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 30 / 31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시작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읽기 프로젝트도 이제 마지막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집 읽기 프로젝트가 끝난다는 기쁨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최고 명작인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게 된 기쁨이 더 크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 지난 1년간 도스또예프스끼를 읽고 또 읽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도스또예프스끼의 세계를 즐기고 싶다.
이번 리뷰에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철학들, 인물들, 그리고 묘사들이 이 작품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를 중심으로 작성할 예정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자체보다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전체에 대한 리뷰가 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리뷰는 모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상
그동안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읽으며 느꼈던 메시지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바로 이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완전한 자유를 꿈꾸는 미성년들을 위한 사랑의 발견
또한 각각의 테마는 이런 메시지와 대표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다.
테마 | 메시지 | 대표 작품 |
고통에 몸부림 치며 | 결핍된 삶으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 <상처받은 사람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미성년> |
완전한 자유를 꿈꾸는 |
욕망의 완전한 실현을 꿈꾸지만 | <죄와 벌> <악령> <노름꾼> |
미성년들을 위한 사랑의 발견 | 결국 삶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 <백치> |
이번 리뷰에서는 이런 테마들이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어떻게 표현이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이 현재 우리의 삶, 그리고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1. 고통에 몸부림치며 - 결핍된 삶으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이 테마를 체현하는 인물은 바로 첫째인 드미뜨리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서 자존심 때문에 고통받는 존재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감정에 휘둘리는 유형(미성년)이고, 다른 하나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을 고립시키는 유형(악령)이다. 드미뜨리는 전자에 속한다.
드미트리는 마치 짐승처럼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는 인물이다. 그루셴까와 함께 도망칠 돈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아이처럼 울어버리고, 법정에서도 큰소리를 치다가 결국 유죄 판결을 받는다. 성향이 이러하니 수치스러운 상황도 자주 맞닥뜨린다. 충동적인 인물이 사회와 부딪쳐 체면을 구기는 것은 도스또예프스끼가 가장 애용하는 클리셰 중 하나이며, 이번 작품의 희생양(?)이 바로 드미뜨리다.
그렇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왜 이런 상황을 애용하는 걸까? 그것은 수치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인간성의 민낯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존재인지를 표현하기 위해 애써왔으며, 이는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성을 길어내기 위한 시도였다. 그것을 위해 일부러 극도로 충동적인 인물을 사회에 내보내 온갖 수치스러운 상황에 부닥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낯뜨거운 상황에 직면하지 않으면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진심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자존심과 이성이라는 마음의 파수꾼들이 너무나 완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인물들은 우리를 대신해 발가벗는 광대이자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액받이 무당처럼 우릴 대신해 우리 내면의 민낯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존심과 이성 때문에 인간성이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상황을 가장 경계했다. 자본과 과학의 발달로 인간성이 무시되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 작품을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중에서 그는 알료샤를 통해 이런 의견을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p.966
「우스꽝스럽다는 게 대체 뭔가?
사람은 종종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법이잖아?
뿐만 아니라, 요즘 재능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하는데 그 때문에 불행한 거야.
자네가 그토록 이른 나이에 그걸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난 무척 놀라울 뿐이야.
(중략)
악마가 자존심 속에 침투해 들어간 거야,
모든 세대 속에 비집고 들어간 거라고. 바로 악마가 말이야.」
개인주의 사회일수록 남에게 우습게 보이는 상황을 가장 치욕스럽게 여긴다. 특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더욱 민감하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게 싫다는 이유로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감정조차 죽이며 사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광대들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안티 테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솔직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존심을 자아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기질로 보았지, 단죄해야 할 병적인 증상으로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강한 자존심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회 부적응자라며 단편적으로 비판하기보다 아이처럼 생각하고 사랑을 보내려 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자존심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류는 참 불쌍한 존재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서로를 안타깝게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을 보내는 것만이, 자아의 감옥에 갇혀 괴로워하는 인류가 스스로를 구원할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리석어보이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스비드리가일로프나 까라마조프 같은 인물을 사랑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들에게도 마지막까지 사랑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공허한 내면을 묘사하고 그루셴까를 향한 까라마조프의 애달픔을 묘사한다. 어떤 악역이라도 결국 한계에 부딪힌 인간에 불과할 뿐이라는 대작가의 의식이 녹아있는 것이다.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도스또예프스끼가 가진 힘이다.
인간은 감정의 노예이며 자신의 그런 기질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행여라도 수치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릴까 두려워 세상 앞에 자신을 굽히거나 고립시킨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간은 외로워진다. 극단적인 외로움은 살인과 강도 같은 범죄의 단초가 된다. 도스또예프스끼가 가장 우려한 것 또한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대신해 활자 위로 수치스러운 상황을 마구 그려낸다. 평소에 우리가 깊은 곳에 꼭꼭 감추고 있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서 보여준 뒤, 우리의 감정을 마냥 수치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온갖 것을 바란다. 부, 명예, 안전, 사랑. 하지만 그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유'이다.
2. 완전한 자유를 꿈꾸는 - 욕망의 완전한 실현을 꿈꾸지만
이 테마를 체현하는 인물은 둘째인 이반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와 스메르쟈꼬프이다. 이반은 이론편이고, 스메르쟈꼬프는 실전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반의 사상과 갈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대심문관' 파트이다. 이는 이반이 지어낸 이야기로 중세의 대심문관이 다시 도래한 예수를 신랄하게 심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점은 이러하다. 성경은 육신의 욕망 대신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라고 하지만, 현실 속에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것이다. 예수와 같은 위인이 아니고서야 악마와의 내기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는 소수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대심문관은 그럴 바엔 소수의 엘리트들이 전권을 잡고 나머지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정신적인 투쟁은 지상의 욕망을 이겨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감당하되, 나머지 인류에겐 감당할 수 없는 자유가 아닌 확실한 현재의 보상을 주자는 것이다. 결국 이는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전제 정권을 구축하자는 뜻이 된다.
그러나 대심문관의 견해에 대해 예수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며, 이에 대해서는 도스또예프스끼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이후의 전개에서도 대심문관(=이반)의 견해를 논리로 반박하지 않는다. 다만 이 견해를 몸소 실천하는 인물을 통해 그 결과를 보여준다. 그 사람이 바로 스메르쟈꼬프이다.
스메르쟈꼬프는 무신론자인 동시에 세속의 삶에 충실한 존재이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알료샤와 그리고리를 비롯한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리고 이반의 사상 ㅡ 철저하게 지상의 삶을 추구하는 것 ㅡ 에 매료되어 까라마조프를 살해한다. 까라마조프의 사생아로 태어나 평생을 비참하게 살았던 그는 이반의 사상을 통해 '허락을 받았다'고 느끼고 복수를 실행한 것이다. 자신의 욕망과 목적만을 최우선으로 하여 살아가도 문제가 없다면 설령 까라마조프가 아버지라도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스메르쟈꼬프는 자신에게 이런 사상을 불어넣었던 이반으로부터 배척당한다. 애초에 이반은 이렇게까지 사태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대심문관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은 누군가 이 이야기를 듣고 논리적으로 반박을 해주길 바라서지 정말로 그의 사상에 동조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신도처럼 신봉했던 이반에게 내팽개쳐진 순간, 스메르쟈꼬프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반이야말로 그의 창조주이자 예수이고 대심문관이자 악마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을 긍정하는 대심문관의 논리에 대해 도스또예프스끼는 '양심'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양심은 선하고 따뜻한 것이 아니다. 양심은 잔인하고 집요한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잘못된 욕망을 실현하는 순간, 양심의 눈이 24시간 자신을 응시하게 된다. 양심은 끝없이 자기 자신의 눈치를 보게 만들며 자아는 순식간에 고립된다. 그리고 고립이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아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사랑과 자유를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조시마의 삶을 보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신념을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조시마를 통해 속세의 모든 고통을 긍정하고, 고립을 택할 바에야 고통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고통은 육신의 아픔이지만 고립은 존재의 단절이다. 고통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겨낼 수 있지만 고립을 이겨낼 방법은 없다. 사람은 고통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고립에 의해 죽는다. 장기적인 고립은 반드시 존재를 파괴하는 법이다.
사랑과 자유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그 고통을 기피하는 순간 인간은 고립을 맞이하게 된다. 대심문관의 견해는 고통을 피하고 고립을 받아들이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모든 것이 규정된 삶은 다른 삶의 여지를 죽인다. 모두가 풍족한 환경에서 주어진 것만을 하는 삶에 다른 결이 존재할 리가 없다. 소통의 필요성은 점점 줄어들고 개개인은 고립된다. 소통에 수반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이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애초에 이런 삶은 원한다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소통을 갈구하고 개성 있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립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고통을 추구하는 예수의 논리가 극단적이라면, 고립을 추구하는 대심문관의 논리도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대심문관의 논리대로 세상이 돌아가려면 모두가 인간이 아닌 인신(人神)이 되어야 한다.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신, 그것은 당시 과학과 자본의 발달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던 인간의 콧대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성의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룰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믿었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여겼다.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는 그것이 파멸적인 고립의 원인임을 주장해온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랬고, 끼릴로프가 그랬듯, 인신을 추구한 이들은 결국 양심에 붙잡히거나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심지어 인신에 가장 가까웠던 존재인 스따브로긴조차 자살로 죽음을 마감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성에 대한 극단적인 신봉에 대해서 이렇게 늘 날카로운 시선을 견지해왔으며 그 시선은 마지막 작품인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3. 미성년을 위한 사랑의 발견 - 결국 삶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이 테마를 체현하는 인물은 셋째인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와 조시마 장로이다.
조시마는 그간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메시지를 요약하는 듯한 인물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것은 파국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이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행복이 아닌 고행에 가까우나 그것만이 우릴 고립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감정은 바로 고립이었다. 고통을 견디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있지만 고립을 견디는 방법은 없다. (여기서 고립은 고독과 다르다) 고립이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이며,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일관된 견해였다.
하지만 꼭 그럴까? 도스또예프스끼의 말대로라면 타인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어머니는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형지에 끌려가는 아들을 보며 가슴을 태우다 죽음을 맞이한다. 즉, 타인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보낸다고 해서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왜 타인을 사랑하는 수고를 들여야 하느냔 말이다. 어차피 불행해질 거라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가 타인을 용납한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순간적인 행복이나 단편적인 이득은 일종의 부수물이지 그 자체가 이것의 목적은 아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것,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다. 또한 여기서 '자유'란 후련하고 전능한 감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란 고립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힘이며 억척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서 '차악'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인간의 삶에는 고립과 고통밖에 없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물론 행복도 기쁨도 존재한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생각하는 실존의 토지는 바로 고립과 고통이었다. 행복은 그곳에서 가끔 싹트는 꽃봉오리이다. 다만 고립의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고통의 땅에서는 무언가 자라날 여지가 존재할 뿐이다. 결국 아무것도 싹틔우지 못한 채 그대로 말라버릴 수도 있지만 '무언가 자라날 여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도스또예프스끼는 고통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예수'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대심문관은 그가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안겨줬다며 비판하지만, 애초에 예수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그는 고립을 막기 위해 재림한 것이다. 신이 없다면 고립의 무원에서 인간을 구원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 가장 극단적인 고립 속에서도 신은 인간을 위해 그곳에 존재한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한 우린 완전한 고립의 감옥에 빠지지 않는다. 신은 편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심문관의 말대로 예수는 인류에게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고립밖에 없었던 인류에게 고통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가능성을 준 것은 바로 예수이다. 고립 아니면 고통이라는 삶의 조건 자체가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비로소 '성년'이 된다.
그러나 성년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즉 고통을 기피하는 영원한 어린아이 ㅡ <미성년>이 된다고 해서 배척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완전한 성년이 될 수 있는 인류는 없다. 어쩌다 깨우침을 얻으면 가끔 성년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뿐이다. 고통을 감당하는 것은 누구나 항상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삶은 도망치는 것이 기본이며 어쩌다 가끔 고통과 맞서 싸우며 성장하는 게 특별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도스또예프스끼는 미성년들에게도 언제나 연민과 사랑을 보낸다. 조시마가 까라마조프와 드미뜨리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시마는 그들이 저지를 죄를 미리 눈치 채고 앞서 가슴아파 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당연한 전제 조건으로 삼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슴 아파하는 것. 이것이 도스또예프스끼가 생각하는 신이며, 자유이고, 사랑인 것이다.
이렇듯 도스또예프스끼의 신앙 안에는 '인간'이 존재하며 인간에 대한 동정이 기반을 이룬다. 신성 앞에서 인간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에 포용함으로써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구원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평생에 걸쳐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집대성된 도스또예프스끼의 철학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죄와 벌>과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문제를 제시한 뒤, <백치>에서 이상향을 논하고, <악령>에서의 극단적인 사고 실험을 거쳐, 마침내 <미성년>에서 인류의 성격을 규정하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는 그 모든 논의를 종합했다. 감히 말하건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도스또예프스끼의 모든 철학이 집대성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완성 작품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완성이 된 작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철학을 가감 없이 표현한 뒤, 그 결과와 해석은 온전히 독자에게 맡긴 셈이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철학을 광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고찰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이런 삶의 형태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도스또예프스끼가 걱정했던 대로 고립된 삶은 답 없는 지옥일까? 그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판단해야 할 일이다. 이제 도스또예프스끼를 떠나 우리의 삶으로 돌아가자. 세 형제가 각각 자신의 미래를 향해 나아갔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필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이 미완성작이라니 이 또한 의미심장하다. 진정한 도스또예프스끼 읽기는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눈을 통해 텍스트가 아닌 세상을 읽을 차례이다.
문장
<자신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마라, 모든 것이 오직 거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p.81
도스또예프스끼의 모든 철학을 요약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대범하게, 솔직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하게 살아라. 세상의 악의에 주눅이 들어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지 말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라.
작가로부터
역사적인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서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알료샤를 소개하면서 하나의 일대기를 두 개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소개한다. 서문을 읽다 보니 미완성작이라는 게 생각났다. 벌써부터 아쉽다.
제1부
제1권 어느 집안의 내력
1. 표도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
이 작품의 피해자이자 드미뜨리, 이반, 알료샤의 아버지인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일생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천박함 그 자체를 자신의 존재로 설명하고 있는 듯한 인물이다.
2. 큰아들을 버리다
p.27 그러나 실제로 표도르 빠블로비치는 한평생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꾸며 대고 예기치 못한 배역을 즐겨 맡았으며, 더구나 아무 필요도 없는, 예를 들면 이번처럼 자신이 직접적인 손해를 입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성격은 표도르 빠블로비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심지어 전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첫번째 아내였던 아젤라이다와 어떻게 파국을 맞이했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드미뜨리를 어떻게 버렸는지 설명하고 있다. 발췌문은 표도르의 성격을 묘사한 부분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인물들의 특징 ㅡ 손해를 자처하며 그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마조적인 성향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재혼과 두 번째 자식들
두번째 아내였던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 이반과 알료샤의 일생을 요약하고 있다. 특히 이반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학구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으로 자란 그가 어째서 갑자기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는지, 왜 그와 화목한 사이를 유지하는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제시된다.
4. 셋째 아들 알료샤
p.40 그는 타인에 대해 심판자가 되려는 생각도 없었고 무슨 일에 대해서든 남을 비난할 마음도 없었으며 또 실제로 비난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그 후 일생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였다).
p.41 그는 모욕을 가슴속에 새겨 두지 않았다. 간혹 그러한 일을 당하더라도 잠시 후면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신뢰감에 넘치는 밝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상대에게 대답을 하거나 먼저 말을 걸곤 했다. 그때 그는 모욕을 어쩌다 잊었다거나 의도적으로 용서했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알료샤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백치>의 미쉬낀과 궤를 함께 하는 인물이 아닌가 싶은데, 어떤 점에서 그와 다른지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5. 장로들
알료샤가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장남인 드미뜨리와 아버지 사이의 재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존경받는 (그리고 알료샤가 존경하는)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 모이게 된다. 사건은 여기서 벌어지는가?
제2권 달갑지 않은 회합
1. 수도원에 도착하다
표도르 빠블로비치, 뾰뜨르 알렉산드르비치가 수도원으로 향한다. 뾰뜨르는 표도르에게 제발 닥치고 조용히 있으라고 하지만 표도르를 빈정거릴 마음으로 만만한다.
2. 늙은 어릿광대
p.81 <자신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마라, 모든 것이 오직 거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p.81 「(전략)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이나 주변에 있는 진실을 감지하지 못하며, 반드시 자신이나 타인을 존경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도 존경하지 않으며 사랑을 멈추게 되면 마음을 달래고 위안을 찾기 위해 애정이 결핍된 상태에서 욕망과 색정에 몰두하여 자신들의 결점이기도 한 야수성을 드러내게 됩니다.(후략)」
장로는 표도르를 보자마자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좋은 명언이라고 생각해서 발췌했다. 그러나 표도르는 자기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그것을 즐기는 인물이다. 그는 '모욕 당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스스로 모욕에 뛰어듦으로써,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3. 신앙심 깊은 시골 아낙네들
p.92 「(전략) 그러니 위안을 얻으려 하지 말고 우시오. 단지 울 때마다 당신의 아들이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 내려다보다가 당신의 눈물을 보고 기뻐하며 그것을 하느님께 알려 드린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앞ㅇ로도 오랫동안 당신은 어머니의 위대한 슬픔을 겪게 되겠지만 결국 그것은 고요한 기쁨으로 변하여 그 쓰라린 눈물도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고요한 위안과 진정한 정화의 눈물이 될 겁니다. (후략)」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낙네에게 장로가 건네는 말이다. 장로는 슬픔으로부터 도망치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모든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던 위의 발췌문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슬프면 슬퍼하고, 아프면 아파해야 한다.
4. 신앙심이 부족한 귀부인
p.103 「실천적 사랑의 실행으로 말입니다. 이웃을 실천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사랑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신의 존재도, 자기 영혼의 불멸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완벽한 자기 희생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확신을 얻게 되고, 또한 어떤 의혹도 당신의 영혼 속으로 찾아 들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경험을 거친 사실이며 분명한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렵다는 귀부인에게 장로가 말한다. (이쯤되면 마치 데카메론 같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째서 죽음을 초월하는 길이 되는가? 자아에 과몰입한 사람일 수록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아로부터 초탈하는 방법은 자신이 아닌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때 죽음 또한 우릴 지배할 수 없으리라.
p.106 「(전략) 행복을 찾지 못하시더라도 자신은 훌륭한 길을 추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 두시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거짓을, 온갖 거짓을, 특히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공상적인 사람은 사람들이 그것을 주목해 주는, 만족도가 빠른 성급한 성취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실제로 자기 생명까지 바치겠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며 모든 사람에게서 주목받고 칭찬받기 위해 무대 위에서처럼 얼른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실천적인 사랑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완벽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후략)」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고달프고 때로는 억울한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귀부인의 말에, 장로는 실천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본래 이웃을 사랑하는 것 (=실천적인 사랑)은 행복을 보장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고행에 가까운 길이라며,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5. 아멘, 아멘!
이반과 수도사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이반은 교회가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한 모든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이른바 기독교 사회주의자이고 수도사들은 교회와 사회의 역할을 분리되어 있으며, 교회는 처벌자가 아닌 포용자로서 사회의 악을 완화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감되어본 적이 있는 도스또예프스끼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하여 재미있게 읽었다.
6. 저 따위 인간은 뭣 때문에 살고 있는 걸까!
드미뜨리가 도착하고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대화랄까, 난장판에 좀 더 가깝긴 하다. 천박한 말을 마구 내뱉어 가십을 만들고 싶어하는 관종 표도르 빠블로비치와 이반의 논문이 화두로 떠오른다. 이제보니 이반은 무신론자이면서 거짓으로 기독교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논문을 쓴 듯하다. 무엇을 위해? 교회의 관심이 필요한가? 왠지 이반은 스따브로긴의 후예 같다는 느낌도 들어 좀 더 지켜보려고 한다.
7. 출세주의자 신학생
p.138 「(전략) 큰 고난에 빠지겠지만, 그 고난 속에 행복이 있단다. 네게 주는 나의 유언은 고난 속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것이다. 가서 일해라, 부지런히 말이다. (후략)」
장로가 알료샤에게 남기는 유언이다. 조시마 장로는 지금까지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에 나왔던 유로지비들 중에서도 가장 완성된 존재가 아닌가 싶다. 사태의 본질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그것을 감싸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이라 발췌했다.
8. 스캔들
p.161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해 둘 말이 있다. 이 수도원이 그의 인생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적은 결코 없었으며, 그로 인해 쓰라린 눈물을 흘렸던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억지 눈물에 몰입하다가 한순간이나마 스스로도 그 눈물을 진실인 양 착각할 뻔했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울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는 뒤로 물러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원장은 그의 악의에 찬 거짓말을 듣고도 고개를 숙이며 다시 타이르듯 말했다.
표도르 빠블로비치의 연극적이고 과장된 성격을 표현한 부분이 재미있어서 발췌했다. 이런 악역도 존재하는 구나 싶은 반면, 이런 인물의 심리를 어떻게 알고 그려냈는지 그저 신기하다. 선악의 단죄를 떠나 표도르 빠블로비치 또한 참 매력적인 악역인 것 같다.
제3권 색마들
1. 행랑채에서
드미뜨리와 이반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시점이 그 집안 사람들에게 맞춰진다. 앞에서도 잠깐 나왔던 그리고리와 그 아내 마르파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리 또한 참 인상적인 캐릭터이다. 고지식하고 과묵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가부장적이고, 현명하면서도 무지한 사람이다. 그리고리는 이후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궁금하다.
2. 리자베따 스메르쟈쉬차야
유로지비였던 리자베따의 불행한 삶에 대해 요약하고 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인 스메르쟈꼬프를 그리고리 부부가 키웠고 현재 까라마조프의 집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진다. 스메르쟈꼬프도 이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단순한 인물 소개일 뿐인데도 재미있다.
3. 열렬한 심경의 고백, 시 형식으로
제목이 재미있다. 그리고 다음 챕터의 제목과 연계해보면 더욱 재미있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은 듯한 서술 방식같은데 이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아무튼, 까쩨리나의 편지를 받고 그녀의 집으로 향하던 알료샤 앞에 드미뜨리가 나타나 그가 까쩨리나와 어쩌다 약혼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한다. 이 사연이 굉장히 재미있다.
4. 열렬한 심경의 고백, 일화의 형식으로
p.194 「저는 형님 이야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게 아니에요. 형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형님과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p.194 「그것은 하나의 똑같은 사다리예요. 저는 가장 낮은 계단에, 형님은 열세 번째 계단의 어느 높은 곳에 있을 뿐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똑같은 부류일 뿐이죠. 맨 아래 계단에 발을 디딘 사람은 어쨌든 반드시 위의 계단으로 올라가게 마련이죠.」
자신의 추잡한 과거를 이야기하는 드미뜨리에게 알료샤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는 자신이 드미뜨리와 비교해서 더 고결한 것도 아니고, 언젠가 자신 또한 타락할 것임을 인정하며 결국 드미뜨리와 자신은 같은 인간이라고 설명한다. 이 얼마나 높은 메타 인지인가. 도스또예프스끼 식의 선인은 이토록 고결하다.
5. 뜨거운 마음의 고백, 곤두박질
그야말로 감정이 요동치는 챕터다. 정말 인상적으로 읽었다. 모욕을 주었던 까쩨리나가 역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자, 드미뜨리는 그제야 자신의 추악한 면모를 들여다 보고 그녀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자신처럼 추잡한 마음을 가진 그루셴까이나 아버지가 그루셴까를 탐하는 것을 알자 아버지에 대한 살의를 느낀다. 이는 그루셴까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낮은 자존감의 원인이 아버지라는 것을 재차 체감하고 분노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저 사람이 내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까쩨리나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6. 스메르쟈꼬프
앞서 잠깐 나왔던 스메르쟈꼬프의 이후 일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굉장히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보호 본능이 강한 인간으로 성장한 스메르쟈꼬프지만, 신기하게도 표도르는 그를 사랑한다. 어째서? 모든 속내를 드러내고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좀체 속내를 보이지 않는 '관조자'인 스메르쟈꼬프에게 동경을 느끼기라도 하는 걸까? 이 둘의 관계는 좀 더 지켜보고 싶다.
7. 논쟁
이교도들에게 붙잡혔지만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킨 러시아 병사의 일화를 두고 스메르쟈꼬프와 그리고리, 그리고 표도르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스메르쟈꼬프는 <미성년>의 아르까지와 흡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무신론자인 동시에 지상의 삶을 추구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어리버리했던 아르까지와는 달리 매우 확고하게 그 생각에 신념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8. 코냑을 마시며
p.242 「(전략) 맨발의 계집이나 모베쉬까를 처음부터 놀라게 만드는 것, 이것이 그년들을 얻는 비결이지. 넌 그걸 모르고 있었냐? 저토록 훌륭한 나리께서 자기 같은 숯검정이 계집에게 흠뻑 빠졌다는 황홀감과 짜릿함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일만큼 놀라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후략)」
표도르가 어떤 식으로 힘없는 여성들을 농락해왔는지 얘기하는 부분이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사고 방식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동경하는 대상에게 사로잡힐 때의 감정을 날카롭게 설명하고 있어서 발췌했다. 이는 우리가 자존적인 삶을 지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9. 색마들
그루셴까를 뒤쫓던 드미뜨리가 쳐들어 와서 난동을 부린다. 그 과정에서 표도르가 다친다. 다친 와중에도 표도르는 그루셴까가 자기를 선택했을까 싶어 광기에 휘둘린다.
10. 두 여인이 한자리에
p.258 알료샤는 갑자기 자신이 그녀 앞에서 고의로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순간에 압도당하고 매혹되었던 것이다.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를 만나고 그녀에게 매료되는 알료샤. 이성으로서의 사랑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압도당한 것만은 분명하다. 어째서 매혹당한 사람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느끼는 걸까? 매혹과 죄책감은 무슨 관계인 걸까?
p.262 (그루셴까) 그런데 그 여자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게 보이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닌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른 아름다운 여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여자가 아닌가!
p.263 그리고 무엇보다 알료샤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녀의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바라보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즐거운 표정이었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확신에 가득 차서 조바심내는 어린애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벙글거리며> 바로 탁자 쪽으로 다가왔다.
놀랍게도 까쩨리나의 집에서 그루셴까와 마주한다. 그루셴까의 묘사가 너무나 인상적이라서 발췌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유추했을 때는 천박한 외모의 여성일 것 같았는데, 실제로 보니 어린아이에 가까운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묘사가 되어 인상적이었다. 어째서 드미뜨리와 표도르가 그녀에게 매료되었는지 독자로서도 단박에 이해가 될 만한 묘사였다.
11. 또 하나의 파괴된 명예
조시마 장로의 죽음을 예감하는 가운데, 알료샤는 리자에게서 사랑의 편지를 받는다.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그도 속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일까?
제2부
제4권 발작
1. 페라뽄뜨 신부
p.298 「강력한 힘으로 결집한 속세의 과학은 특히 지난 세기에 이르러 성서 속에서 약속한 모든 것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엄밀한 분석 이후에 속세의 과학자들에게는 지난날의 신성한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단다. 그러나 그들은 각 부분들을 분석했으면서도 전체를 간과했으니, 그들의 맹목이란 가히 놀라울 정도란다.(중략) 왜냐하면 기독교에 반기를 든 자들이나 그에 거역하는 자들도 본질상 그리스도와 외모가 다를 가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며, 지금까지 그들의 지혜도 그들의 열정도 이미 옛날에 그리스도께서 모범으로 제시한 인간의 형상과 덕성보다 더 우수한 것을 창조해 낼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지.」
조시마 장로의 유언을 남기는 문제로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빠이시 신부가 속세로 나갈 알료샤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이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정신적 가치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도끼의 지난 철학을 요약하는 듯하다. 도끼는 이 작품이 자신의 유작이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2. 아버지의 집에서
p.302 「(전략)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너도 알다시피 그건 내가 끝까지 나의 추악한 세계에 살고 싶기 때문이란다. 그 점은 너도 잘 알 거다. 추악한 세계가 더 달콤하거든. 모두 그 세계를 비난하지만 모두 그 세계에 살고 있고, 남들은 몰래 그런 짓을 하지만 난 드러내 놓고 하고 있을 뿐이란다.(후략)」
빠이시 신부의 조언과 대조되는 표도르의 철학이다. 가식 없이 살아가겠다는 그의 의지 자체는 그럴싸하게 느껴지지만 문제는 추악을 즐기는 자일수록 고립되기 쉽다는 것이고, 고립의 결과는 파멸이라는 것이다.
3. 초등 학생들과 사귀다
호흘라꼬바 부인의 집으로 향하다가 돌팔매 싸움 중인 초등 학생 무리와 맞닥뜨린다. 그 중에서도 공격적인 한 소년과 만나 그에게 물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자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공격성을 보이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는 알료샤. 그는 이것을 '수수께끼'라고 부른다.
4. 호흘라꼬바 부인 댁에서
p.321 「왜냐하면 전 모든 내용을 완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절 모욕하고 계시는군요?」
「그럴 리가 있나요. 편지를 읽고 나서 나는 모든 것이 거기 씌어진 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조시마 장로님께서 돌아가시면 곧 나는 수도원에서 나와야 하니까요. 그후에 학업을 계속하여 시험도 보고, 법적인 연령에 도달하면, 우리는 결혼을 하는 겁니다.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아직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당신보다 더 나은 신붓감은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장로님께서도 결혼을 하라고 명하셨으니.......」
「난 이렇게 불구자히고 의자에 끌려 다니는 몸이라고요!」 리자는 뺨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직접 당신의 의자를 지요, 하지만 그때쯤이면 당신의 병은 완쾌되리라 믿습니다.」
리자의 충동적인 편지를 받고 진지하게 생각한 알료샤의 모습이 인상적이라 발췌했다. 리자를 원래 사랑했던 것이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그가 리자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진지하다. 약간 광기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로.
5. 응접실에서의 파국
p.321 「나는 그분의 신이 될 것이고, 그분은 내게 기도를 드리게 될 거예요. 그것은 적어도 그분이 배신에 대해서, 어제 내가 그분 때문에 겪어야 헀던 것에 대해서 내게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분은 내게 성실하지 않았고 또 배신했지만, 내가 그분께 바친 신의와 맹세를 평생 지키고 있는 모습을 일생 동안 보게 될 거예요. 나는 그렇게 할 거예요....... 나는 오로지 그분의 행복의 수단(아니,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행복의 도구, 행복의 기계가 될 것이고, 한평생, 한평생 그럴 작정이에요, 앞으로 그분이 일생 동안 그걸 목격하도록 말이에요! 이게 나의 결심이에요! 이반 표도로비치께서는 나를 대단히 격려해 주셨어요.」
알료샤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의 광기가 솟구친다. 까쩨리나는 그루셴까와 드미뜨리의 관계를 막기 보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드미뜨리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고 외친다. 그녀의 지독한 자존심이 결국 그녀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p.336 「(전략) 당신은 형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당신을 모욕하는 사람으로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만일 형이 마음을 고쳐 먹는다면 당신은 곧 형을 버릴 것이고 또 그 사랑도 식어 버릴 겁니다. 그러나 형이 당신한테 필요한 것은 형에 대한 변함없는 당신의 신의를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고, 당신에 대한 형의 배신을 책망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자존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 거기에는 많은 굴욕과 자기비하가 따르겠지만, 그 모든 것은 자존심 때문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후략)」
까쩨리나의 진심을 폭로하는 이반. 이반은 그저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까쩨리나에 대해서는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드미뜨리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훼손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목을 맨다는 이반의 해석이 날카롭다. 드미뜨리가 그녀를 사랑하는 날, 까쩨리나는 미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이것이 사랑인가?
6. 오두막에서의 파국
알료샤는 까쩨리나의 부탁으로, 전날 드미뜨리와 싸웠던 이등 대위 스네기료프의 집으로 향한다. 드미뜨리의 폭행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까쩨리나가 대신 돈을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는 이전에 알료샤의 손가락을 깨물었던 소년인 일류샤도 함께 있었다.
7. 맑은 공기를 마시며
돈을 전해주려고 했지만, 순간 스네기료프가 모욕감을 느끼며 돈 다발을 짓밟고 사라진다. 알료샤의 배려가 실수로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제5권 찬반론
1. 공모
p.379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우리 돈을 받더라도 우리들과 대등한 입장에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하는 겁니다.」 알료샤는 기쁨에 넘쳐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들과 대등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보다 더 고상하다는.......」
p.380 「(전략) 리즈, 우리 장로님께서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린애 대하듯이 해야 하고, 병원에 입원한 환자처럼 대해야 한다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알료샤의 철학이 담겨져 있다. 아이처럼, 환자처럼 대하되 그들을 내려다보는 시점이 아니라 동등한 시점에서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자의 길은 참 어려워 보인다.
2. 기타를 든 스메르쟈꼬프
드미뜨리와 이반을 찾아나서는 길에서 스메르쟈꼬프와 마리야의 대화를 엿듣는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이반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털어놓는 스메르쟈꼬프. 스메르쟈꼬프 또한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거란 예감이 든다.
3. 형제가 서로 사귀다
p.414 「(전략) 어리석을수록 더 선명해진다는 말이지. 어리석음은 간결하면서도 결코 교활할 수 없는 법이지만, 지성은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꼬리를 잘 감추지. 지성은 비열하지만, 어리석음은 솔직하고 정직하잖니. (후략)」
이반과 만나 그의 신세 한탄 겸 종교에 대한 철학을 듣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사랑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비열한 지성과 솔직한 어리석음, 어느 쪽이 더 견딜만 한가.
4. 반역
이반은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어린아이들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신과 진리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신을 믿지만 신이 만든 세상은 좋아하지 않는다. 진리라는 것을 얻기 위해 어린아이들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철저하게 지상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5. 대심문관
이반이 만들어낸 대서사시 '대심문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종교 재판을 담당하는 대심문관이 어느날 갑자기 다시 나타난 예수를 심문한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요점은 천상의 삶을 구가하는 방식으로는 지상의 삶을 무시하거나/구원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대심문관에게 입을 맞추고 사라질 뿐이다. 세계 문학사에 남을 장면이라고 하던데 챕터 전체가 유의미하기에 별도로 발췌하진 않는다.
6. 아직은 너무 불투명하다
스메르쟈꼬프는 집으로 돌아온 이반에게, 드미뜨리가 조만간 까라마조프를 죽일 것 같다며 이곳을 떠나라고 조언한다. 그에게 이런 조언을 듣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 이반은 그를 밀치고 방으로 돌아가버린다.
7. 현명한 사람과의 대화는 흥미롭다
이반은 집을 떠나고 까라마조프는 여전히 그루셴까의 방문을 기다린다. 과연 이들의 이야기는 어떤 파국으로 나아갈 것인가. 단초는 모두 준비되었다.
제6권 러시아의 수도사
1. 조시마 장로와 그의 손님들
조시마 장로의 죽음이 다가온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일생에 대해 얘기하고 알료샤는 그것을 받아 적기로 한다. 성자에 가까운 이런 인물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2. 수도 사제 고 조시마 장로의 진술을 바탕으로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가 작성한 그의 생애전
가. 조시마 장로의 젊은 친형
조시마가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된 친형 마르껠의 짧은 일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죽음 앞에서 굳은 신앙을 갖고 평온하게 죽어간 형의 모습을 평생 기억하고 성경에 심취한다.
나. 조시마 장로의 생에에서 성서의 의미에 대해서
조시마가 왜 성경에 그토록 심취하게 됐는지 얘기한다. 인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거기서 느껴지는 신성에 매료되었다고 고백한다.
다. 조시마 장로가 아직 속세에 있을 때의 청년기 회고, 결투
신앙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장교로 일하게 된 조시마. 당시의 그는 한 여인을 두고 그의 남편과 결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다시 신앙이 솟구치고 자신의 저속한 행동을 반성한다. 이런 것만 봐도 이미 수도사로서의 기질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없다.
라. 신비한 방문객
조시마가 결투에서 상대에게 용서를 구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한 남자가 그를 찾아온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한 여인을 살해한 후로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고 주장하며 어떻게 조시마가 그런 상황에서 상대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조시마에게 조언을 구한 뒤, 범죄를 고백하고 그 열병을 이기지 못해 죽는다. 그와의 만남은 조시마가 완전히 수도사로 전향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3. 조시마 장로의 대화와 설교 중에서
마. 러시아 수도사와 그의 발언
p.551 <욕구가 있으면 충족시키시오. 당신들도 귀인들이나 부자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소? 욕구 충족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증대시키시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의 교리이며, 세인들은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구 확대라는 권리는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부자에게는 <고독>과 정신적 자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질투와 살인을 낳았을 뿐입니다.
3장에서는 기독교적 사상에 기반한 조시마 장로의 설교가 등장한다. 필자 또한 기독교인이라서 그런지 와닿는 문장이 많아서 평소보다 많이 발췌했다. 욕구의 충족이 행복의 기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 주인과 종에 관한, 그리고 주인과 종이 정신적으로 서로 형제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발언
p.558 나는 그의 주인이었고 그는 나의 하인이었지만, 내가 그와 정신적인 겸허함 속에 정답게 입을 맞추었을 때 우리들 사이에는 위대한 인간적 일체감이 생긴 것입니다.
서로를 겸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관계라니 부럽다. 이런 관계일 때 인간적인 교감을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 또한 사람들을 겸허하게 대하고 그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야겠다.
사. 기도에 관하여, 사랑에 관하여, 그리고 저 세상과의 접촉에 관하여
p.562 어떤 생각을 앞에 두고, 여러분은 의혹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사람들의 죄악을 바라볼 때면 이렇게 자문하게 됩니다. <힘으로 취할 것인가, 아니면 겸허한 사랑으로 취할 것인가?> 그러면 언제나 <겸허한 사랑으로 취하겠다>고 결정하십시오. 언제나 그렇게 결정하면 온 세상이 정복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겸허함은 무서운 힘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힘들 중에서 그와 같은 힘은 존재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겸허함이 지닌 강력함을 설명한다. 어째서 겸허함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가? 희소한 것이 가치있는 것이고, 가치있는 것이 강한 것이라고 할 때에 모두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달리는 이 세상에서 겸허함만큼 희소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p.563 나의 벗들이여, 하느님께 즐거움을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어린애들처럼, 천상의 새들처럼 부디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면 인간의 죄악이 당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당신의 일을 곤경에 빠뜨려 성사되지 못하도록 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후략)
나의 죄악과 그로 인한 고통은 외부의 변화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변화로 해소된다는 구절이다. 매순간 겸허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 외부의 환경이 뭔들 중요하겠는가?
p.564 인간의 모든 죄악을 떠맡고 그 책임자가 되십시오, 벗이여, 바로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중략) 자신의 나태와 무력을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린다면 사탄의 자만심을 갖게 되어 하느님께 불평을 터뜨리는 결과가 나올 뿐입니다.
p.564 사탄의 자만심에 대해 나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상에 사는 우리들은 그것을 깨닫기 힘들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고 거기에 빠져 들기 쉬우며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멋지고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상상한다고 말입니다.
자만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오죽 힘들면 '사탄'의 자만심이라고 했을까. 자만하지 않기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매일 매순간 자기 자신을 내려놔야 한다.
아.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심판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최후의 신앙에 관하여
p.565 사람들은 절대 심판자가 될 수 없음을 특히 기억해 두십시오. (중략) 만일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당신이 마음속으로 판결해 버린 죄인의 죄를 짊어질 수 있다면 당장 그 짐을 짊어지고 그를 위해 고통받으며 질책하지 말고 그를 풀어 주도록 하십시오. (중략) 왜냐하면 죄인은 석방되더라도 당신의 심판보다도 더 가혹하게 자신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당신의 키스를 받고도 당신을 비웃으며 떠나가는 냉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 그에게 때가 오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그때가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그것을 깨닫고 괴로워하며 심판을 내리고 스스로 자신을 질책할 것이므로 진리는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십시오, 반드시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성인들의 모든 희망과 모든 신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카르마는 존재한다. 카르마를 믿어라.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하고 나아가게 한다.
p.567 만일 사람들의 악행이 당신에게 분노와 슬픔을 불러일으켜 악당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게 할지라도 무엇보다 먼저 그런 감정을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당장 자신에게서 그 고통을 찾아내십시오. 사람들의 악행에 대해 당신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중략) 만일 빛을 비춰주었는데도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될지라도 굳게 마음을 먹어야 하며, 하늘나라의 빛의 권능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지금 구원되지 않았다면 나중에 구원되리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p.567 인간이란 족속은 자신의 예언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학대하는 반면, 자신들의 박해자들을 사랑하고 자신들을 괴롭힌 사람들을 존경하는 법입니다. (중략) 결코 보상을 바라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당신은 이 지상에서 큰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그 보상이란 공명정대한 사람만이 획득하는 당신의 정신적 기쁨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복수심을 죽이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지 설명한다. 공명정대하게 살아갔을 때에 그는 자신의 양심에 당당할 수 있고 이것이 정신의 강도를 높이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즉,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체로 행복을 느껴야지, 그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p.568 권세를 가진 자도 힘센 자도 두려워하지 말고, 현명하며 언제나 의연하십시오. 일의 한계를 알며, 시기를 알고, 그 모든 것을 배우도록 하십시오. 고독 속에 머물면서 기도드리십시오. 기꺼이 대지에 엎드려 그 대지에 입을 맞추십시오. 열심히 대지에 입을 맞추면서 끝없이 사랑하십시오. 만인을, 만물을 사랑하며 사랑의 환희와 열광을 추구하십시오. 기쁨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이러한 열광을 부끄러워 마시고 오히려 소중히 여기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위대한 선물이며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조시마의 설교의 핵심을 요약한 구절이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고, 이것 외의 다른 것도 없다. 정신적으로 안정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인 것이다.
자. 지옥과 지옥 불에 관하여, 신비주의적 고찰
p.568 신부, 전도사 여러분, 나는 <지옥이란 무엇일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결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나 공간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무한한 세계 속에서 어떤 정신적 존재에게는 지상에 머물며 스스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단 한 번 부여됩니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활동적인 사랑의 순간이 한 번, 단 한 번만 부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지상의 삶이 부여되었고 그와 더불어 시간과 제한된 세월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에 겨운 존재는 소중한 선물을 거절하고 존중하지도 아끼지도 않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뿐이지만, 복에 겨운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 고립된 삶을 살다가 인생을 끝내고 만다. 그 비극에 대해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제3부
제7권 알료샤
1. 썩는 냄새
조시마 장로가 죽고, 그를 신성시한 이들이 그의 유해로 몰려든다. 하지만 기적은커녕 조시마 장로의 유해는 빠르게 부패한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그의 신성을 논하게 되고 페라뽄뜨 신부가 조시마를 모독하면서 사태가 변질된다. 가장 크게 변한 사람은 알료샤다. 알료샤는 조시마의 신성에 실망하여 암자를 떠난다.
2. 그런 순간
어째서 알료샤가 조시마의 신성에 급작스럽게 실망했는지 설명한다. 조시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깊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만큼 실망도 컸던 것. 그러나 그에게 실망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또 힘들었는지, 알료샤는 자기 자신을 망치기 위해 그루셴까에게 향한다.
3. 파 한 뿌리
그루셴까를 만나 그녀의 인생역정에 대해서 듣고, 그루셴까를 불쌍하게 여기는 알료샤.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이긴 하지만 둘은 서로를 이해한다. 그리고 그루셴까는 자신을 능욕했던 장교를 따라 도시를 떠난다. 처음부터 그루셴까가 사랑했던 사람은 그 장교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훼손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은 욕심이었겠지만.
4. 갈릴래아 가나
p.633 <(전략) 진실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은 언제나 용서하는 마음으로 충만되어 있다고 형님이 말했었어.>
그루셴까와의 만남으로 복잡한 마음이 조금 해결된 것일까? 암자로 돌아온 그는 다시 신에게 기도를 올리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그루셴까처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진짜로 암자를 떠난다.
제8권 미쨔
1. 꾸지마 삼소노프
그루셴까가 곧 떠날 것을 직감한 드미트리는 그루셴까의 주인인 삼소노프를 찾아가 그에게 자신을 어필한다. 하지만 복잡한 머릿속만큼이나 엉망진창으로 말을 해서 오히려 삼소노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만다. 그리고 삼소노프는 그를 엿먹일 생각으로 이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랴가비를 찾아가 그에게 도움을 구하라고 한다.
2. 랴가비
랴가비를 만나고 삼소노프가 자신을 농락했음을 알게 된 드미트리는 다시 그루셴까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달려간다.
3. 금광
p.665 질투심! <오셀로는 질투심이 강한 것이 아니라, 남을 잘 믿었던 것이다>라고 뿌쉬낀은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통찰 하나만 보더라도 위대한 시인의 심오하고 비범한 지혜는 입증되는 것이다.
드미트리의 순수한 성정을 표현하기 위해 오셀로를 가져온다. 드미트리는 호흘라꼬바 부인에게 돈을 빌려 그것으로 그루셴까와 함께 떠나려고 하지만, 호흘라꼬바 부인마저 그를 농락할 뿐이다. 그리고 그루셴까가 장교와 함께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불성이 되어 그녀를 뒤쫓는다.
4. 어둠 속에서
그루셴까를 찾아 충동적으로 아버지의 집에 왔다가 그리고리를 다치게 하는 (죽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드미뜨리. 왠지 이 일로 나중에 걷잡을 수 없는 누명을 쓰게 될 것 같은데...
5. 갑작스런 결심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그루셴까가 머무는 뾰뜨르에게 향하는 드미뜨리. 그에게서 총을 되찾고, 뾰뜨르의 만류로 잠시 술자리를 갖는다. 총을 죽이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자신? 그루셴까? 아니면 아버지?
6. 내가 간다!
그루셴까를 뒤쫓아 모끄로예까지 향한다. 그곳에서 그루셴까와 그의 옛 남자 무리와 조우하는 드미뜨리. 상황이 어찌 끝나려고 이러는 건가?
7. 틀림없는 옛 남자
그루셴까가 옛 남자인 폴란드 장교에게 썩 만족스럽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눈치 챈 드미뜨리는 폴란드 장교에게 돈을 주어 내쫓으려고 한다. 하지만 장교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이것을 거부하고, 그루셴까마저 이 사실을 알게 된다. 폴란드 장교에게 실망한 그루셴까는 그를 밖으로 내쫓는다.
8. 미몽
옛 남자에 대한 실망감으로 괴로워하는 그루셴까를 위로하며, 마침내 드미뜨리는 그토록 원했던 그녀의 사랑(충동적인 고백일지언정)을 받고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찰서에서 그를 표도르 까라마조프의 살인 용의자로 체포한다. 드디어 까라마조프가 죽은 것이다.
제9권 예심
1. 뻬르호찐의 출세
드미뜨리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특히 그가 호흘라꼬바 부인에게 3천 루블을 받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뾰뜨르 일리치는 호흘라꼬바 부인을 찾아간다. 그녀에게서 드미뜨리가 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진범으로 의심하며 떠나는 뾰뜨르 일리치와, 그런 그를 좋게 여기는 호흘라꼬바 부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둘의 관계가 향후 전개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예고하긴 하는데 과연 거기까지 볼 수 있을지.
2. 경보
까라마조프 살인 사건을 위해 모인 경찰서장, 검사, 예심 판사의 신상 명세를 간단하게 소개한다. 이제부터 지옥의 신문이 시작된다.
3. 연속적인 영혼의 수난, 첫번째 수난
붙잡힌 드미뜨리와 까라마조프의 소식을 듣고 주저앉은 그루셴까의 모습이 담겨 있다. 드미뜨리는 모든 것을 얘기하겠다면서 신문에 임한다.
4. 두 번째 수난
드미뜨리의 그날의 행적에 관해 묻는 검사. 드미뜨리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심지어 그루셴까에 대한 질투의 역사(ㅋㅋ)까지 얘기한다. 정말 여러가지 의미로 도스또예프스끼적인 인물이다.
5. 세 번째 수난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도통 얘기하려고 하지 않는 드미뜨리. 조사 측은 드미뜨리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한다. 신문은 점점 더 드미뜨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 한데.
6. 검사가 미쨔를 사로잡다
사람들 앞에서 탈의를 하고 극도의 수치심을 느끼는 미쨔의 묘사가 흥미롭다. 도스또예프스끼 본인이 이런 일을 당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수치심의 묘사가 생생하다. 계속해서 자신의 동선을 고백하며 결백을 주장하지만 그리고리의 발언과 어긋난다. 미쨔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리고리가 범인인 것인가? 그렇다면 왜? 드미뜨리는 결국 자신이 쓴 돈이 훔친 게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7. 미쨔의 엄청난 비밀,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어 대다
미쨔가 흥청망청 쓴 돈은 까쩨리나에게서 훔친 것이었고, 3천 루블을 다 썼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반 정도는 남겨두었다가 혹시라도 그루셴까가 자신을 선택하면 함께 도망치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한다. 이 찌질한 감정의 흐름을 정말 절묘하게 적어놔서 놀랐다. 이렇게까지 찌질하고 인간적일 수가 있나.
8. 증인들의 진술, 아귀들
미쨔의 3천 루블의 행방을 두고 많은 증인들이 초청된다. 미쨔의 말이 사실일지언정, 그동안 그가 허세에 부풀어 떠든 얘기들이 발목을 잡는다. 결국 증언들은 미쨔의 유죄를 확정하는 방향으로 모아진다.
9. 미쨔를 호송하다
그 와중에 미쨔는 이상한 희망에 부풀어 호송을 마음 편히 받아들인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저지르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모든 것을 청산하고 그루셴까와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에 마음이 들뜬다. 그동안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싶으면서도 한심해보인다.
제4부
제10권 소년들
1. 꼴랴 끄라소뜨낀
갑자기 까라마조프네 이야기에서 꼴랴라는 소년의 이야기로 초점이 바뀐다. 고집이 강하지만 똑똑한 소년인 그는, 앞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학교 친구들이 아버지를 <수세미>라고 놀린 것에 화가 나서 조그만 칼로 넓적다리를 찌른 바로 그 소년'이라고 한다. 기억이 좀 모호하지만 일류샤의 친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이제와서 꼴랴가 이야기에 등장하게 된 걸까?
2. 어린아이들
아이들과 짓궂은 나날을 보내는 꼴랴의 모습이다. 약간 골목대장 기질이 있는 활기찬 소년이라는 것만은 알겠다.
3. 학생들
그가 일류샤와 사이가 좋지 않고 그를 만나러 가려고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직까진 특기할 만한 내용은 없어 보인다.
4. 쥬츠까
일류샤를 만나러 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료샤를 만나고 싶었던 꼴랴. 그리고 잠시 후 알료샤가 기쁜 얼굴로 나타난다. 알료샤는 일류사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꼴랴는 알료샤에게 일류샤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그리고 알료샤와 함께 일류샤를 만나러 간다.
5. 일류샤의 침대 곁에서
일류샤와 만나서 그에게 삐레즈본을 쥬츠까라고 속여서 보여주는 꼴랴. 이것으로 일류샤는 조금 기운을 차리는 듯 하지만 잠깐일 뿐이다. 꼴랴의 캐릭터가 재미있는데, 자존심과 허영에 부푼 어른들의 미니미 버전 같다는 생각이 든다.
6. 조숙(早熟)
p.966 「우스꽝스럽다는 게 대체 뭔가? 사람은 종종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법이잖아? 뿐만 아니라, 요즘 재능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하는데 그 때문에 불행한 거야. 자네가 그토록 이른 나이에 그걸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난 무척 놀라울 뿐이야. (중략) 악마가 자존심 속에 침투해 들어간 거야, 모든 세대 속에 비집고 들어간 거라고. 바로 악마가 말이야.」
질나쁜 어른들에게 영향을 받은 꼴랴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알료샤의 발언이다. 똑똑하지만 자존심과 허영 때문에 자꾸만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꼴랴의 삶을 내다 보고 알료샤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만류한다. 하지만 꼴랴가 그 말을 들을 리가 없다.
7. 일류샤
마침내 의사가 일류샤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알린다. 시칠리아 섬에 가서 오랫동안 요양이라도 하지 않는 한, 즉 이 러시아의 기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일류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일류샤의 유언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과격한 아이이긴 했어도 아이에 불과했을 뿐인데.
제11권 작은형 이반 표도로비치
1. 그루셴까의 집에서
드미뜨리가 투옥된 이후, 그루셴까의 삶과 심경의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까쩨리나에게 깊은 질투를 느끼는 가운데, 드미뜨리와 이반이 뭔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와서 무슨 비밀을?
2. 아픈 다리
호흘라꼬바 부인을 찾아가 근황을 듣는다. 그녀는 라끼찐과 뾰뜨르에게 동시에 구애(?) 비슷한 것을 받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반이 리자를 찾아왔던 후로 리자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면서 걱정된다. 이반 표도로비치의 존재가 갑자기 부각되는데...
3. 작은 악마
다시 만난 리자는 알료샤의 청혼도 거절한 채, 파멸적인 삶을 원하며 망가져가고 있다. 이반과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이반을 사랑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4. 찬미가와 비밀
드미뜨리를 찾아가 얘기를 나누는 알료샤. 드미뜨리는 이반과 나눴던 이야기를 고백한다. 이반은 드미뜨리에게 돈을 줄 테니 그루셴까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라고 제안한다. 알료샤는 양심을 저버리지 말라며 그를 달랜 뒤, 형인 이반을 찾아간다.
5. 형님이 아니에요, 형님이 아니에요!
이반에게 드미뜨리의 결백을 주장하는 알료샤. 하지만 이반은 그가 드미뜨리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자신과 스메르쟈꼬프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로는) 알료샤와 형제의 연을 끊겠다고 하며 사라진다. 스메르쟈꼬프와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6. 스메르쟈꼬프와의 첫 번째 면담
아버지의 살해를 확인한 후, 스메르쟈꼬프를 찾아가 그의 의미심장했던 발언들에 대해 추궁하는 이반. 하지만 스메르쟈꼬프는 뻔뻔할 뿐이다.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이반 뿐이다.
7. 스메르쟈꼬프와의 두 번째 면담
스메르쟈꼬프가 병원에서 퇴원한 뒤, 다시 그를 찾아가 얘기를 나누는 이반. 스메르쟈꼬프는 이반이 아버지의 죽음을 원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반에 대한 스메르쟈꼬프의 충성심은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다. 그리고 이반은 드미뜨리가 까쩨리나에게 보냈던 편지를 확인한다. 그 안에는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드미뜨리의 선언이 적혀 있었다.
8. 스메르쟈꼬프와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면담
스메르쟈꼬프는 이반에게 자신이 표도르 까라마조프를 죽였음을 고백한다. 이 모든 것은 이반을 위해서이며, 이반 또한 이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주장한다. 이반은 스메르쟈꼬프를 물리치고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 집에 와보니 왠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9. 악마, 이반 표도로비치의 악몽
p.1105 「(전략) 토마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전부터 믿음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p.1115 「(전략) 왜냐하면 고통이 곧 인생이니까. 고통이 없다면 인생에서 어떤 만족을 느끼겠나? 만사가 단지 끝없는 기도 생활로 변하게 될 테니 말이야. 그건 성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따분한 일이기도 하잖아. (후략)」
p.1118 「어떤 형벌들이 있느냐고? 묻지 마. 옛날에는 이런저런 형벌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한층 더 도덕적인 것들이 시행되고 있거든. 이를테면 <양심의 가책> 같은 시시껄렁한 것들뿐이라고. (중략) 그로 인해 이익을 얻은 사람이 누군가 하면, 그들은 바로 양심이 없는 사람들뿐이지. 왜냐하면 양심이라곤 전혀 없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거든. 그 대신 양심과 명예심이 아직 남아 있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되었지.......」
이반은 악마, 아마도 자신의 내면으로 보이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신의 존재와 악의 처벌에 대해 얘기를 나누지만, 악마의 대답은 신을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이론뿐이다. 인신의 존재를 추앙하는 악마의 견해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나 <악령>의 끼릴로프와 유사하다.
10. 그건 그자가 말했어
이반은 알료샤에게 악마와 만난 것을 고하며 괴로워한다. 알료샤는 이반이 신을 외면한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라 생각해 그를 위로한다. 하지만 이반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제12권 오판
1. 운명의 날
드미뜨리의 재판이 시작되고 마을은 후끈 달아오른다. 드미뜨리에게 얽힌 여인들, 까쩨리나와 그루셴까의 대립도 흥미롭지만 변호사인 페쮸코비치의 명성 또한 유명하기 때문이다. 과연 페쮸코비치는 이 위기에서 드미뜨리를 구할 수 있을까?
2. 위험한 증인들
페쮸코비치는 검사 측에서 불러온 위험한 증인들은 도덕적인 결함으로 공격해 그들의 증언을 무효화시킨다. 혼자서 일당백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것으로 이미 유죄는 확정이 난 수준의 드미뜨리를 구제할 수 있을까?
3. 의학 감정과 한 푼뜨의 호두
까쩨리나가 불러온 모스크바의 의사가 미쨔의 상태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는 미쨔가 정상이라고 얘기하며, 과거 자신이 만났던 소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법정은 점점 더 도덕의 전쟁터로 바뀐다.
4. 행운이 미쨔에게 미소짓다
알료샤의 진술로 미쨔가 1천 5백 루블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걸로 미쨔가 3천 루블을 훔쳐 달아났을 가능성에 의구심이 생기는데...
5. 뜻밖의 사태
p.1200 까쨔는 <땅에 머리가 닿도록 절을 한> 그 순간부터 그전까지 자신을 존경하고 있던 미쨔가 돌연 자신을 경멸하게 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까쨔는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위해서 그처럼 광적인 사랑을 미쨔에게 쏟아 부었던 것이다. 그런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된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복수에 가까운 법이다.
이반이 등장해 스메르쟈꼬프의 범죄를 고백하면서 사태가 혼란스러워진다. 가장 큰 변화는 까쩨리나의 배신이다. 줄곧 미쨔의 편을 드는 것 같았던 까쩨리나는 이반의 광증에 동요되어 마침내 모든 것을 고백하고 만다. 까쩨리나가 정말로 미쨔를 사랑했는가? 그것에 대한 날카로운 고찰이 마음에 와닿아서 발췌했다. 까쨔는 그저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자신을 경멸했던 미쨔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6. 검사의 논고, 성격 묘사
p.1212 「(전략) 우리들은 주는 것은 무척 싫어하지만 받는 것은 무척 좋아합니다. 더욱이 모든 일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일단 주어 보십시오. 인생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주어 보십시오(사실,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이라야 합니다. 그보다 헐한 가격으로는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전적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놔둬 보십시오. 그때는 우리들도 훌륭하고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탐욕스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을 주어 보십시오. 많이, 많이, 되도록 더 많은 돈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얼마나 관대한 태도로 천박한 탐욕을 경멸하며, 하룻밤 한순간에 모든 돈을 탕진해 버리는가를 목격하실 것입니다. (후략)」
이뽈리뜨 검사의 걸출(?)한 논고가 시작된다. 검사가 말하는 이 방식이, 도스또예프스끼가 인간성을 시험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 느껴져 발췌했다. 모든 욕망을 채워준 뒤에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자 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태도 그 자체다.
7. 범행 경위
드미뜨리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이기까지 이르렀는지의 과정을 재구성한다. 이뽈리뜨의 이야기만 들으면 도망갈 구멍이 없어 보인다. 하지마 드미뜨리는 분명히 범인이 아닌데...
8. 스메르쟈꼬프에 대한 진술
스메르쟈꼬프를 범인이 아닌 또 다른 피해자로 입장을 바꿔 서술한다. 스메르쟈꼬프는 드미뜨리에게 휘둘렸을 뿐이고, 그가 범인이라면 드미뜨리에게 3천 루블의 위치와 그루셴까의 신호를 알려주지도 않았으리란 것이다.
9. 전속력의 심리 분석, 달리는 삼두마차, 검사 논고의 결론
p.1244 「(전략) 사실, 그루셴까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자신을 위해 <옛 남자>를 거절하고 미쨔에게 새로운 생활을 제안하여 자신의 행복을 약속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까라마조프가 어떤 고초와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그에게 그것은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고,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후략)」
그토록 원했던 그루셴까의 사랑을 얻은 그 순간, 오히려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상황에 처하는 모순이 흥미롭다.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을 때에 찾아온 희망이란 이토록 잔인하다.
10. 변호사의 변론, 양날 도끼
p.1264 「(전략) 배심원 여러분, 내가 지금 심리 분석을 해본 것은 인간의 심리란 마음대로 자유로이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루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심리라는 것은 가장 성실한 사람마저도 부지불식간에 소설가로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나는 심리 분석의 악용과 남용을 감히 경고하는 바입니다.」
페쮸코비치는 이뽈리뜨가 사용한 심리 분석을 역으로 이용해서 드미뜨리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다시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절대 뒤집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이뽈리뜨의 논고를 차분히 뒤집어가는 현장이 흥미진진하다.
11. 돈은 없었다, 강탈 행위도 없었다
페쮸코비치는 드미뜨리가 아버지의 살해를 예고하는 편지를 쓴 것은 맞지만 정말로 아버지를 죽였는지를 확정하는 증거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드미뜨리가 아버지를 죽인 게 아니기 때문에 페쮸코비치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12. 그렇다, 살인도 없었다
계속해서 변론을 이어가는데, 페쮸코비치 또한 이뽈리뜨와 사실 크게 다를 바 없는(?) 감정적인 호소로 피고의 유죄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유죄를 확정할 증거가 없다는 것만이 페쮸코비치가 가진 유일한 무기다.
13. 사상의 간통자
p.1298 「(전략) 여러분들은 러시아의 재판이 단순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파멸된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는 법률과 형벌이 존재할 뿐이라면, 우리들에게는 영혼과 사상이, 파멸한 인간의 구원과 부활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후략)」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죄인들을 향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시선이 느껴진다. 정확히는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오해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벌은 사람들의 인생을 완전히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
14. 농부들이 고집을 부리다
페쮸코비치의 변론으로 유리하게 되어가는가 싶었지만, 결국 드미뜨리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하지만 너무 많은 심증과 증언이 있었다. 드미뜨리는 이것으로 만족할까?
에필로그
1. 미쨔의 구출 계획
드미뜨리를 구출하기 위해 까쨔와 논의를 하는 알료샤. 까쨔는 드미뜨리를 구출하는 것에 동조하려고 하면서도 그를 만나는 것은 두려워한다. 하지만 알료샤의 부탁으로 미쨔를 만나러 가기로 하는데...
2. 거짓이 순식간에 진실이 되다
한편, 드미뜨리는 유죄 판결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죄를 감당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까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그것을 들은 까쨔 역시 (순간이나마) 드미뜨리에 대한 마음을 고백한다. 그 광경을 그루셴까가 목격하면서 다시 난장판이 되는 듯 하지만, 알료샤는 모든 욕망을 뒤로한 채 일류샤의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3. 일류샤의 장례식, 바위 앞에서의 조사(弔詞)
p.1344 「(전략) 그 가엾은 소년에게 사람의 손길을 뻗었을 때 가질 수 있었던 아름답고 선한 감정 덕분에 우리는 한결 더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요. (후략)」
p.1345 「(전략) 설령 그런 악한이 된다고 하더라도, 가장 냉소적이고 잔인한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일류샤를 묻어 준 일과, 그가 죽기 전에 베풀었던 사랑과, 이렇게 큰 바위 옆에서 우의를 나누던 일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이 순간만은 착하고 훌륭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서는 비웃지 못할 겁니다. (후략)」
결국 죽음을 맞이한 일류샤의 장례식장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부모를 만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일류샤와의 만남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이별을 고한다. 이제 알료샤는 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도시로 떠날 것이다.
역자 해설 : 욕망과 증오의 까라마조프 제국
p.1349 도스또예프끼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속에서 그가 병적일 만큼 중요하고 절박하게 여겼던 문제들, 즉 사회의 정신적 발전과 인간의 이데올로기적 도덕적 발전 문제에 최종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p.1361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런 아름답고 긍정적 인물 형상의 창조를 통하여 증오·탐욕·욕정의 방종이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통해서 그간의 주제를 통합하고 있다는 해설이다. 니힐리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고, 신앙은 우리를 긍정적인 인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p.1353 분명히 도스또예프스끼는 문제 해결을 위해 제재(題材)를 깔끔하고 질서 정연하게 배열하기보다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개별적인 장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취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적 결점으로 치부되던 이런 특징은 오늘날 다면적(多面的) 구성으로 설명되면서 도스또예프스끼를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게 만든다.
p.1356 독자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는 사건 중심의, 그것도 충격적인 살인 사건 중심의 소재 선택은 도스또예프스끼가 당대 비판적 리얼리즘의 전통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러시아의 비판적 리얼리즘은 플롯의 복잡한 구성을 피하면서 다양한 인물 형상을 창조하여 그 무미건조함 속에 작가의 사상을 진지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법이 당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고, 어떤 점에서 일탈적이었으며, 현대에는 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해설이다. 나중에 톨스토이를 읽게 되면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품 평론 : 대심문관 ㅡ 신인(神人)과 인신(人神)
p.1366 인간 정신의 자유는 인간의 행복과 양립하지 못한다. 자유는 귀족적인 것이며, 선택된 소수를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힘에 겨운 자유의 짐을 지웠으며 마치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듯이 행동한 것을 비난한다.
p.1369 무신론적·유물론적 사회주의에 있어 이러한 비극적 자유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강제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조직화에서 인류의 자기 실현과 구제를 기대한다. 자유를 정복하고 행복, 배부름 그리고 평안함의 이름으로 삶의 비합리적 근원을 말살시키고 싶어한다. 인간은 <자유를 포기하고 복종할 때에만 자유를 누리게>(p.454)된다.
p.1375 (하지만) 평등은 전제주의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사회가 평등을 지향할 때에 전제주의에 이르게 됨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평등에의 지향, 평등한 포만에의 지향은 가장 큰 불평등, 다수에 대한 소수의 폭군적 통치로 분명히 이르게 될 것이다.
p.1385 그리스도의 자유는 지상 권력에의 요구를 거부할 때만이 가능해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중 하나인 대심문관 장면을 요약한다. 대심문관은 높은 정신적인 고행을 감행해야만 가능한 정신적/신앙적인 자유를 비판하고, 그러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세상으로 사회주의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물론 이것에 대해 도스또예프스끼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런 식의 평등은 결국 그보다 더 심화된 불평등 ㅡ 소수의 폭군적 통치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