한편 이런 집요한 심리 묘사 덕분에 종종 어마무시한 통찰이 나오기도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로는 명확하게 볼 수 없는 인간 심연의 찌질함을 스트라이크로 묘사하는 부분들이 있다. 읽다가 눈이 번쩍 떠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어서 차마 포기할 수가 없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응어리처럼 뭉쳐져 있는 나의 심연을 날선 발톱으로 한 번 확 긁어주는 느낌이다. 이건 뭐 단짠단짠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책인 건 확실하다. 읽는 내내 해설이 고픈 건 처음이었다. 아직 도끼 선생의 작품 세계에 충분히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등장인물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 도중에 다시 앞장으로 돌아가서 읽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에선 그렇게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앞에서 내가 못 본 내용이 있었나? 하면서 다시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래도 왜 그러는지 좀체 알 수 없었던 게 가장 답답한 부분이었지만!

 

 내면을 파먹다 못해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유형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겨우 겨우 읽었다. 내 주변에는 없었으면 싶지만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특히 골랴드낀은 상태가 심각하다. 내가 봤던 사람 중에서도 제일 찌질하다(!) 어찌보면 책을 통해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멀찍이서 접할 수 있는 거니까 그 점에서는 의미있는 독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여기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ㅠ)

 

 그리고 마침내 해설을 읽게 되었고, 동시에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답답함과 불안함이 일부 해소되었다. 왜 골랴드낀처럼 찌질한, 문학적으로 순화하자면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인물을 도끼 선생이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이 작품 자체보다는 앞으로 이어진 도끼 선생의 다른 걸작들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다 읽은 지금에 와선 생각한다ㅠㅠ

 

 어쨌든 나는 현실과 이상이 부딪치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양식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그것도 부정적인 각도에서 확인하는 것은 독자로서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답답한 일주일이었지만 즐거웠다.

 

 문장

한편 큰 골랴드낀 씨는 천박한 작은 골랴드낀 씨를 충분히 알아보았지만, 역시 실수였는지 그가 내민 손을 꼭 움켜쥐고 힘주어 다정하게 흔들었다. 전혀 뜻하지 않았던 기이한 심적 동요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감정으로 그는 그렇게 손을 쥐고 있었다. 적의 위선적인 행동에 우리의 주인공은 속고 만 것일까, 아니면 당황해서 한 행동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지가지없는 제 처지를 느끼고 현실을 인정해 버리고 만 것이었을까.
p.175

  왠만하면 본문에서 골라보려고 노력한 결과, 역시 이 문단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분노와 실망감, 애정과 회한으로 가득한 복잡한 감정의 한 가운데를 푹 찔러서 골랴드낀의 진심이 새어나오는 장면이라 인상적이었다. 이런 고찰과 이런 장면 때문에 도끼 선생의 작품을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어쩜 이리 깊고 섬세한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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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신 뻬쩨르부르그 서사시

 

 제1장

 

p.8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몰라. 내가 만약 뭔가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일이 생각했던 대로 풀리지 않게 되면, 예를 들어 뜻하지 않던 뾰루지가 튀어나온다든지, 다른 어떤 불쾌한 일이 생긴다든지 하면, 그땐 진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아직은 괜찮군, 아직은 만사형통이라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에 큰 만족을 표하며 골랴드낀 씨는 거울을 제자리에 놓았다.

p.9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펴고는 지갑의 가장 안쪽에 있는 주머니로 세심하고 만족스런 눈길을 보냈다. 초록색, 회색, 파란색, 빨간색, 그리고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색깔의 신용 카드들도 골랴드낀 씨의 기쁨에 동의하듯 제 주인에게 반가운 눈길을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인 골랴드낀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한 문장들을 발췌했다. 도끼 선생님 작품들의 주인공이 늘 그러하듯 강박증을 가진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돈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여타 작품의 주인공들과 흡사하다. 도끼 선생 작품의 주인공치고는 돈이 조금 있어보이는 게 신기하다.

 

p.15 ⎡내가 아니고, 놀랄 정도로 나랑 닮은 누구 다른 사람인 척할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쳐다봐? (중략) 그래, 내가 아니야, 나는 내가 아닌 거야, 그러면 되지, 뭐.⎦


 이후의 전개를 예고하는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이런 자의식 과잉의 태도는 바로 이전에 읽은 <가난한 사람들>의 주인공인 마까르에게서도 보인 모습이다. 다만 골랴드낀의 경우 아직 마까르가 보였던 솔직함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제2장

 

p.20 ⎡저는요,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중략) 저는 제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거죠, 저만의 길을요,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저는 제게 아주 특별하며, 제가 생각하는 바로 저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시내에서 같은 일터의 직원들을 만나 모습을 숨긴 뒤, 바로 주치의인 끄레스치얀을 찾아온다. 골랴드낀의 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끄레스치얀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밝은 생활을 영위하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골랴드낀의 대답이 압권. 심각한 자의식 과잉 상태인 건 확실해보인다만.

 

 

 제3장

 

p.39 ⎡네, 찾으셨어요, 야꼬프 뻬뜨로비치, 그런데 웬일이세요? 향수도 뿌리시고 포마드까지 바르신 데다가 옷까지 이렇게 멋있게 차려입으셨으니......?⎦

p.39 ⎡지금까지는, 제군, 그대들은 나를 몰랐어요.⎦


 길거리에서 만난 같은 일터의 직원들이 하는 말이 심상치 않다. 사실 이후의 반응이 더욱 이상하다. 골랴드낀의 대답에 폭소를 해버리니까. 골랴드낀은 사실 이런 식으로 여유를 누릴 만한 처지가 아닌 걸까? 그렇다면 처음에 나왔던 신용카드들은 대체 뭘까. 어쨌든 그의 처지가 그닥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이후 예정대로 올수비 이바노비치의 만찬에 찾아갔다가 쫓겨나고 마니까. 초대 받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 점점 혼란스럽다.

 

 

 제4장

 

p.54 <기다릴 줄 아는 분별이 있다면 만사는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라 발췌해보았다. 아직 발단 부분이 진행 중이라 본문에서는 크게 발췌할 만한 부분이 없다.

 

p.55 문제는 그가 <왜 못가? 다들 가는데......>라면서 광과 계단까지는 도달할 수가 있었지만, 더 이상은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문전박대를 당한 후에도 파티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골랴드낀의 모습이다. 오지 말라는 데도 굳이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p.60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키가 훤칠하니 잘생긴 한 장교가 있었는데, 그 앞에서 골랴드낀 씨는 자신이 진짜 벌레 같다고 느꼈다.

p.61 그의 머릿속엔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만약, 저 샹들리에가 사람들 머리 위로 떨어지면 나는 즉시 끌라라 올수비예브나를 구하러 달려갈 거야. 그녀를 보호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걱정하지 말아요. 아가씨,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오, 당신 옆엔 내가 있잖소.⟫ 그리고........)


 이제보니 그의 이상한 자격지심은 끌라라 올수비예브나에 대한 흠모 때문인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무리하게 생일 파티를 찾아왔지만 자신보다 더 잘난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들고, 끌라라 그 자체에게도 주눅이 들고 있다. 좀... 별론데, 이 인간ㅋㅋ

 

 

 제5장

 

p.68 골랴드낀 씨는 지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재가 되어 날아가고만 싶었다.


 극도의 자기 혐오에 시달리며 집으로 달아나는 골랴드낀. 자살을 생각하듯 강물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놀랍게도 그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괴리감을 느낄 때 그와 닮은 분신이 나타난다.

 

p.74 그가 그토록 혼란스러워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낯선 사람이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p.75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그 만남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고, 다만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분신과 조우하기 직전의 골랴드낀. 그와 만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만나고 싶어한다. 분신에 대한 골랴드낀의 인식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변해갈지를 지켜보는 것이 관건일 것 같다.

 

p.76 오래전에 잊어버린 아득한 상념 하나가, 옛날에 일어났던 어떤 일에 대한 기억 하나가 지금 그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망치로 치듯 머리를 울려 그를 화나게 했고, 도무지 떨어져 나가려 들지 않았다.


 이 상념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혹시 나중에 언급될 만한 중요한 사건일까 싶어서 표시해두었다. 다 읽은 다음에 어땠는지 별도로 표기하겠다.

 

p.77 그의 손님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 골랴드낀 자신이었다. 다만 골랴드낀 씨, 하지만 완벽하게 똑같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면에서 똑같은 그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분신과 만나는 골랴드낀. 이 만남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지켜보고 싶다. 제5장은 전반적으로 속도감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발단은 이제 끝난 것 같으니 제6장부터는 좀 더 많은 문장을 채취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제6장

 

p.81 그는 느닷없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파이프를 내던지고 후닥닥 세수하고 면도하고 머리를 매만지고 제복을 입고 어떤 서류를 움켜쥐고는 관청으로 날다시피 뛰어갔다.


 어젯밤 충격적인 분신과의 만남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략되어있지만, 아무튼 다음날 일어나서 혼돈을 겪고 있는 골랴드낀의 모습이 그려진다. 파티에서 쪽을 판 일 때문에 회사에 갈까 말까 하다가 결국 안 가기로 해놓고는 갑자기 충동적으로 회사에 가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 이랄까 찌질해서 적어보았다.

 

p.90 「뭐, 훌륭한 추천서였다고 하더군. 각하께서 안드레이 필립뽀비치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셨다지.」


 골랴드낀의 분신이 자신이 동경해 마지 않는 (그러나 철저히 무시당하는) 안드레이 필립뽀비치로부터 추천서를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장면. 골랴드낀과는 정반대의 인물이라는 게 이런 지점에도 잘 드러난다. 그와는 달리 그는 높은 분들께 인정받는 똑똑한 문관인 것이다.

 

p.92 악마는 고요한 심연에서 생겨나는 법이라고들 하니까 말이다.


 나는 악은 고독에서 기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견딜 수 있는 고독은 힘이 되지만,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고독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의 수준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7장

 

p.98 손님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죽겠다는 듯, 자기 이름도 역시 야꼬프 뻬뜨로비치인 것에 용서를 구하기라도 하듯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분신인 야꼬프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골랴드낀. 그의 태도가 골랴드낀과 매우 닮은 듯 다르다. 골랴드낀은 허세를 부려서 수치를 벗어내려는 타입이지만 이 사람은 대놓고 수치스러움을 드러낸다.

 

p.101 작은 골랴드낀 씨의 이야기는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계속됐다. 하지만 그가 겪은 일들은,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하찮고 공허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p.102 골랴드낀 씨는 가슴이 찡했다. 정말로 마음이 움직였다. 손님의 이야기는 아주 공허한 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와 닿아 마치 하늘이 주는 양식 같았다.


 야꼬프(작은 골랴드낀)의 이야기가 하찮다는 지점이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두 사람이 결국 도플갱어 같은 존재라면, 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골랴드낀의 파란만장한 드라마 또한 저렇게 초라하고 보잘것없게 보인다는 뜻일 테니까. 결국 그의 이야기에 깊게 공감을 하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p.104 골랴드낀 씨는 최고로 만족한 상태였다. 첫번째 이유는 완벽한 정신적 안정을 되찾은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이젠 원수들이 겁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 모두를 마지막 결전에 불러낼 각오까지도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세 번째로는 자신이 몸소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 즉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덕분이었다.


 자신보다 약자(=야꼬프)를 발견하고 자신이 그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 골랴드낀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 이 얼마나 초라한 남자인가. 타인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해야만 자신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니. 이런 부분은 약간 풍자적으로도 보여서 흥미롭다.

 

p.104 한편 그는 지금 자신이 완벽하게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아주 작은 벌레가 하나 남아서 지금 가슴을 갉아먹고 있노라고 마음속으로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행복하지 않다, 마치 작은 벌레가 가슴을 갉아먹는 듯하다, 이런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발췌해두었다. 왜, 애인하고 헤어진 후에 한동안은 이런 기분이지 않던가? 

 

p.105 ⎡자넨, 절대로 누구도 믿어선 안 되네. 내가 아는 자네는, 야꼬프 뻬뜨로비치, 자네 성격을 내가 아는데, 자넨 모든 것을 얘기해 버릴지도 몰라, 성격이 너무 곧아서 말이지! 자네는 말일세, 이 사람아, 그자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네!⎦


 정작 분신에겐 속에 있는 이야기를 전부 해놓고, 그에게는 침묵하라고 하는 골랴드낀의 모습이 사뭇 우습다. 이거 혹시 풍자 소설인가?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풍자하려는 거지?

 

 제8장

 

p.113 작은 골랴드낀 씨는 무척 바빠 보였고, 숨을 헐떡이며 어디론가 서둘러 가고 있었다. 그는 아주 형식적이고 사무적인 모습을 취했으며, 누구든 그의 얼굴에서 <특별 지시를 받고 어딘가로 가고 있음......>이라는 글귀를 읽을 수가 있을 정도였다.


 상황이 반전된다. 그 전날에는 골랴드낀 앞에서 그리 작아지던 분신이 다음날 일터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특별 지시를 받을 만큼) 인정받는 존재로서 뛰어다닌다. 심지어 골랴드낀을 약간 얕잡아 보는 태도도 보인다. 이후에 어떻게 되려나? 궁금해 죽겠다ㅋㅋ 분신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p.116 ⎡(전략) 제가 생각하기에 요즘은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들의 진면목을 알기 어렵다는 겁니다.......⎦

p.117 ⎡(전략) 가령 저는 필요할 때만 가면을 씁니다. 곧이 곧대로 말하자면, 카니발이나 즐거운 모임이 있을 때만 쓰지요. 하지만 함축적인 뜻으로 말하자면, 사람들 앞에서 매일 가면을 쓰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던 것은 바로 이겁니다, 안똔 안또노비치.⎦


 말로는 스스로 가면을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두터운 가면을 쓰고 있는 골랴드낀. 그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가면으로 감추고 있다. 문제는 가면이 너무 투명하다는 거지. 그 가면의 실체가 도플갱어인 야꼬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싶은데... 골랴드낀과 달리 잘나고 뻔뻔한 야꼬프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제9장

 

p.132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겠어. 한데 잘 따져 보면, 상식적으로 따져 보면 말이야, 대체 내가 왜 이렇게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거지? 그래, 이건 아니야, 내가 왜 이렇게 바빠야 하는지 좀 따져 봐야겠어. 도대체 내가 왜 걱정하고 다치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있는 거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되돌릴 수도 없는데...(후략)>


 정말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을(..) 여튼, 자신의 자의식 과잉을 자각하는 골랴드낀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도 잠시일 뿐, 이어지는 야꼬프의 비열한 행동에 골랴드낀은 감정적으로 널뛰게 된다. 이후의 전개를 보면 야꼬프와 골랴드낀은 확실히 동일 인물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결국 야꼬프가 골랴드낀을 괴롭히는 행동은 골랴드낀이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과 같다. 극도의 자기 혐오, 또는 이상에 대한 지향이 엉켜서 만들어진 게 야꼬프인 건 아닐까? 여튼 재미있다.

 

 제10장

 

p.157 하지만 그가 저지른 비열한 행위는 정말 야비한 비열함이 아니라, 동기는 그렇지 않았는데 결과가 비열해진 경우였다. 다시 말해서, 예를 들어 가끔은 너무 정확하고 치밀해서, 또는 무방비 상태에서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기 때문에 야비한 행위가 야기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비열해지는 상황에 대해 짧고 굵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두 함께 케이크를 먹는 자리에서 딱 하나 있는 딸기를 먹기 위해 머리를 굴렸는데, 갑자기 모든 상황이 의도와 달리 너무 딱딱 맞아 떨어져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 의도를 눈치채게 되는 상황 같은 거지. 은밀하게 숨겨야 하는 의도가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표면으로 드러나면 비열하게 보일 수 있는 그런 상황에 대한 묘사인 것 같다. 흥미로운 통찰.

 

p.175 한편 큰 골랴드낀 씨는 천박한 작은 골랴드낀 씨를 충분히 알아보았지만, 역시 실수였는지 그가 내민 손을 꼭 움켜쥐고 힘주어 다정하게 흔들었다. 전혀 뜻하지 않았던 기이한 심적 동요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감정으로 그는 그렇게 손을 쥐고 있었다. 적의 위선적인 행동에 우리의 주인공은 속고 만 것일까, 아니면 당황해서 한 행동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지가지없는 제 처지를 느끼고 현실을 인정해 버리고 만 것이었을까.


 감탄하면서 읽은 부분이다. 한때 친했다고 생각한 사람과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다시 그와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일 때 느끼는 사람의 심연을 제대로 묘사했다. 이런 사적이고 나약한 부분에 대한 통찰을 읽을 때마다 도끼 선생의 글을 읽는 보람을 느낀다. 사실 그와 갈등을 겪고 있지만, 야꼬프와 좋은 시간을 보냈던 골랴드낀으로선 내심 이 사태가 해결되고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길 바랄 것이리라. 그 복잡하고 꼬인 심정을 명확하게 통찰하고 있다. 대단한 문단이라고 생각한다.

 

 제11장

 

p.186 <일이 잘 풀리건 안 풀리건 간에 내가 졌다는 사실, 거기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어. 내가 완전히 끝장나 버렸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됐고. 확실해졌고, 도장까지 꽉 찍혀 버렸다고. 그건 요지부동의 사실이야.>


 이런 사고 방식이 책의 서문부터 말미까지 쭈욱 이어져 있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게 심각한 일이 생긴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사람이 아니라 자존심이 하는 말처럼 들릴 지경이다. 이렇게 짜증내면서 읽는 게 적합한 독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뒤로 갈수록 골랴드낀의 태도가 날 지치게 한다ㅠ
 

 

 제12장

 

p.206 ⎡나리, 나리에겐 적이 있어요. 경쟁자요, 나리. 그것도 아주 강한 경쟁자가 있어요, 예, 그렇습죠.......⎦


 만약 여기서 뻬뜨루쉬까가 지적하는 경쟁자가 골랴드낀 자기 자신을 뜻하는 거라면, 작가도 골랴드낀의 성정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는 건데... 그렇다면 골랴드낀의 자의식 과잉적 행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의도된 부분일까? 싶어서 약간 위로가 된 부분이다.

 

p.209 ⎡이런 일은 달리 일어나는 게 아니라, 비도덕성 때문이야.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좀 다른 식으로...... 그러니까 때때로 회초리도 대고 했어야 했는데, 사탕이나 주고, 그냥 온갖 달콤한 것만 지나치게 먹이고, 그리고 그 영감탱이는 이렇게 말해 온 거야. ⟪얘야, 내 귀여운 딸아, 예쁜 딸⟫ 어쩌고저쩌고, ⟪내 착한 딸, 너는 꼭 백작님에게 시집가게 될 거야!⟫ 어쩌고.......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렇게 자랐고 우리에게 마침내 자기 패를 내민 거야. ⟪우리 게임은 이런 거였어요⟫라고 말하면서 말이지.⎦


 개인적으로 매우 통쾌했던 부분 중 하나다. 아버지들이 딸을 사랑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이런 식의 맹목적 귀여움에는 딸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것'으로 대하는 태도가 들어있다. 이런 식으로 딸에게 진실한 애정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올가미를 채운 것은 반드시 올가미를 찢고 복수한다.

 

p.220 ⎡비열한 놈!⎦ 우리의 주인공은 마침내 이 말을 입 밖에 냈다.
⎡그래요, 비열한 놈이라도 좋소.......⎦
⎡음흉한 놈!⎦
⎡그래요, 음흉한 놈이라도 좋고.......⎦ 인간 같지도 않은 부당한 원수는 그만의 비열한 습관대로 계단 위에 서서 눈도 깜짝 안 하고 계속해 보라는 듯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정당한 골랴드낀 씨에게 이렇게 말끝마다 대꾸했다.


 비열하다, 음흉하다, 모두 골랴드낀이 가장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숭고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튼 골랴드낀으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비난을 했음에도 우리의 작은 골랴드낀은 개의치 않는다. 흥미로운 차이점.

 

 제13장

 

p.229 <(전략) 그러니까, 그게 이래요. 제가 가진 것은 직선적이고 솔직한 성격과 건전한 사고 방식뿐이고 모사 같은 것은 할 줄 모릅니다. 저는 모사꾼이 아닌 데다가, 그것을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바로 그거예요! 저는 착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일 같은 건 없고요, 당신께 모든 걸 말씀드리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골랴드낀의 모습이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골랴드낀이 아니었더가? 비록 속이 다 비치는 투명한 유리 가면일지라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정말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을 것 같다.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만...

 

p.232 <(전략) 즉, 이렇게 하는 거야. 어떻게 할 거냐면 말이지, 나는 아무 상관없는 방관자가 되는 거야. 그러면 해결되고 마는 것을. ⟪나는 방관자입니다, 제삼자입니다⟫ 어쩌고 말이야. 그러면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닌 거지. 맞아, 그거야! 사태가 이젠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급기야 자신의 포지션을 방관자로 바꾸는 골랴드낀. 사실 지나치게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는 나쁘지 않다고 본다. 다만 좀 더 일찍 그랬더라면 좋지 않았을가 하는 아쉬움이 들뿐...

 

p.244 우리의 주인공을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아!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팔자는 자기가 꼰다는 말의 전형적인 결말로 보인다. 엔딩이 좀 시원하다면 시원하달지, 씁쓸하다면 씁쓸하달지... 뒤에 이어지는 석영중 교수님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읽고 나서 매우 후회했을 것 같은 소설이다. 만약 작가가 도끼 선생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분노했을 것만 같다... (아무튼 다 읽었다ㅠㅠ)

 

 

 위대한 소설의 전주곡

 

p.245 도스또예프스끼의 초기 작품 중에서 독자와 비평가에게 가장 냉대받는 (중략) 놀랄 만큼 지루한 전개 방식, 단조로운 인물 구조,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 반복적인 서술 등이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상식적인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특징일 것이다.

p.246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이 이 소설에 대해서 굉장한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은 더 컸다.

p.246 주인공 골랴드낀은 자기가 발견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사회적 전형이라고 자만하였다.


 서문을 읽자마자 안도했다. 나만 재미없게 읽은 게 아니구나; 당대 독자들과 비평가들도 그렇게 느꼈다니 책을 읽는 내내 느낀 소외감이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다.
도끼 선생이 이 책에 많은 기대를 했다가 실망했다는 걸 보면 역시 자기 작품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기 어려운 건 대작가나 일반인이나 마찬가지구나 싶어서 이 부분도 꽤 위로가 되었다. 다만 전개 방식이 지루하다는 평가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는데, 내 기준에서 이 작품은 전개 과정은 재미있지만 읽는 동안 남는 게 없고 읽고 나서도 남는 게 없는 (제대로 못 쓴) 라이트 노벨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읽는 과정 자체는 제법 재미있었다. 다만 내내 이어지는 골랴드낀의 자의식 과잉 쇼를 보는 게 너무 너무 힘들었을 뿐이다ㅠ_ㅠ

 

p.247 이 작품에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문학적 사실이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자연주의 학파> 문학의 주인공인 하급 관리의 테마이고, 두 번째는 분신 혹은 분열된 의식의 문제이다.

p.247 하급 관리의 테마 - 『분신』의 골랴드낀은 자연주의와 고골,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의 처녀작에서 발전해 나온 인물인 셈인데, 그의 존재는 19세기 중반의 뻬쩨르부르그라는 특정한 시공간, 특히 관등이 인간성을 지배하고 관등에 의해서만 개인의 우열이 결정되는 비인간적 관료주의 사회를 반영한다.

p.248 분신 혹은 분열된 의식의 문제 - 골랴드낀의 분신은 그 자신의 열등의식, 비겁함, 억눌린 자아, 상위 계급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 자기 비하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제2의 골랴드낀은 골랴드낀의 열등의식과 짝을 이루는 과대망상증, 자기 비하와 짝을 이루는 자만감, 그리고 부와 명예와 쾌락을 향한 은밀한 욕망의 화신인 것이다.

p.249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존재라고 믿었으며 (중략) 도스또예프스끼가 골랴드낀을 가리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사회적 전형>이라 부른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것들...... 에 대해서 석영중 교수님의 해설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 '분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분열된 의식'에 대해 도끼 선생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후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해주고 계신다.

 

p.249 골랴드낀이 이후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의 원형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자의식이다.

p.250 골랴드낀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발화는 타인의 반응을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는 주체의 두려움과 그 두려움의 이면에 있는 자만심을 동시에 표현해 준다. 바흐찐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도스또예프스끼적 담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타인의 말을 지향하는 말>의 맹아는 초기작 『가난한 사람들』과 『분신』에서 발견된다.

p.250 『분신』의 세계는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골랴드낀과 제2의 골랴드낀 간의 적대적이고 뒤틀리고 역겨운, 그러면서도 어쩐지 섬뜩한 관계만을 축으로 전개될 뿐, 그 밖의 인물들은 거의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인물 구조는 이후 도스또예프스키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 구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p.250 분신들은 인물들의 분열된 의식을 표현해 주는 동시에 소설을 매우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고 또한 도스또예프스끼 특유의 판단 유보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p.250 다시 말해서 선한 인물은 악한 인물을 분신으로 갖기 때문에 선하다고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도스또예프스끼의 모든 인물들이 선하며 동시에 악하다는 이율 배반적 사실은 분신의 존재 덕분에 소설적 당위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려고 이 책을 다 읽었나 보다(..) 싶을 정도로 좋았던 해설이다. 단지 분신 자체의 해설일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이어진 도끼 선생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복잡다단한 인물들의 심리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이드를 읽은 기분이다. 예전에 죄와 벌을 읽었을 때 느꼈던 답답함이 오히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해소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집을 읽기로 결정한 보람을 느낀다. 개인의 분열과, 그 분열을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스토리 자체에는 무척 흥미가 많기 때문에 앞으로도 도끼 선생의 책을 일을 때마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