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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018. 죄와 벌

by 쿠데 2020. 6. 14.

죄와 벌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001 / 002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시작

 

 드디어 <죄와 벌>까지 왔다.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읽어 왔고, 그의 작품이 무르익기 시작한 중후반부에 도착했다. 그 첫 시작으로 <죄와 벌>을 다시 읽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을 때와 전작들을 읽고 다시 접하는 지금의 감상이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날지 궁금하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명작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지난 반년간의 독서는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은 반년도 도스또예프스끼의 세계에 더 깊게 잠수해보고 싶다.

 

 감상

 

 내가 <죄와 벌>에서 초점을 두고 보고 싶은 부분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존심과 양심의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에필로그의 부족한 서사다. 이를 위해 라스꼴리니꼬프가 범죄를 저지른 이유(자존심)와 고통받는 이유(양심)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그의 대척점에 있는 두냐와 소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관점을 기반으로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에필로그에 대해서 나름의 항변을 해보고자 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우선 알료냐를 죽이기 전까지의 사건을 다룬 도입부. 전에는 몰랐지만 라스꼴리니꼬프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화자와 비슷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신의 존재 양식을 긍정하려고 하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지하의 화자는 자신의 존재 양식을 긍정하기 위해 부르주아를 비판하는 반면, 라스꼴리니꼬프는 하층민들을 경멸하며 그들과 자신의 차이를 찾아내기 위해 분투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살인'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사고는 언뜻 우생학과 비슷한 논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이상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골을 메우기 위한 시도의 결과로 보인다. 지금의 자신은 저 경멸스러운 하층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정신적인 위대함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은 정신적 자위 행위에 가깝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자신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일련의 과정이 바로 그가 받는 '벌'이 된다. 이 부분은 <죽음의 집의 기록>을 함께 읽으면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우생학적인 태도는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 타발적(他發的)인 것에 가깝다. 그의 존재를 꿰뚫는 핵심 한 가지를 얘기하라면 아마도 '무력감'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을 포함한) 약자들이 아무런 당위도 없는 상황에서 휘둘리고 상처입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이유도 없이 사람들에게 맞아죽은 암말이나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두냐나 이복 누이에게 일방적으로 부려먹히는 알료냐까지. 그의 주변은 이런 불합리에 휘둘려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해 그가 분노한다고 한들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가난하며 힘없는 대학생일 뿐이다. 라주미힌처럼 꿋꿋이 노력하면 그도 언젠가 먹고 살만한 수준에 이를지도 모르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푼돈(p.83)이 아닌 한 밑천(p.50)이다. 이것은 단지 가난해서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 무자비한 세상으로부터 그의 인간적인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켜줄 만한 돈, 즉 부르주아가 될 정도의 재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굶은 배를 채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곪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는 육체적 생존을 넘어서 정신적 생존이 가능한 '한 밑천'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돈은 이 사회에서 소수의 부르주아에게만 주어지며, 그가 한 평생 공부를 하고 꾸준히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아주 쉽게 허무주의자로 타락한다. 극도의 무력감과 드높은 자존심의 조합은 허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정신적 생존에 위협을 느낀 그는 일종의 정당방위로서 살인을 저지른다. 노파는 약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노예이며 그를 단죄하는 것은 이 불합리한 세상을 단죄하는 일이 된다. 우연의 연속으로 살인을 저지르기에 딱 좋은 환경이 갖춰지는 걸 보면 마치 세상 모두가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를 응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고뇌와 망상을 그리는 부분이 정말 압권이다. 재독을 하니 그의 혼란스러운 심정이 훨씬 입체적으로 와닿아서 좋았다.

 

 그래서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는 정당하다는 뜻인가? 당연히 정당하지 않다. 그의 사고 방식이 왜 옳지 않은지는 그가 쓴 논문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p.376부터 시작된 라스꼴리니꼬프의 논문에 대한 해설을 보면 그는 '보수적이고 체면을 차리는 대중'과 '진보를 위해 기꺼이 피를 보는 파괴자'들을 분리하여 인류를 인식한다. 어떤 사상이나 신념을 구축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피를 봐야하는 일이 생길 수 있으며, 파괴자 유형에 속하는 이들만이 이것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사례로 지금까지 역사에 남은 위대한 승리자들은 모두 살인자였으며, 세대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사람들도 그들의 활약상을 경배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파괴가 진보를 부른다는 개념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만, 라스꼴리니꼬프의 말하는 '진보'라는 것은 결국 결과론적인 개념이다. 진보라는 건 명확한 가치로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성공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에 사후에 붙는 라벨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를 보기 이전에 그 사상이 진보라는 보장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즉, 진보의 여부는 모든 결과가 나온 다음에나 판명할 수 있는 문제다. (사실 판명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진보란 해석의 영역을 포함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겐 진보인 것이 누구에겐 진보가 아닐 수도 있다.) 결과에서 원인을 도출하고 그것을 공식화한 시점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바로 뽀르삐리이다.

 

 뽀르삐리는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구분이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물론 이에 대한 라스꼴리니꼬프의 대답은 역시나 결과론적이다. 애초에 평범한 사람은 그런 일을 저지를 수도 감당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일단 살인을 저지를 수만 있다면 비범성을 증명한 게 되는 셈이다. 그가 살인에 대한 생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바로 그것이다. 일단 한 번 저지르기만 하면, 꾹 참고 한 번 도끼를 들기만 하면......

 

 그리고 마침내 그는 노파를 죽이는 것에 성공한다. 과연, 그 결과 그는 '비범한' 존재가 되었을까? 물론 비범한 존재가 되기는 하였다. 다만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비범함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왜 고통스러워하는가?

 

 부조리한 세상의 두개골을 쪼갠 순간 라스꼴리니꼬프는 그토록 바라던 비범의 세계로 넘어간다. 하지만 그 세계는 한 차원 더 높은 곳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나머지 모든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자폐적인 세계였다. 세계를 죽인 그의 앞에 남은 것은 자기 자신과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기 자신뿐이었다.

 

 미쳐가는 라스꼴리니꼬프는 미치지 않은 라스꼴리니꼬프에 의해 계속 감시를 당한다. 이런 두 자아의 충돌은 그의 행동에 무수히 많은 변곡점을 만든다. 공포에 벌벌 떨다가도 갑자기 대담해져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렇게 요동치는 그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추리 소설 같은 도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이야기의 전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우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복잡한 심상을 따라가는 것 또한 독자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추리 과제다.

 

 아무튼, 끝없는 자기 감시 하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고통을 겪는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경찰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듯 싶다가도 미처 경찰서에 가지 못하고 동네를 빙빙 돌다가 마차 사고를 당한 마르멜라도프를 돕기도 한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그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가 구원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는 일시적이며 자기기만적인 효과만을 가진다. 이미 그의 세계에는 그 자신말고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가 내뱉는 모든 말은 철창에 부딪쳐 다시 튕겨 나온다. 심지어 그 자신마저도 그를 외면한다. 그렇게 그는 양심의 감옥에 수감되어 버린다.

 

 범죄자를 사랑하고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까?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그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그 사실은 라스꼴리니꼬프 그 자신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독을 견뎌내는 것이 비범한 자들의 자격이라고 굳게 믿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는 고립을 견뎌내지 못하고 서서히 미쳐간다.

 

 그러나 여기서 라스꼴리니꼬프가 느끼는 고립은 단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 단절된 것에서 느끼는 고립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가 느끼는 소외감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에서 기인한다. 비범한 자신(=이상)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결과 그는 더욱 평범한 자신(=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괴리가 깊어질 수록 그의 정신적 생명은 더욱 큰 위협을 받는다. 자신의 무력함을 부정하기 위해 저지른 행위가 오히려 더 큰 무력감을 부른 것이다. 발버둥이 더 큰 발버둥을 부를 때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이런 결과가 나온 것만 보아도 라스꼴리니꼬프의 선택은 분명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것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이 일련의 살인 행각은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있어서 일종의 정당 방위와도 같다. 그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보복과 자신의 정신적 생존을 위해 노파를 죽였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론 허무주의에서 탈피할 수 없다는 게 밝혀진 지금, 우리는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그리고 허무주의에 맞서 싸우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선 우선 허무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허무주의는 어디에서 출발하는 걸까? 그것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려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노력하고 실패할 바에는 아예 노력을 그만두는 것이 허무주의의 핵심이다. 노력하고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지만 애초에 노력하지 않으면 자존심은 지킬 수 있다. 즉, 허무주의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재이다. 여기서 자존심이라는 것의 의미를 축소해서 보면 안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에필로그를 위한 항변에서 다시 상술하겠다. 

 

 허무주의를 자존심의 방어 기재로 규정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단순해진다. 다른 방어 기재를 가져와 허무주의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면 된다. 나는 이 방어 기재가 바로 '자긍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긍심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라스꼴리니꼬프의 동생인 두냐다.

 

 허무주의의 해독제 1 : 자긍심

 

 두냐는 어떤 모진 굴욕과 불합리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을 지키는 인물이다. 그녀의 성품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기품'이다. 그녀는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이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 못지 않게 강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그 아내의 모함에도 허투루 입을 열지 않고 마지막까지 버텨낸 일화만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잠깐 루쥔과 혼인하여 고통스러운 삶에서 헤어날 꿈을 꾸기는 하지만, 그가 잘못된 인간이라는 걸 알자마자 거침없이 그를 내쫓는다. 자긍심이 없는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p.445

「뾰뜨르 뻬뜨로비치, 어서 나가세요!」

그녀는 화가 나서 창백해진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뾰뜨르 뻬뜨로비치는 이런 결말이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힘 그리고 자신의 희생자들이 처한 오갈 데 없는 상황에

지나치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 장면에서 두냐가 보여준 의지를 100% 그녀의 순수한 의지라고 보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3천 루블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 진행된 장면이니까. 하지만 이 장면이 나오기 전에도 두냐는 '뾰뜨르가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주저 없이 버리겠다'는 말을 반복해왔다. 그 의지의 산물이라고 믿고 싶은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두냐는 자본이나 지위, 그리고 재물보다도 강력한 것, 바로 '긍지'의 힘을 증명한다. 재물과 명예와 명성만이 전부인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반짝이는 유리 구두가 아닌 맨발로도 온전히 설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존재의 자유를 보장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아무것도 없어도 좋다. 그것이 나를 휘두르지 못한다. 두냐의 자긍심은 아무것도 없음에서 비롯된다. 허무주의는 자긍심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한다.

 

 자긍심이란 스스로 완성된 인간만이 발휘할 수 있는 미덕이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닌, 자기 내면의 기준을 확실히 세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힘이다. 기품은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좋은 환경이 갖춰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 만들어진 기품도 존재하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며 만들어낸 기품도 존재한다. 후자는 후자만의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며 이것은 전자의 기품이 포섭할 수 없는 영역을 가진다. 후자는 후자대로 위대한 영역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긍심이라는 걸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두냐는 기질적으로 기품을 갖춘 존재로 묘사된다. 그녀는 낡은 옷을 정갈하게 챙겨입을 줄 아는 사람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기질을 생각했을 때 그가 갑자기 두냐와 같은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라스꼴리니꼬프와 같은 운명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은 없는 걸까? 그 대답은 소냐에게서 찾을 수 있다.

 

 허무주의의 해독제 2 : 동정심

 

 두냐가 자긍심의 상징이라면 소냐는 동정심의 상징이다. 이 두가지야말로 허무주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마찬가지로 소냐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욱 비참하다.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미쳐가고, 동생들은 길바닥에 나앉을 운명이며 자신은 이미 몸을 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냐는 자기보다 아픈 자들을 동정하고 꿋꿋하게 살아간다. 아마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소냐는 미스터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살아갈 수 있는가.

 

 소냐의 꿋꿋함은 그녀의 신앙으로부터 비롯된다. 모든 낮은 자의 곁에 머무는 신의 존재를 믿고 그녀는 굳건히 버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들(까쩨리나와 라스꼴리니꼬프 같은 이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풂으로서 신의 형상을 닮고자 노력한다. 단지 그녀가 착하거나 신앙심이 깊기 때문이 아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정신적 생존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던 것처럼 그녀 또한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세계 속에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이타성으로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녀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p.617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속죄하세요. 그래야만 해요.」

「아니! 난 놈들에게 가지 않을 거야, 소냐.」

「그럼, 어떻게,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무엇에 의지해서 살려고요?」

소냐는 외쳤다.

「이제 와서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어머니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리고 나는요! 당신은 벌써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버렸어요.

그래요, 벌써 버렸어요. 버렸어요. 오, 하느님!」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벌써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떠나서 살겠다는 거지요?

이제 당신은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를 신앙으로의 귀의로 규정지을 필요는 없다. 허무주의에 대항한다는 것은 결국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신앙은 그것을 가능케하는 기재로서 존재한다. 기독교 신앙은 결국 가장 낮은 자의 곁에 머무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감사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기재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기재를 사용하느냐가 아니라 허무주의에 지지 않을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타인을 향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적으로는 자긍심을, 외적으로는 동정심을 갖춘 자야말로 이 이기적이고 난폭한 세상에서 진정 비범한 자이다.

 

 에필로그를 위한 항변

 

 아무튼, 라스꼴리니꼬프의 행운은 계속 된다. 그는 쉽사리 사회의 망에 걸리지 않는다. 마치 세상이 그를 돕는 듯하다. 세상 전체가 그의 육체적 자유를 허락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정신적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 스스로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위기의 순간마다 기적적으로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사일생을 할 때마다 그의 압박감은 커져가는 듯하다. 그는 위기의 순간을 넘으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죄를 저질렀음을 고백하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가 된다. 그의 패배는 이미 결정된 듯하다.

 

 후반부의 핵심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폐적인 정신 세계 속에 갇혀서 끝없이 고통스러워하던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침내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왜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에게 죄를 고백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명쾌하게 느껴진다. 그는 무력한 자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소냐는 자기 이상으로 무력한 상황에 놓인 약자다. 그녀로부터 자신의 살인이 합당한 것이었다고 인정을 받으면 그 또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처럼 타인을 해하여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순순히 희생자이기를 계속 자처하는 그녀에게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침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것에 대한 소냐의 반응은 두려움도 기피도 아닌 사랑이다.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마음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보듬는다.

 

 소냐에게 죄를 고백하는 이 장면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 중 하나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와 리자베따를 죽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그를 놓지 않겠다며 결의를 다지는 소냐의 모습은 스펙터클 그 자체다. 그러나 이것을 소냐를 신성한 존재로 추앙하는 해석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반대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라스꼴리니꼬프를 보듬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소냐에게 있어 동정이란 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한 방어 기재 같은 것이다. 그녀는 허무주의의 위험성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타자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는다. 설령 그 결과 타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만약 그랬다면 에필로그에서 라스꼴리니꼬프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감옥 수발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알아주면 기쁜 것이지만, 알아주지 않아도 그녀는 끝까지 사랑을 보낼 인물이다. 타자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온전히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결말을 생각하면, 그녀가 왜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했는지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소냐가 필요하듯 소냐에게도 라스꼴리니꼬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냐의 동정이 조금 기이할 정도로 신성해보이는 이유는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자존심과 양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위에서 길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라스꼴리니꼬프가 범죄를 저지른 이유를 한 줄로 표현하자면 결국 그는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이다. '고작' 자존심 때문에 사람을 죽이다니. 거창한 이유도 아닌 그깟 자존심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정말 '고작'일까? 자존심이라는 건 얼마든지 짓밟혀도 되는 종류의 감정인 것일까? 자존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 자존심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를 존경하는 마음'이다. 이 기본소에만 집중하면 그 어디에도 고작, 기껏, 그래봤자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언젠가부터 자존심을 매우 하찮은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존심이라는 단어에 붙은 온갖 사회적인 함의를 잠시 떼어놓고 생각해보자. 자존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생명이다. 수십억 명의 인구가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언제 인파에 휘말려 사라질지 모르는 사회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힘. 그것이 바로 자존심이다.

 

 사람은 단지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각자에게 주어진 존엄성이 있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한다. 그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며 자존심이란 인간다운 삶의 최소 조건인 셈이다. 자존심마저 전부 내어준 인간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가지지 못한다. 생명 활동만 유지되는 육체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즉,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자존심은 반드시 필요하다. 밥을 먹어야만 생명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자존심이 있어야만 우리는 정신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

 

 당시 러시아 사회는 자본주의의 파급력이 막 세계를 덮치던 시점이었다. 빈부격차라는 것이 생겨나고, 계층 간의 정서적/지적 격차가 벌어지던 시기이다. 단지 가난하다는 사실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과의 격차가 가져오는 낙폭이 빈곤한 사람들의 자존심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던 시기였다.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육체적인 빈곤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빈곤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던 시기였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저항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정신적인 빈곤이다. 그에게 있어 자존심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였다. 소냐가 라스꼴리니꼬프를 보듬기로 결정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덮어놓고 자존심 때문에 사람을 죽인 미친놈이라고 그를 비난하면 이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없다.

 

 마지막에 이르러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로소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유형수 생활을 시작한다. 지금부터는 이 에필로그의 전개에 대한 항변을 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호에 속하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불호인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그토록 강력하게 끌고 왔던 라스꼴리니꼬프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소냐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끝나는 것이 가볍게 느껴지기는 한다. 좀 더 많은 분량과 설명이 필요했던 부분이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성급해보이는 도약엔 '양심'의 위력에 대한 저자의 믿음이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라스꼴리니꼬프가 자백을 하게 된 이유는 양심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패배를 인정하며 감옥으로 들어간다. 이때 양심에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회개를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때 그의 태도는 체념에 가깝다. 더는 자신의 정신이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저항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회개가 아닌 패배의 결과였기 때문인지 몰라도 유형수 생활 내내 그는 퉁명스러운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특히 소냐에게 그러하다.

 

 그러나 단 하나의 사건, 소냐가 아파서 잠시 오지 못했던 그 사건을 계기로 라스꼴리니꼬프는 변한다. 뒤늦게 그녀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전까지 어떤 기미도 없었던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녀의 부재에 각성하고 마는 장면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우리가 알던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런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이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누적된 행위의 결과이다. 그 누적의 과정이 면밀하게 묘사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 결말은 예견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결말은 라스꼴리니꼬프를 위한 것이 아닌 소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점을 라스꼴리니꼬프가 아닌 소냐에게 맞춰보자.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존심과 양심에 휘둘리는 존재이지만, 소냐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녀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모진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눈을 뜬 순간 그곳에 있기를 자처한다. 라스꼴리니꼬프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소냐는 시종일관 해낸다.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라스꼴리니꼬프의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감정이 뒤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소냐에게 초점을 맞추면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누가 소냐처럼 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즉, 이 결말의 핵심은 라스꼴리니꼬프의 회개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소냐의 사랑과 인내다. 소냐라고 힘들지 않았을까? 소냐가 라스꼴리니꼬프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행위일까? 아니다. 그녀에게도 이 길은 고난이었을 것이다. 작품에는 생략되어 있는 소냐의 마음과 그녀의 생활을 상상해보자. 험난한 유형 생활과 마음을 열지 않는 라스꼴리니꼬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자신. 그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그녀는 사랑을 보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허무주의에 눌려 죽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것이다.

 

 상처받은 자존심과 오갈 데 없는 양심을 치료하는 것,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자존심을 모두 내주고 양심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 소냐는 그것을 해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작가가 당시에 만연하고 있었던 허무주의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낳은 묵직한 아픔들을 허무주의의 늪에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공감과 사랑으로 부단히 꼬아 만든 노끈이 필요하다. 그렇게 주위에 편재하는 아픔들을 건져올릴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자본주의 사회의 이기적이고 불합리한 횡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대로 자살하거나 영원히 회개하지 못하는 결말이었다면 이 작품은 허무주의를 지지하는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극적으로 회개할 게 아니라 그런 기미를 보여주면서 끝내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기분도 들지만, 그만큼 작가는 이 주제에 대해 강력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항상 같다. 사랑, 사랑만이 이 부조리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아있는 것은 끔찍한 죄도 뼈아픈 형벌도 아닌 사랑이었다.

 

  문장

「삶요! 당신이 선지자라도 됩니까?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더 찾고 발견하십시오. 어쩌면 하느님이 이 일을 위해 당신을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것도 영원한 건 아닐 테고요, 그 쇠사슬 말입니다.......」
p.676

 하나의 문장을 가져가야 한다면 이걸 가져가고 싶다. 책 전체를 가져가고 싶지만, 절망적인 순간에 떠올릴 하나의 문구라면 이걸 가져가고 싶다. 허무주의에 빠지고 싶어질 때 무지를 기억할 수 있었으면. 그리고 긍지를 가지고 세상을 동정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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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벌

 

 제1부

 

 1

 

p.11 그는 다행히도 계단에서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라는 부사 하나로 문장 전체에 서스펜스를 덧입혔다. 이 대작의 초두에 걸맞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p.11 그는 본래 겁이 많도 소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그의 성격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긴장과 초조 상태에 있는 우울증 환자처럼,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여주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만나기를 꺼릴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가난에 찌들어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절박한 사정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과 같은 맥락을 가진 인물이다. 이전작들을 읽고 다시 읽으니 그가 왜 이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p.12 <음..... 그래......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다. 다만 겁이 나서 사람들은 모든 일을 망치는 것이다....... 이건 명제와 다름없지.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한 걸음, 자신의 새로운 말, 이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후략)>


 첫걸음이 가장 어렵다는 말 자체는 일반적으로도 통용될 만한 고찰이지만, 그 첫걸음이 살인으로 향하는 첫걸음일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2

 

p.24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하고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그는, 막상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건네 오자, 마음이 초조하고 불쾌해졌다. 이런 혐오감은 낯선 인물이 그의 개성을 건드리거나, 건드리려고 할 때 그가 늘 품게 되는 감정이었다.


  자신만의 경계가 너무나 뚜렷하고 타인이 그것에 들어오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매우 오만하고 외로운 성격의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p.26 「(전략) 제가 묻지요, 그가 무엇 때문에 꿔주겠습니까? 그는 내가 갚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동정 때문이라고요? 그렇지만 새로운 사상을 좇고 있는 레베쟈뜨니꼬프 씨는 동정이 우리 시대에 과학으로도 금지되어 있고, 정치경제학이 발달한 영국에서조차도 그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가 왜 꿔주겠습니까? (후략)」


 전작인
<악어 외>의 단편 중에서도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를 읽으면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경위가 더욱 명료하게 보인다. 동정조차 과학으로 금지되어있다, 이것이 아마 이 작품에서도 핵심적인 테마가 될 것이다.

 

 3

 

p.59 「(전략) 자기는 아직 두냐를 알기 전부터, 정직하지만 지참금이 없고, 또 반드시 곤궁함을 겪은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고 하더구나. 」


 와중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에, 동생인 두냐가 뾰뜨르라는 탐욕스러운 남자와 약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말만 봐도 뾰뜨르가 어떤 의도로 두냐를 탐낸 것인지 알 수 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분노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4

 

p.71 <(전략) 그리고 어머니, 난 당신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싶지 않아요!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없어! 내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일은 없다고?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넌 무슨 일을 할 거지? (후략)>


 두냐가 뾰뜨르와 결혼하려는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임을 알고 있는 라스꼴리니꼬프는 분노한다. 하지만 그에겐 그 분노에 동력을 싣을 힘이 없다. 정당한 분노가 돈의 부재 앞에서 유야무야되는 것에 라스꼴리니꼬프는 좌절한다.

 

p.81 이 청년(라주미힌)은 보기 드물게 쾌활하고 사교적이며, 단순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이 단순함 뒤에는 깊이와 품위가 숨겨져 있었다.

p.82 라주미힌은 그 어떠한 실패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 어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훌륭했다. 그는 지붕만 얹혀 있는 집에서도 살 수 있었고, 지옥 같은 굶주림과 혹한도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는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여러 가지 일로 돈벌이를 해서 다부지게 혼자 힘으로 생활했다. 그에겐 퍼 올릴 수 있는 샘물, 즉 돈벌이의 방법이 무궁무진했다. 어느 겨울 내내 그는 불 한번 때지 못하고 지낸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그는 추우면 잠이 더 잘 오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나마 라스꼴리니꼬프의 곁에 있는 사람 중에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라주미힌 정도다. 그는 힘든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어서려는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이 하나라도 그의 곁에 있다는 게 다행이다.

 

  5

 

p.83 <(전략) 그 푼돈으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이 그것이란 말인가?>


 라스꼴리니꼬프의 좌절감으로 가득 채워진 한 챕터이다. 지금의 그가 발버둥쳐서 벌 수 있는 돈으로는 두냐를 지킬 수 없다. 그렇다고 친구인 라주미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무력한 상황 속에서 그는 무기력해져간다. 이후 등장하는 암말의 일화는, 그의 좌절감이 얼마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서도 비슷한 모티브의 이야기를 읽었었는데 이 둘을 비교해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성별에 따른 좌절감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저항하는 방식의 차이도 있을 테니까.

 

 6

 

p.99 리자베따는 노파의 배다른 동생으로 (중략) 그녀는 집에서 언니를 위해 밤낮으로 일하며 요리와 세탁을 도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노파의 허락이 없이는 어떤 주문이나 일거리도 감히 맡을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또 노파는 이미 유언장을 작성해 놓았고, 그 유언장에 따르면 리자베따는 가재도구나 의자 같은 것들 외에는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으며, 리자베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어째서 노파를 죽이려고 했는가에 대한 힌트들이다. 뾰뜨르, 암말을 죽인 사람들, 노파. 모두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온전한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해 라스꼴리니꼬프는 깊은 아픔을 느끼고 있다.

 

p.100 「(전략) 그래서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도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p.101 「내 생각에는 만일 네 자신이 그 일을 결행할 마음을 먹지 못한다면, 거기엔 어떤 정의도 있을 수 없어! 자, 또 한판 내기 당구나 치자고!」


 그런 사악한 가해자들을 죽이고, 그들로부터 취한 이득을 세상에 나눠주는 것이 더 올바른 일 아닐까? 의적의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것이 라스꼴리니꼬프를 추동한다. 무기력한 사람에게 폭력은 폭력이 아닌 생존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p.108 그러므로 단번에 만사를 결정지어 버린, 마지막 날에 그는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아 반발한 여지도 없이 맹목적으로, 반항도 하지 못하게 초자연적인 힘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것마나 같았다. 그것은 마치 옷자락 끝이 바퀴에 휘말려서, 그도 함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 형국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저지른 범죄 행위의 추동력이 철저한 계획와 차가운 이성이 아닌, 불완전한 확신과 계속된 우연의 일치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은 특별한 게 없을지도 모른다.

 

p.108 <왜 거의 모든 범죄들이 그렇게 쉽게 발견되고 폭로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거의 모든 범죄자들의 흔적이 그토록 뚜렷이 남게 되는 것일까?>

p.108 제일 중요한 원인은 (중략) 바로 범죄자 자신에게 있었다. 범죄자 자신이 거의 예외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즉 이성과 조심성이 제일 필요한 그 순간에 이성이나 의지를 상실하게 되고,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이상한 경솔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의 확신에 따르면, 이런 이성의 혼미 현상과 의지의 상실 현상은 병처럼 사람을 지배하게 되고, 점차로 강해져서 범죄를 실행하기 직전에 최고조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p.109 이런 결론에 도달한 그는 자신만큼은 이번 일에서 그런 병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단정했다. 이성과 의지는 계획한 일을 실행하는 동안 계속 사라지지 않고 그에게 남아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의 계획이 <범죄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p.109 <일을 행할 때 의지와 이성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일의 모든 상세한 점들에 대해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익히게 되면, 모든 곤란한 부분들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극복될 것이다.......>


 범죄를 결심하고 저지르기 직전까지 인간의 마음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묘사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성이 아닌 광기에 휘둘리는 이 상태를,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도 죄수들을 묘사할 때 사용한 바가 있다. 범죄의 영역에 도달하는 인간은 어린아이처럼 무절제한 상태가 되는 것인가.

 

 7

 

p.114 그녀의 눈동자에서 어떤 조롱의 빛 같은 것이 번뜩이자, 그는 그녀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을 계획하고 있으면서 노파의 시선에 주눅이 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살인을 저지르기 직전의 인간이 가장 나약한 상태인 건 아닐까?

 

 제2부

 

  1

 

p.150 라스꼴리니꼬프는 갑자기 그들 모두에게 뭔가 유쾌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p.153 그의 마음속에는 예전에 미처 몰랐고, 또 이제껏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무언가 낯설고 새롭고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다. (중략) 조금 전과 같은 감상적인 심경의 토로는 물론이고, 이제 어떤 말이든 더 이상은 경찰서의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는 뚜렷이 느꼈다.

p.154 이것은 그가 여태껏 인생에서 겪어 본 온갖 종류의 감각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괴로운 감각이었다.

p.154 이상한 생각이 갑작스럽게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 일어나서 니꼬짐 포미치에게 다가가 어제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그다음 함께 아파트로 가서 그들에게 구석의 구멍 속에 있는 물건들을 보여 주자는 생각이었다. 이 충동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는 그 일을 실행하려고 벌써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했다.


 살인을 저지른 이후, 자신이 아직 이쪽 세계(정상 사회)에 속해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찔러 보았다가 실망하고 고통을 겪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충동적인 범죄였기에 더욱 현실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2

 

p.163 한 가지 극복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마주치는 모든 것,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끊임없는, 거의 생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혐오감이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을 외부로 돌리고 싶어하는 심리가 표현되어있다. 문제가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을 때에 사람은 책임을 외부로 돌리고 싶어한다. 살인자라고 해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p.169 예전과 똑같은 장소에 멈춰 섰다는 사실, 마치 그 자리에 다시 서면 예전과 똑같은 생각을 다시 할 수 있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옛 사랑과 정경들에 흥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가 그 자리에 예전처럼 멈춰 섰다는 그 사실 하나도 그에게는 기괴하게 여겨졌다. 그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와 동시에 심장이 아프도록 조여 옴을 느꼈다. 어딘가 저 밑바닥, 바로 발밑 저 아래쪽에 지난날도, 이전의 사상들도, 이전의 의문들도, 이전의 상념들도, 이전의 인상들도, 이 모든 관경들도, 그리고 그 자신도, 그리고 모든 것, 모든 것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기는 거기에서 어디론가 날아오르는 것 같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더 이상 정상 세계의 일원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지난 날의 모든 것들은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날아갈 뿐이다.

 

 3

 

p.187 그는 아직 한 잔쯤 남아있는 맥주병을 손에 쥐고, 마치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을 끄려는 듯이 쾌감을 느끼며 맥주를 단숨에 다 마셔 버렸다. 그러나 1분도 지나지 않아 취기가 머리로 올라오자 가볍고 유쾌하기까지 한 오한이 그의 등골을 스쳤다. 그는 누워서 이불을 자기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렇지 않아도 병적으로 얽혀 있던 그의 생각은 점점 더 혼동되기 시작했고, 곧 가볍고도 기분 좋은 잠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황홀한 기분으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더기가 된 낡은 외투 대신 지금 그의 위에 덮여 있는 푹신한 솜이불을 몸에 푹 감싸고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회복에 좋은 깊디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불안과 긴장 속에서 헤매이다 메모리 오버로 잠드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라서 발췌했다.

 

 4

 

 병석에 누워있는 라스꼴리니꼬프 옆에서 노파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라주미힌과 조시모프의 대화로 이루어진 챕터다. 굉장히 본격 추리 소설 같은 전개라 흥미롭게 읽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모든 추리를 범죄자의 시선에서 감상하게 된다는 점이다.

 

 5

 

p.208 그는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위엄을 부리는 중년의 신사로서 조심스럽고 까다로워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이런 경우에는 항상 기대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침내 분위기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 들어온 신사가 약간의 징조, 하지만 충분히 뚜렷한 징조를 보고 이곳, 이 <선실>과도 같은 방에서는 엄격하게 과장된 당당한 태도를 취해 봐야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약간은 태도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p.212 우선, 뾰뜨르 뻬뜨로비치가 약혼녀를 기다리는 동안 옷을 치장하고 몸을 손질하기 위해 수도에서의 며칠간을 애쓰며 보냈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데 그게 조금 지나칠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탓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자기 외모가 만족스럽게 변했다는 점에 대한 나름대로의, 어쩌면 지나칠 정도의 자만심도 뾰뜨르뻬드로비치가 약혼 중이라는 이유 때문에 용서해줄 수 있는 문제였다.


 결국 라스꼴리니꼬프를 찾아온 뾰뜨르 뻬뜨로비치의 묘사가 인상적이라서 발췌했다. 사람들의 허세와 그 안에 깃든 진의를 파악하는 능력만큼은 정말 최고인 것 같다.

 

p.216 「(전략) 제 개인적인 소견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무언가 성취된 일도 있다는 겁니다. 새롭고 유익한 사상들, 예전의 몽상적이고 낭만적인 것 대신에 새롭고 실용적인 저술들이 확산되고 있으니까요. 문학은 보다 더 성숙한 느낌을 줍니다. (중략)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과거로부터 벗어나 있고, 제 생각으로는 이것이 바로 성취된 일입니다.......」

p.216 「대성공, 요즘 말로 해서 진보는 이뤄졌습니다. 과학과 경제적인 진리의 이름으로라도 말입니다.......」

p.217 「(전략) 과학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개인적인 이익을 기초로 하고 있으니까요. 자기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자기 일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고, 또 웃옷도 온전한 채로 남게 되지요. 경제적인 진리는 사회에서 자리를 잘 잡은 개인 사업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즉 입을 만한 웃옷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공의 사업도 자리를 잘 잡아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유일하게 자기 자신의이익만을 챙김으로써 저는 그런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고, 또 가까운 사람도 반으로 조각난 웃옷보다는 나은 것을 많이 얻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건 이미 사적이고 개별적인 자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성공에 기인한 것이지요. (후략)」


 예전에 읽을 때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저자의 사고와 당시 시대상에 대해서 알고 보니 문제 의식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뾰뜨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가장 증오하던 유형의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그것을 삶의 원리로 미련없이 채택한 이기적인 사람들 말이다.

 

 6

 

p.244 「네가 어떻게 알아? 너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태야! 너는 네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아무것도 알지 못해....... 나도 수없이 사람들을 경멸했지만, 결국은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곤 했어....... 부끄러운 생각이 들 거야. (후략)」


 라주미힌이 악착같이 라스꼴리니꼬프를 도우려는 이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안쪽에 숨겨져 있는 것을 보고 돕고자 하는 진정한 친구의 모습이 돋보인다.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사람 그 자체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고 그 본질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라주미힌은 정말 닮고 싶은 인물이다.

 

p.254 라스꼴리니꼬프는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갔다. 경찰서로 가리라는 최종적인 결단을 내린 지금, 이제 모든 일이 끝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인지, 그는 닥치는 대로 마주치는 모든 일에 집착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싸늘하게 웃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시점에서, 모든 일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는 게 신기하다. 재미있는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7

 

p.272 「소냐 언니를 사랑하니?」
 「저는 언니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요!」 뽈랴는 이상스러울 만큼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진지해졌다.
 「나도 사랑해 주겠니?」
 대답을 듣는 대신 그는 그에게 다가오는 소녀의 얼굴과 그에게 입맞춤을 하려고 천진하게 내미는 아이의 볼록한 입술을 보았다.


 왠지 짠해지는 장면이다. 범죄자를 옹호하고 싶지도 않고, 이때의 라스꼴리니꼬프는 단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줄 대상을 찾아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 짠하게 느껴진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사랑받고 싶은 것이 인간이 아닌가.

 

p.273 「뽈랴, 나는 로지온이라고 한단다. 언제든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하도. <당신의 종인 로지온도 용서하소서>라고. 더 이상은 필요 없어.」
 「제가 평생토록 아저씨를 위해서 기도할게요.」 소녀는 열정적으로 말하고 갑자기 웃으면서 그에게 달려들어 다시 한 번 그를 꼭 껴안았다.


 소녀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갈구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모습이 참담하면서도 애잔하다. 하지만 이런 것으론 절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높게 쳐줘봤자 공들인 자기 기만일 뿐이다.

 

 제3부

 

  1

 

p.290 라주미힌은 자기의 기분이 어떻든 상관없이, 자신을 금방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마주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곧 알아차렸다.

p.293 「(전략)모두들 철저한 무개성(無個性)을 요구하고, 거기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낀다니까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가장 닮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을 그들은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요. 게다가 그 엉터리없는 생각들이라는 게 그들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건.......」

p.294 「(전략)인간은 단 한 가지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열네 번, 어쩌면 114번의 거짓 이론들을 생산해내야 할 겁니다. 그러므로 그런 거짓말은 그 나름대로 명예로운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거짓말마저도 자기 머리로는 지어낼 줄 모른단 말입니다! 거짓말을 하되, 자기 생각을 가지고서 거짓말을 하란 말입니다. 그럼, 뽀뽀라도 해주겠어요. 독창적인 생각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한 가지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요. (중략)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과학, 진보, 사상, 기술, 이상, 소망, 자유주의, 이성, 경험, 그 밖의 모든, 모든, 모든 분야에서 아직 중학교 예비 학급 1학년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썩어 버린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술에 취한 라주미힌의 장광설이지만 저자의 테마와 밀접한 문구라고 생각해서 발췌했다. 자기 자신이 아닌 톱니바퀴의 일부가 되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비판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라주미힌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2

 

p.320 두냐 역시 옷을 챙겨 입었다. 라주미힌은 그녀가 끼고 있는 장값이 낡았을 뿐 아니라 구멍까지 나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띄게 남루한 옷차림조차도 허름한 옷을 맵시있게 입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특별한 기품을 두 여인에게 부여해 주고 있었다. (중략) <감옥에서 자기 양말을 기웠다는 그 왕비는, 물론 그 순간에서조차도 진정한 왕비로 보였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가장 화려한 예식이나 행차 때보다도 더욱 그래 보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자의 테마와 밀착되어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발췌했다. 기품이란 무엇인가? 좋은 옷과, 좋은 얼굴, 그리고 좋은 환경이 만드는 것인가? 아니다. 진정한 기품은 모든 것이 진흙탕에 빠졌을 때 드러난다. 그 어떤 모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챙기는 것, 그것이 기품일지도 모른다.

 

 3

 

p.323 하지만 그 창백하고 우울한 얼굴도 어머니와 여동생이 들어서자 순식간에 환한 빛이 깃드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도 그의 표정에 이제까지 깃들어 있던 우울하고 산만한 기색 대신에 더욱 응집된 고뇌의 그림자만을 더해 줄 뿐이었다.


 미소라는 것이 항상 사람을 고양시키는 것만은 아니라는 통찰과 묘사에 반해서 발췌했다.

 

p.333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갑자기 당황해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얼마 전 느꼈던 무서운 감정이 죽음의 냉기처럼 다시 그의 영혼을 감쌌다. 문득 그는 자신이 지금 무서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앞으로 다시는 모든 일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더 이상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 누구와도 결단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시금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범죄자가 느끼는 고립감과 공포의 핵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라서 발췌했다.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울까.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형벌이라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4

 

 라스꼴리니꼬프를 찾아온 소냐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두냐와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노파에게 팔았던 물건을 되찾기 위해 라주미힌과 함께 뽀르삐리 뻬뜨로비치를 찾아가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어떤 국면에서는 라주미힌은 친구로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라주미힌이 없었으면 라스꼴리니꼬프는 일치감치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5

 

p.371 「(전략)논쟁은 이미 다 알려진......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에서부터 시작되었어. 범죄란 비정상적인 사회 질서에 대한 항의라는 거야.(후략)」

p.372 「(전략)이런 논지에서 보면, 만약 사회가 정상적으로 건설되면, 단번에 모든 범죄들도 사라지게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돼. 왜냐하면 항의할 만한 그 무엇이 없어지니까. 모든 이들이 단 한순간에 정의로워진다는 거야. 본성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아. 인간의 본성은 배제되어서 상정되지 않아! (중략) 사회적인 체계가 어떤 수학적인 머리의 산물로 세상에 나와 즉각 모든 인류를 정비하고, 한순간에 인류를 정의롭고 죄 없는 존재로 만든다는 거야. 그 어떤 산 과정, 역사의 산 과정도 있기 전에 말이야. (중략) 그러니까 삶의 <산>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 거야. 살아 있는 영혼은 필요 없다는 거지! 살아 있는 영혼은 삶을 요구하고 살아있는 영혼은 기계학에 순종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영혼은 의심이 많고, 살아 있는 영혼은 반동적이야!(후략)」

p.373 「(전략)수백만의 경우들을 모두 잘라 내고, 모든 것을 안락이라는 한 가지 명제로 귀결시키다니! 과제를 너무 쉽게 해결하려는 거야! 그런 논리는 유혹적인 만큼 분명해서 생각할 것도 없어! 중요한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모든 인생의 비밀이 단 두 페이지의 종이에 들어가 버리니까!」


 라스꼴리니꼬프를 의심하는 듯한 뽀르삐리 앞에서 범죄자에 대한 논의를 이야기하는 라주미힌. 이성과 논리로 이루어진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분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생각과도 일치하는 듯하다. 모든 결과 디테일을 제거하고 매끈하게 만들어버리는 합리성이라는 독재자의 본질을 파헤치고 있다.

 

p.378 「(전략) 저는 제 주된 사상을 믿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 사상이란 바로 자연의 법칙상 사람들은 <대체로> 두가지 부류로 나뉜다는 겁니다. 하나는 저급한(평범한) 부류로서 오로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출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새로운 말>을 할 줄 아는 재능 혹은 천분을 부여받는 사람들입니다. ...

p.378 ... 첫번째 부류, 즉 재료는 대체로 말해서 자기 천성상 보수적이고 체면을 차리는 사람들로 복종 속에서 살아가면서 순종하기를 좋아합니다. ...

p.378 ...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 모두는 그 능력에 따라서 법률을 어기는 파괴자들이거나 그럴 경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자기 사상을 위해 시체와 피를 건너뛰어야 한다면, 자기 내면의 양심에 따라서 피를 뛰어넘는 걸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사상과 그것의 중요도에 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

p.379 ... 이 부류도 저 부류도 존재할 권리를 완전히 동등하게 소유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가 보기에 모든 이들은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후략)」


 라스꼴리니꼬프의 논문 <범죄에 관하여>에 관한 해설이다. 얼핏 니체의 초인 사상과 비슷한 듯하지만, 범죄를 저지를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어떨지? 일단 라스꼴리니꼬프가 어긋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p.380 「(전략) 하지만 어떻게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중략) 왜냐하면 혼동이라도 생겨서,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이 자기를 다른 부류에 속했다고 생각하고는, 당신이 지금 그렇게 적절히 표현한 대로 <모든 장애를 제거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땐.......

p.381 「천만에요. 그런데 그런 실수는 단지 첫 번째 부류, 즉 <평범한> 사람들(어쩌면 이들에 대한 명칭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측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고려해주십시오. (중략)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그들이 진짜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결단코 멀리가지 못하니까요.(후략)


 그렇다면 비범한 자와 평범한 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 라스꼴리니꼬프는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한다. 비범한 자들만이 일을 저지르고, 그 뒤에도 자신의 신념을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가 나와야 가치를 판별할 수 있다는 건 너무 위험한 사상 아닌지.

 

p.384 「당신은 퍽 논리적이시군요. 자, 그렇다면 그의 양심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p.384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괴로워하라고 하지요. 혹여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그것이 그에게 강제 노역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벌이 될 겁니다.

p.385 「(전략) 만일 희생자들이 불쌍하다면 괴로워하라고 해. 폭넓은 의식과 깊은 마음속에는 언제나 고뇌와 고통이 있기 마련이니까. 내가 보기에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위대한 슬픔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


 다음 장에서도 나오지만 결국 라스꼴리니꼬프 그 자신은 이 양심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게 스스로 평범한 사람임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 하권의 흐름이다. 하지만 이것은 평범/비범과는 다른 문제가 아닌가. 새삼 복잡한 생각이 든다. 실제로 역사적인 위인들은 위대한 살인자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위대한 살인이란 존재하는가?)

 

 6

 

p.392 「(전략) 조금이라도 지적으로 성숙하고 노련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가능한 한 모든 외적이고 어쩔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려고 애쓸 거야. 다만 이 모든 것에 다른 이유를 붙이고, 나름대로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을 삽입해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한 다음,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것을 제시하겠지.(후략)」

p.392 「(전략) 교활한 사람일수록 그런 하찮은 일에 더 쉽게 걸려들 수 있거든. 교활하면 할수록 자기가 그런 사소한 일로 걸려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거든. 가장 교활한 사람들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잡아넣어야 해.(후략)」


 교활한 사람(=라주미힌 시점에서의 뽀르삐리)에 대한 설명이다. 그들은 현실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왜곡하여 받아들이고 다시 재생산한다. 그런 이들일 수록 현실을 근거로 한 명징한 공격에 약하다는 것.

 

p.398 <아니,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진짜 《거인》,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 사람은 툴롱을 호령하고 파리에서 대학살극을 벌이고, 이집트에서 군대를 《잃고》, 모스끄바로의 진군에서 50만의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빌니우스에서는 그 일을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그런데도 죽은 후에는 그를 우상으로 떠받들지 않았는가. 즉 《모든 것》이 허용돈 것이다. 아니, 아마도 이런 사람의 몸은 살로 되어 있지 않고 청동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p.399 <(전략) 노파는 질병에 불과한 존재이다....... 나는 어서 뛰어넘고 싶었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원칙을 죽인 것이다! 나는 원칙을 죽였지만, 도저히 그것을 뛰어넘을 수가 없어서, 아직 이쪽에 남아있는 것이다....... 다마나 죽일 줄만 알았을 뿐이다. (중략) 하하하! 어째서 너희들은 나를 빼놓았느냐? 나도 꼭 한 번밖에는 살지 못하므로, 나 역시 살고 싶단 말이다.......(후략)>


 비범한 사람들과 평범한 자신의 차이를 실감하며, 어째서 자신은 비범하게 살 수 없었던 것인지 통탄하는 부분이다. 생각은 잘못되었지만 마음은 이해가 간다. 누구에게나 삶을 한 번이고 소중한 것인데, 어째서 누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능성을 발휘하며 살고 다른 누구는 그러지 못하는 걸까.

 

p.404 노파는 앉아서 웃고 있었다. 그가 듣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자제하면서 조용히 소리를 죽여 웃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도끼로 치면 칠수록 침실에서의 웃음소리와 속삭이는 소리는 더욱더 강하게 큰 소리로 울리기 시작했고, 노파 역시 온몸을 흔들어 대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는 도망가려고 몸을 날렷지만, 현관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고, 활짝 열려 있는 계단으로 난 문, 계단참, 계단, 그리고 그 아래에서도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들이밀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들 숨어서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병에 시달리며 노파의 환상을 보는 부분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죄책감과 광기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라서 발췌했다.

 

 제4부

 

 1

 

p.422 <유령, 이것은 말하자면 내세의 작은 조각과 파편들이고, 그것들의 시작이다. 물론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들이 보일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건강한 사람은 가장 현세적인 사람이므로 완전과 질서를 위해 반드시 지상에서의 현세적인 삶만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병이 나서, 유기체 속의 정상적인 지상의 질서가 조금이라도 파괴되면,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 더욱 빈번해지고, 그러다가 완전히 죽게되면 그는 곧바로 다른 세계로 가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스비도리가일로프가 아내의 죽음 이후, 그녀의 유령을 보고 있다며 유령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는 부분이다.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해서 발췌했다.

 

 2

 

p.445 「뾰뜨르 뻬뜨로비치, 어서 나가세요!」 그녀는 화가 나서 창백해진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뾰뜨르 뻬뜨로비치는 이런 결말이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힘 그리고 자신의 희생자들이 처한 오갈 데 없는 상황에 지나치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안생이 창백해졌고, 입술은 떨리지 시작했다.


 스비도리가일로프로부터 3천 루블을 받게 되어 여유가 생긴 걸까? 아무튼, 두냐는 가차없이 뾰뜨르 뻬뜨로비치를 쳐낸다. 그런 두냐의 결단력에 충격을 받는 뾰뜨르의 모습이 흥미롭다. 역시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가장 강하다.

 

 3

 

p.447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이와 같은 결말을 전혀 예기치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두 여인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호통 치고 오만하게 굴었던 것이다. 그가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허영심과, 자기 도취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듯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만한 성공을 이루어 낸 뾰뜨르 뻬뜨로비치는 병적일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고, 자기 능력과 지성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어서, 때로 혼자 있을 때면,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넋을 잃고 쳐다보기까지 하는 인물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가 제일 사랑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온갖 수단과 노력으로 일궈낸 자기 재산이었다. 이 재산이 그를 그보다 높이 있는 사람들과 동등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뾰뜨르 뻬뜨로비치의 오만한 심상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묘사다. 뭔가를 이뤄낸 자신에게 도취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 그 뭔가를 사랑하는 셈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인 자신을 지킬 줄 아는 두냐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을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p.458 복도는 어두웠다. 그들은 전등 옆에 서 있었다. 잠깐 동안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라주미힌은 평생토록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타는 듯이 날카로운 눈동자는 매순간 더욱 강렬해져서, 그의 영혼을 꿰뚫어 영혼 속까지 다다를 것 같았다. 문득 라주미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그들 사이에 일어난 것 같았다....... 어떤 상념이 마치 암시처럼 스쳐 지나갔다. 뭔가 무시무시하며 끔찍하고, 갑자기 두 사람 모두가 이해하게 된 그런 어떤 상념이...... 라주미힌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를 눈치채는 순간의 묘사다. 구체적인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어도 눈빛과 태도만으로 진상을 꿰뚫게 되는 이 두 사람만의 진득한 분위기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4

 

p.466 「(전략) 아침에는 뽈랴와 레나에게 구두를 사주려고 시장에 갔었어요. 아이들 구두가 다 떨어졌거든요. 그런데 계산을 해보니까 우리 돈이 모자라는 거예요. 아주 많이 모자랐어요, 어머니는 정말 귀엽고 예쁜 구두를 고르셨거든요. 왜냐하면 어머니에게는 고상한 취미가 있으시거든요, 당신은 모르시겠지만요....... 그러니까 그 상점 안에서 상인들이 보는 앞에서 돈이 모자란다고 울음을 터뜨리시는 거에요....... 아, 보기가 얼마나 딱하던지.」


 소냐의 양어머니에 대한 구절이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한때 귀족의 딸로 누구보다 고고하게 살았을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돈이 없음을 호소하며 눈물을 터뜨릴 만큼 무너졌다는 게. 소냐가 그녀에게 느끼는 동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강렬한 문단이었다.

 

p.471 「어떻게 당신 내면에는 그런 치욕과 저급함이 그와는 정반대인 성스러운 다른 감정들과 함께 섞여 있을 수 있는 거지? (후략)」

p.474
「하느님이 안 계시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어요?」

p.482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당신 역시 똑같은 일을 했잖아? 당신 역시 선을 넘어선 거야....... 넘어설 수 있었던 거지. 당신은 자기 몸에 손을 댔고, 스스로를 죽여 버렸어....... <자기 생명>을 말이야. (어차피 마찬가지야!) (후략)」

p.483 「(전략) 자유와 권력,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권력이야! 떨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과 모든 개미 군단들에 대한 권력......! 그것이 목적이야!(후략)」

p.483 「(전략) 나는 당신을 선택한 거야. 나는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러 오지는 않을 거야. 이야기해주려는 것뿐이지. (후략)」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에게 집착하는 이유, 그건 아마 소냐가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행동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싶어서인 것 같다. 이때까지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옳은 행동을 했다고 믿고 싶어하며, 소냐의 타락이 그것을 입증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소냐는 마지막까지 그러지 않는다. 그녀는 그와 달랐다.

 

 5

 

p.490 「(전략) (심리의 법칙) 즉, 신문을 받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서, 그의 조심성을 흐트러뜨린 다음, 갑자기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질문을 그 사람의 정수리에 내리치는 그런 방식 말입니다.」


 다시 찾아간 뽀르삐리와 심리전을 하는 라스꼴리니꼬프. 사실상 심리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이미 라스꼴리니꼬프는 그에게 완전히 휘둘리고 있다. 뽀르삐리가 어떤 식으로 라스꼴리니꼬프를 가지고 노는 지 지켜볼 수 있는 장이다.

 

p.498 「(전략) 그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내게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내게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중략) 자유도 마음에 들지 않고, 생각에 잠겨서는 길을 잃고 고민을 하다가 거미줄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를 꽁꽁 묶고는 주변을 헝클어뜨리면서 죽도록 자기 자신을 괴롭히겠지요......! 그것뿐이겠습니까, 스스로 내게 2X2와 같은 수학적인 증거를 준비해오는 겁니다. 다마나 저는 그에게 약간 긴 말미를 주면 되는 것이지요.......」

p.502
「(전략) 비할 데 없이 거짓말을 잘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만 그 자연적 본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니 그 교활함이라는 것은 어디로 날아가 버린 것일까요! (중략) 자기가 먼저 선수 쳐서 부르지도 않은 곳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고, 아무말 않아야 좋을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지껄여 대면서, 여러 가지 암시를 흘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후략)」


 뽀르삐리는 범죄자 자신의 양심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감시자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범죄자를 많이 대해본 사람이기에 가능한 능수능란함이다.

 

 6

 

 뽀르삐리와 함께 숨막히게 이어지던 전쟁도 니꼴라이의 등장으로 잠시 막을 내린다. 니꼴라이가 자신이 노파와 그 동생을 죽였음을 시인하며 나선 것이다. 아무래도 저자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기 전까지는 계속 도와주려는 듯하다.

 

 제5부

 

 1

 

p.422 <내 친구여, 나는 지금까지 당신을 사랑하기만 했소. 그러나 이제는 당신을 존경하오. 왜냐하면 당신은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오!>


 루쥔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어설픈 사회주의에 빠져있는 청년인 안드레이 세묘노비치와의 대화 속에서 루쥔은 그의 거짓을 들여다본다. 말로는 소냐를 계몽한다고 하지만 사실 소냐를 따먹을(더 좋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뿐인 안드레이를 경멸하면서 그의 앞에서 소냐를 적선하는 행동을 보인다. 어설픈 사상에 빠져 자의식 없이 허우적대는 안드레이 역시 도스또예프스끼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일 것이다. 안드레이가 이 문장에서 말하는 '저항'이란 사회에 대한 또는 타인에 대한 저항이겠지만, 그의 사고 흐름을 봤을 땐 정통적인 결혼 관계에서 벗어나 문란한 성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2

 

p.556 여기에는 가난한 사람들 특유의 자존심이 개입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자존심 때문에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오직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든 남들의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의무적으로 행하는 몇몇 사회적인 의식에 마지막 힘을 모아 여태껏 모아 두었던 마지막 한 닢까지도 다 탕진해버리는 것이다.

p.556 이런 자존심과 허영심의 발작은 때로 몹시 가난하고 짓밟힌 사람들에게도 찾아 들어, 자칫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초조한 욕구로 변하기 마련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자존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존심도 있고 허영심도 있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더 강할지도 모른다.

 

p.557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당사자가 무안해질 정도로 아주 거창하고 환한 빛깔로 치장해 주고, 칭송해 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이를 위해서 전혀 있지도 않은 여러 가지 상황을 꾸며 내서는 자기도 그것을 진심으로 믿어 버리곤 했다. 그러다가는 금세 환멸을 느끼고,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진실로 숭배하던 그 사람을 헐뜯으면서 욕을 퍼붓고 떼밀어 내쫓아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천성적으로 그녀는 잘 웃고 명랑하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끊임없는 불행과 낭패를 겪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평화와 기쁨 속에서만 살기를, 감히 다른 모습으로 살지 않기를 너무나도 강렬하게 원하고 강요하게 되어서, 아주 작은 불화나 사소한 실패만 봐도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가장 밝은 희망과 환상을 품다가도, 다음 순간 갑자기 운명을 저주하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찢고 던지며 머리를 벽에 박아 버리는 것이었다.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의 광기를 해부한 부분이다. 하지만 광기라고 하기엔 나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나 싶어서 조금 소름이 끼친다. 광기는 평범성과 닿아있는 것이다.

 

 3

 

p.582 불쌍하고 외로운 폐병 환자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의 절규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이 고통에 일그러지고 바짝 마른 폐병 환자의 얼굴, 피가 말라붙어 있는 입술, 쉰 목소리의 절규, 아이처럼 목놓아 우는 소리, 순진한 어린애처럼 보호해 달라고 외치는 절망에 가득 찬 애원 속에는 누구나 이 불행한 여인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극도의 가련함과 처절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소냐가 도둑으로 누명을 쓰자 절규하는 까쩨리나의 모습을 너무 인상적으로 표현해서 발췌했다. 사람이 아니라 괴물처럼 느껴진다. 너무 아프면 괴물이 될 수도 있구나.

 

p.594 천성적으로 소심한 소냐는 예전에도 자기가 누구보다도 더 쉽게 파멸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누구든 대가를 치르는 일 없이 그녀를 쉽게 모욕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고 온순하고 고분고분하게 대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느낀 절망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모든 일을, 심지어 이런 일마저 아무 불평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순간은 너무나 힘겨운 것이었다.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어 누명을 벗었는데도, 처음 느꼈던 경악과 충격이 사라지고 이제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깨닫게 되자, 의지할 데 없이 나약한 자신의 처지와 모욕감이 그녀의 심장을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견디다 못해 방을 뛰쳐나가 자기 집으로 뛰어갔다.


 누명을 벗었지만 기쁘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 누명을 쓴 것도 타의지만 벗은 것도 타의에 의한 것이기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 그녀를 지배한 것이다. 이 무력한 상황은,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죽이기로 결심한 계기가 된 상황과도 유사하다.

 

 4

 

p.597 「어때요, 소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자기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모든 일은 <사회적인 위치와 그에 따라 얻어진 습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까 그 말을 이해했습니까?」

p.599 「(전략) 자, 그런데 말이에요, 만일 이 모든 일이 당신의 결심 하나에 달려 있다면 말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지, 루쥔이 살아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계속하게 할지, 까쩨리나 이바노브나가 죽어야 할지와 같은 문제들이 갑자기 당신의 결단 하나에 달려있다면 말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을 내리겠습니까? 그들 중 누가 죽어야 할까요? 난 그걸 묻고 싶어요.」


 자기와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입장이 된 소냐에게 비로소 범죄 사실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는 라스꼴리니꼬프. 자신과 같은 상황인 그녀라면 누군가를 죽여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것도 또한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라리라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냐의 대답은 그런 일은 할 수 없다이다. 이에 라스꼴리니꼬프는 반항하는 동시에 안도한다.

 

p.600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이상한 감정, 소냐에 대한 신랄한 증오심이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런 감정에 자신도 깜짝 놀란 듯, 그는 갑자기 머리를 들고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불안하고 비통하리만큼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거기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증오심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잘못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 순간이 왔음을 의미한 것에 불과했다.

p.601 그 순간은 노파 뒤에 서서, 이미 도끼를 올가미에서 풀며, <더이상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다>고 감각적으로 느끼던 그때와 지독할 정도로 흡사했다.


 지금이 아니면 소냐에게 고백할 수 없다. 소냐의 따뜻한 눈빛을 본 순간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순간이 노파를 죽이기로 결심한 직전의 순간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

 

 

p.603 「모르겠어요.」 소냐는 거의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잘 생각해 봐.」
 이 말을  하자마자, 예전의 낯익은 감정이 또다시 문득 그의 영혼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 리자베따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리자베따에게 도끼를 들고 다가갔을 때이 그녀의 표정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피해 벽 쪽으로 물러나 손을 앞으로 뻗쳤는데, 그 모습은 어린아이들이 뭔가에 갑자기 놀라면서, 자신을 놀라게 한 대상을 눈 한번 깜박이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뒤로 물러나 작은 손을 앞으로 뻗치고는 막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일이 지금 소냐에게도 일어났던 것이다. 그녀는 똑같은 모습으로 경악하면서 힘없이 잠깐 동안 그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왼손을 앞으로 뻗치고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약간 찌르는 듯하다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점점 그에게서 물러났고, 그를 보던 그녀의 시선은 못 박힌 듯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공포가 갑자기 그에게도 전달되었다. 똑같은 경악이 그의 표정에도 나타났다. 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거의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똑같은 표정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제 알겠어?」 마침내 그는 속삭였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된 소냐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문장을 읽어내려갈 수록 소냐의 모든 움직임과 표정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서 압도당하면서 읽은 부분이다.

 

p.604 그러나 곧 벌떡 일어나,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두 손을 붙잡고, 자신의 약한 손가락으로 그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꼭 쥐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꼼짝도 하지 않고 꼭 얼어붙은 것처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절망적인 마지막 시선으로 그녀는 자신을 위해 한가닥 희망이라도 찾아내서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없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p.604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소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도, 나를 안고 키스를 하다니, 당신은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p.605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지금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그녀는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미친 듯이 이렇게 외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듯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p.605 「그럼, 나를 버리지 않는 거야, 소냐?」 그는 일망의 희망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고 물었다.
 「아니오, 아니에요. 절대로 언제까지나, 그 어느 곳에서도 버리지 않을 거예요!」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소냐.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일 텐데도 판타지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인물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저자의 필력에 넘어간 탓인지...

 

p.605 「난, 소냐, 아직은 감옥에 가고 싶지 않은지도 몰라.」 그는 말했다.
 소냐는 얼른 그를 쳐다보았다.
 불행한 사람에 대한 열정적이고 괴로운 동정심이 가라앉아, 살인자라는 무서운 생각이 그녀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돌변한 그의 말투에서 그녀는 문득 살인자의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앞선 소냐의 행동이 나이브하다는 걸 저자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바로 다음 문단에서 소냐가 충동적인 동정심을 거두고 라스꼴리니꼬프를 섬뜩하게 느끼는 부분이 묘사된다. 정말 발췌하지 않을 수 없었다.

 

p.605 「알아, 소냐?」 그는 갑자기 어떤 감정에 휩싸여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 만일 내가 배가 고팠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도끼로 죽였다면.」 그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수수께끼라도 풀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 <행복할> 거야! 이것만은 알아 줘!」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는 삶의 당위를 위한 것이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한 살인이 아닌, 자신의 무력한 자아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였기에 그의 범죄는 쉽게 합리화될 수도 없고 인정받을 수도 없다. 그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p.609 「(전략) 그러니까 난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죽였어....... 자, 이제 이해할 수 있겠어?」

p.610
「(전략) 우리 어머니는 거의 무일푼이야. 누이는 어떻게 겨우 교육을 받아서, 가정교사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고 있어. 이들의 모든 희망은 오로지 나 한 사람이야. (중략) 10년 혹은 12년 뒤 사정이 나아지면, 나는 어쨌든 1천 루블 정도의 연봉을 받는 선생이나 관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때쯤이면 어머니는 걱정과 슬픔 때문에 말라비틀어지실 테니, 난 아무리 해도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릴 수가 없어. 그런데 누이는...... 누이에게는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후략)」

p.612 「(전략) 방금 나는 대학에서 공부할 돈을 도저히 조달할 수가 없었다고 했어. 그런데 말이야, 알아? 어쩌면 나는 그 돈을 조달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 (중략) 그런데 나는 심술이 나서 일하고 싶지가 않았어! (후략)」

p.613 「(전략) 그 다음에 나는 깨달았어, 소냐. 만일 모든 사람들이 똑똑해지기를 기다린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어쩌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개조할 사람은 누구도 없다고. 그러니 애쓸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 바로 맞아! 그게 인간의 법칙이야! (중략) 머리와 정신이 견고하고 강한 사람이라야만 사람들의 주권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더 많이 용기를 내어 일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사람들 눈에는 옳아 보이는 거야. 보다 많은 것을 무시하는 자만이 그들의 입법자가 되고, 더 많은 일을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보다도 옳은 사람이 되는 거야! (후략)」

p.614 「권력은 용기를 내서 몸을 굽혀 그것을 줍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이야. 오직 하나, 하나만이 필요한 거야. 용기를 내는 일만이 필요한 거야! (중략) 그래서 나는...... 내가 감행하고 싶었어. 그래서 죽였어....... 나는 다만 감행하고 싶었던 거야, 소냐. 그게 모든 것의 이유야!」

p.615 「(전략) 나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죽인 거야. (중략) 중요한 것은, 죽였을 때 내게 필요한 건 돈도 아니었다는 거야. 소냐, 돈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 필요했어. (후략)」

p.616 「(전략) 나는 그때 알고 싶었던 거야, 어서 알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이>인가, 아니면 인간인가를 말이야. 내가 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나는 벌벌 떠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p.616 「(전략) 나는 나 자신을 죽였어, 노파가 아니라! 그렇게 단칼에 나는 나 자신을 영원히 죽여 버린 거야......! 그 노파를 죽인 것은 악마이지, 내가 아냐....... (후략)」

 

 라스꼴리니꼬프가 어째서 범행을 결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백이다. 결국 극도의 니힐리즘이 그를 삼킨 결과다.

 

p.616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속죄하세요. 그래야만 해요.」
 「아니! 난 놈들에게 가지 않을 거야, 소냐.」
 「그럼, 어떻게,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무엇에 의지해서 살려고요?」 (중략) 「당신은 벌써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떠나서 살겠다는 거지요!이제 당신은 어떻게 될까요!」


 범죄자의 처지란 결국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없는 극도로 고독한 상태를 의미한다. 어떻게 사람을 떠나서 살겠느냐는 소냐의 외침이 아프지만 강렬하게 들린다. 아무리 밉고 추악해도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법이다.

 

p.619 소냐에게 오면서 그는 모든 희망과 출구가 오로지 그녀에게만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고통 중 일부라도 덜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지금 그녀의 온 마음이 그에게로 향하자, 그는 자신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불행해졌다는 사실을 느끼고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5

 

p.648 요즘 들어서 그는 어떤 이상한 비애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비애 속에 무언가 특별히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그 비애로부터 무언가 지속적이고 영원한 것이 배어 나왔으며, 죽음처럼 차가운 우수로 가득한 출구 없는 나날들과 <1아르신의 공간>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할 운명이 예감되는 것이었다. 저물어 갈수록 이런 감각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하게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국 벌을 받게 되리란 것을 예감하고 그 상황에 미리 자아를 담궈보기 시작하는 라스꼴리니꼬프. 소냐와의 대화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제6부

 

 1

 

p.648 그러나 문제는 그가 요즘 거의 혼자 있었는데도,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결코 느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주로 교외로 나가거나 큰 도로를 걸었고, 언젠가 한번은 숲에 들어가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장소가 외지면 외질수록, 그는 누군가 가까이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았다.


 하루종일 감시당하는 기분으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계속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자신을 죽여야 하는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2

 

p.676 「삶요! 당신이 선지자라도 됩니까?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더 찾고 발견하십시오. 어쩌면 하느님이 이 일을 위해 당신을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것도 영원한 건 아닐 테고요, 그 쇠사슬 말입니다.......」

p.677 「(전략) 고난도 역시 좋은 일이겠지요. 고난을 받으십시오. (중략) 교활하게 머리를 짜내지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삶 속으로 뛰어드십시오. 그러면 곧장 당신은 어떤 해안에 도달해서 두 다리로 서게 될 겁니다. (후략)」

p.678 「(전략) 신이 당신에게는 삶을 준비해 놓았어요. (중략) 당신은 용기 있는 사람이니 안락함 따위를 추구하지는 않겠지요? 오랫동안 아무도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고 해서, 그게 어떻다는 거지요? 이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문제입니다. 태양이 되십시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보게 될 겁니다. 태양은 무엇보다도 먼저 태양이 되어야 합니다. (후략)」


 뽀르삐리가 라스꼴리니꼬프를 회유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데 매우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니힐리즘에 대처하는 방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까? 삶을 기대하고, 기꺼이 고난을 견뎌내며, 용기를 내어 사람들 앞에 선다. 회유보다는 격려의 언어로 보이는 건 내 심상의 투영된 탓인가.

 

 3

 

 뽀르삐리와 대화를 나눈 후, 불안한 마음에 스비드리가일로드를 찾아가는 라스꼴리니꼬프. 어떻게 해서든 위험 요소를 없애보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노력이 안타깝다.

 

 4

 

p.700 「(전략) 아가씨의 마음에 <가엾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위험한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구원해 주고> 싶어지니까요.(후략)」

p.701 「(전략) 난 물론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돌리고, 광명을 동경하며 갈망하는 척하다가, 마침내는 여성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확실한 방법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절대로 어느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으며,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여성에게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누구나 다 아는 아첨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아첨이란 마지막 한 마디까지 모조리 거짓이라 할지라도 기분이 좋아지고 만족감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겁니다. (중략) 아첨이 아무리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 속의 절반 정도는 틀림없이 진짜로 보이는 겁니다. 이것은 교육의 정도와 사회 계층에 상관없이 똑같이 적용됩니다. (중략) 나의 전술이라는 것은 다만 매순간 그녀의 순결 앞에 압도당해 엎드려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후략)」


 스비도리가일로프라는 인간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인간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같은 칭찬이어도 상대로부터 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것은 아첨이다. 아첨에 능한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이 구절을 보면서 아첨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지 되뇌일 수 있으면 좋곘다.

 

 5

 

p.733 「나를 사랑하지 않나?」 그는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사랑할 수 없다는 거야......? 결코?」 그는 절망해서 속삭였다.
 「결코!」 두냐는 속삭였다.
 한순간 스비도리가일로프의 영혼 속에서 무언의 괴로운 투쟁이 일어났다. 그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p.734 스비도리가일로프는 그대로 창 옆에 3분 동안 서 있었다. 마침내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용히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어 내렸다. 이상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가련하고 슬프고 약하디약한 절망의 미소였다. 이미 마르기 시작한 피가 그의 손바닥에 묻어 났다. 그는 독기 어린 시선으로 피를 들여다보고는, 천에 물을 묻혀 관자놀이를 닦았다. 두냐가 던져서 문 가로 날아간 권총이 문득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총을 집어 들고 살펴보았다. 그것은 포켓용 작은 삼발 권총으로 구형이었다. 그 속에는 아직 두 발의 총알과 한 발의 뇌관이 남아 있었다. 아직 한 번은 더 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권총을 호주머니에 넣고는, 모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재독하면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심상은 거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스비도리가일로프가 자살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냐로부터 거절당한 뒤, 그는 자신의 모든 돈을 사람들에게 뿌리고는 자살을 택한다. 그 과정에서 물에 빠져 죽은 소녀와 이상한 아이가 등장하는 악몽을 꾸는데, 아무래도 스비도리가일로프는 예전에도 어린 소녀를 능욕해서 자살하게 만든 적이 있는 것 같다. 그 일로 죄책감을 내내 품고 있다가 터진 게 아닐까? 스비도리가일로프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인정하지 않고 삶을 지속했을 때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6

 

p.747 그러나 그녀의 풀어헤친 밝은 금발은 물에 젖어 있었고, 그 머리에는 장미 화환이 씌워져 있었다. 이미 딱딱히 굳어 버린 준엄한 그녀의 옆얼굴 역시 대리석으로 깎아 놓은 것 같았으나, 그녀의 창백한 입술에 떠올라 있는 미소에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한없는 슬픔과 깊은 하소연이 서려 있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 소녀를 알았다. 관의 주변에는 성상도, 밝혀진 촛불도 없었고, 기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소녀는 물에 빠져 자살한 사람이었다. 소녀는 겨우 열네 살에 불과헀지만, 그녀의 영혼은 능욕을 당해 찢기고 상처를 입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능욕은 앳된 의식을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전율케 해, 천사처럼 깨끗한 소녀의 영혼을 부당한 수치심으로 더럽혔고, 아무도 들어 주는 이 없이 참혹하게 짓밟힌 마지막 절망의 외침마저 그녀에게서 앗아 갔던 것이다. 그것은 눈이 녹을 무렵 습기 찬 밤에 암흑과 추위 속에서 있었던 있이었으며, 그날도 바람은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이 문단을 봐도 역시나 스비도리가일로프는 과거에 한 소녀를 능욕했던 전적이 있다. 하지만 이 일이 지금도 충격적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설마 소녀가 자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후로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것을 잊기 위해 살아왔지만 결국 그러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7

 

p.767 <그런데 그들은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걸까, 난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인데! 오,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만약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도 결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이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후략)>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양심의 가책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없었던 라스꼴리니꼬프. 양심을 작동하는 기재는 사랑인지도 모른다.

 

 8

 

p.775 그가 센나야 광장에서 땅에 두 번째 절을 했을 때, 그는 자기에게서 쉰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소냐를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를 피해, 광장에 서 있던 어떤 임시 목조 가옥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그의 슬픈 여정을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 순간 소냐가 이제부터 영원히 그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을, 운명이 그를 어디로 이끌든지 세상 끝까지라도 그의 뒤를 따르리라는 것을 한순간에 느끼고 깨닫게 되었다.


 자백하러 가는 길, 여전히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헤매이는 그에게 구원처럼 소냐가 계속 따라온다. 여기서 소냐는 그야말로 기독교적인 신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에필로그

 

 1

 

p.790 전에 대학생이었던 라주미힌은 죄인 라스꼴리니꼬프가 대학 재학 시절에 자신이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서 폐병에 걸린 가난한 학우를 도와주었고 (중략) 밤에 불이 나자 라스꼴리니꼬프가 벌써 타기 시작한 어떤 아파트에서 두 어린아이들을 구해주려다 화상을 입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약자들에게 이렇게까지 헌신적이고 민감했던 그였기에, 자신의 처지와 세계의 괴리를 납득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모양이다.

 

 2

 

p.798 심하게 상처를 입은 것은 그의 자존심이었고, 그는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병이 난 것이었다. 오, 만일 그가 스스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그렇게만 되었다면 그는 모든 것, 즉 수치와 모욕마저도 견뎌 낼 수 있었을 것이다.

p.799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그는 만족할 수 없었더. 그는 항상 무언가 더 큰 것을 원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갈망이 강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서, 당시에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하도록 허용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p.801 그는 괴로워하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했지만, 물 위에 서 있던 바로 그 당시에 이미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신념 속에 있는 어리석은 허위를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깯다지 못했다. 그는 이 예감이 그의 생애에서 장래에 다가올 변화, 그의 미래의 부활,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전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감옥에 가서도 그는 여전히 괴로워한다.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자존심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찾아낼 수 있었다.

 

p.808 그러나 곧, 바로 그 순간에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무한한 행복감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해했다. 그녀는 한 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가 그녀를 무한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그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을.......

p.808 그는 부활했다. 그는 이것을 알았다. 그는 갱생한 자신의 온 존재로 그것을 완전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그녀는 오직 그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생각하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p.808 그날 그는 모든 유형수들, 예전의 그의 적들이 벌써 그를 다르게 쳐다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스스로가 자진해서 그들과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들은 그에게 상냥하게 대답했다. 이제야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벌써 예전부터 이랬어야만 하는 게 아니었을까. 정말 모든 것이 이제는 변해야만 하는 것이 안리까?

p.809 모든 것, 그의 범죄마저도, 판결과 유형마저도 현재 최초의 환희로 가슴 벅차 있는 그에게는 어떤 외적이고 이상한 것으로, 그에게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사건들로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의 깊은 사랑을 비로소 깨닫고 마침내 상처받은 자존심의 늪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내딛는다. 이 부분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부분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정말 감동적이었다. 마침내, 드디어, 겨우이지 않은가.

 

p.809 7년, <겨우> 7년! 행복이 시작되고 있던 이 무렵과 또 다른 순간들마다 두 사람은 기꺼이 이 7년을 7일로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새로운 삶이 거저 그에게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 삶을 사기 위해서 아직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그것을 위해서는 앞으로 위대한 행적을 쌓아 보상해야 한다는 것도 미처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p.810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이야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으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되기에 충분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완결되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과, 새로운 자아 앞에 선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의 모습으로 <죄와 벌>의 대장정이 끝을 맺는다. 그 끝에는 죄도 벌도 없었다. 

 

역자 해설 / 인간 본성의 이중성과 도덕적 니힐리즘

 

p.812 『죄와 벌』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1860년대에 러시아의 수도 뻬쩨르부르그를 구체적인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p.812 실제로 뻬쩨르부르그는 1861년 농노 해방이 이루어짐에 따라 수많은 농민들이 새로운 직업을 얻고자 도시로 몰려든 결과, 뾰뜨르 대제가 만들어 놓은 깔끔하게 정리된 계획도시의 면모를 상실하게 되었다. 급작스러운 인구의 팽창은 실업 문제와 더불어 도시의 주거 조건, 즉 수도, 보건 위생, 주택 문제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수도의 뒷골목을 범지와 매춘, 알코올 중독과 고리대금업의 온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런 사회적인 배경을 라스꼴리니꼬프가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배경으로 제시하고 있다.

p.813 이렇게 도스또예프스끼에게서 자연과 물질적인 세계는 철저히 의인화되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심리적인 배경이 된다.

 
 드디어 해설편이다. 해설을 읽으며 내 시야로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도 함께 보고자 한다. 당시 시대상에 대해서는 <매핑 도스또예프스끼>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내 식대로 정리하자면 자본주의 사회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고 그 충격에 날것 그대로 노출되었던 세대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p.814 라스꼴리니꼬프는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받은 지성인이면서, 동시에 가난 때문에 몸과 마음, 그리고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자의식이 강한 청년으로 등장한다. (중략)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가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가난과 가족의 비참한 생활,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p.814 라스꼴리니꼬프는 사회 속에 내재하는 불의를 보고, 그 원인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독특한 이론을 만들어 낸다.

p.816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경멸감을 감추지 않는다. (중략) 악에 대해 굴종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은 나약하고 비열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p.817 라스꼴리니꼬프는 타인들(중략)처럼 사회의 불의와 폭력을 참고 지켜보며 거기에 복종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고통과 피>로 가득한 부조리한 사회는 단번에 타파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비범인>은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는 자신과 타인들에게 자신이 모든 도덕률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비범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중략)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세계 질서의 부조리에 대항하여, 그러한 세계를 창조한 신에게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어째서 그토록 비뚤어졌는가에 대한 해설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p.821 소설은 2주 동안의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 주는데, 사실 소설 속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연대기가 아니라, 라스꼴리니꼬프가 내면적으로 겪게 되는 순간순간의 감각과 모순되는 감정들의 교차 과정이다.

p.821 이 심리적인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인데,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누구보다도 먼저 깊이 파헤친 최초의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런 기미가 있었지만, 이 작품은 특히나 더 주연이 되는 인물의 심상이 세계관을 구현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작품 전체가 라스꼴리니꼬프라는 인물 하나를 위해 쓰여진 것과 마찬가지다.

 

p.824 이렇게 범죄의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과정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 우리는 라스꼴리니꼬프가 겪는 심리적인 <징벌>의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p.825 즉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연인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성을 지배하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것이다. (중략) 바로 이러한 정신적인 <분열>과 정신적인 <죽음>,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소외와 단절이 그의 범죄에 대한 심리적인 징벌의 본질인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어째서 범죄를 저질렀는가에 대한 해설이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젠 이해가 된다. 독서력이 늘었든 경혐이 늘었든 뿌듯한 일이다.

 

p.826 동시에 뽀르삐리는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생명 존중 사상과 고난을 통한 정화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상을 대변해 주고 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이론의 노예가 되어 파멸해 가고 있을 때, 뽀르피리는 생명과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p.814 라스꼴리니꼬프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소냐는 폭력에 굴종하고 순응하는 평범하고 경멸스러운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작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자기희생>이라는 기독교적인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p.829 그는 독특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든 사람들이 이론과 사상의 노예가 되어 자신만이 유일한 진리의 답지자라고 확신하고 서로를 죽이면서 파멸해 가는 꿈을 꾼다. 이 꿈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지녔던 이성주의의 허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사상의 허점을 발견한 그는 결국 소냐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부활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죄를 지었던 라스꼴리니꼬프가 어떻게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죄짓고 벌받은 자의 끝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해설에 무척 공감한다. 그게 이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결말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작품 평론 / 5막 비극으로서의 『죄와 벌』

 

 1

 

p.831 도스또예프스끼의 세계 속에서 장소와 무대 장치는 등장인물과 신비할 정도로 긴밀하게 연관된다. 이들은 물질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상징물들이다.

p.832 바로 이것이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이 지니는 물질적 외양이다. 그의 방은 금욕적인 수도사의 승방이다. (중략) 그의 삶은 온통 사유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외적인 세계, 사람들 그리고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p.838 이 작품의 어떤 장면에서도 우리는 <예술적인 묘사>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묘사>를 찾아볼 수 없다.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에 대한 자세한 기록, 연출자의 사무적인 무대 지시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소설 전체는 뻬쩨르부르그의 기류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빛에 의해 조명을 받고 있다. 도시의 영혼은 라스꼴리니꼬프의 내면 속에 구현되어, 거리의 아코디언이 내는 애수에 찬 노랫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라스꼴리니꼬프로 이루어진 세계의 심상을 설명하고 있다. 위 해설에서 본 내용과 비슷하지만 좀 더 자세하다. 이후의 내용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어떻게 라스꼴리니꼬프를 담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2

 

p.839 도스또예프스끼의 주인공들은 그 정신적인 면모로 볼 때,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그다지 많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의 소설들 속에서 날씨에 대한 묘사를 발견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날씨에 대한 묘사가 일단 나오면, 우리는 그 안에 언제나 정신 상태에 대한 묘사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배경과 마찬가지로 자연 현상은 인간의 내면에만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계절과 날씨마저 라스꼴리니꼬프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는 해설이다. 생각해보면 읽으면서 날씨나 계절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3

 

p.841 낮은 라스꼴리니꼬프를 폭로하고, 밤은 어둠의 품속으로 그의 분신인 스비드리가일로프를 삼켜 버린다. 신성한 어머니 ㅡ 대지를 모욕한 이 사람은 자기 내면 속에 있는 인간성을 죽이고, 미지의 우주적인 힘의 세력에 빠져 버린다.


 낮과 밤의 시간마저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를 구성한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라스꼴리니꼬프의 분신이며, 특히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의 형제와 같은 존재다.

 

 4

 

p.843 <시간의 일치>는 이 비극 소설에서<장소의 일치>만큼이나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중략) 그의 세계 속에서 시간은 무한하게 늘어나거나 축소되고, 거의 사라지기도 한다. (중략) 소설 속에 나오는 온갖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들이 단 2주일이라는 기간 안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p.844 세계는 자신의 실재성을 상실하고, 시간적이고 인과적인 연관 관계는 범죄자의 의식 속에서 흐려진다. <죽어 가는 사람의 병적인 무관심 상태와 흡사한> 그의 무기력은 존재 밖의 의식 작용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굉장히 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2주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 온갖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이 포착되었다는 것은 이 2주간의 시간이 라스꼴리니꼬프에게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p.845 고전적인 비극의 세 번째 일치인 행위의 일치는 비극 소설의 구성을 결정해 준다. 『죄와 벌』은 한 가지 사상, 한 사람 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인물들과 사건들이 라스꼴리니꼬프의 주변에 배치된다.

p.846 라스꼴리니꼬프는 소설 속에서 구성의 중심일 뿐 아니라, 정신적인 중심이기도 하다. (중략) 그는 고통스러운 분열을 통과해야 하고, 자의식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 속에서 찬반의 근거를 끌어내야만> 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결국 라스꼴리니꼬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해설이다. 사건 하나 하나를 분리해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세계관에 매치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6

 

p.850 그는 순종과 희생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그 파멸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과연 인간은 <생명에 대한 권리>를 지니지 못한다는 말인가? 과거의 도덕적인 법칙을 파괴하는 것이 부도덕한 일이라면, 과연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은 도덕적인 일이란 말인가?

p.851 그는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형벌을 기다리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것이 그를 찾아온다. 그것은 인류라는 가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비로운 의식이다. 살인자는 도덕적인 법칙보다도 더 큰 무엇, 즉 정신적인 세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그 어떤 것을 파괴한 것이다.


 강압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라스꼴리니꼬프는 도덕적인 법칙에 저항하여 힘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인류로부터의 단절이자 영원한 고독과 고립이었다. 이런 고립 자체를 라스꼴리니꼬프가 두려워했을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것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을 것이다. 양심은 또 다른 자신이다.

 

p.860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꼴리니꼬프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지만, 이미 온갖 선입견으로부터 완전히 <교정을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주인공이 앞으로 겪게 될 만한 운명들 중 하나를 구현하고 있다.

p.861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더 일관성이 있다. 그에게서 선과 악은 상대적이고, 모든 것은 허용되며, 모든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세계를 둘러싼 권태와 속악(俗惡)뿐이다. 그래서 그는 권태로움을 느낀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즐기려고 한다. (중략) 그는 권태로 말미암아 자살한다. 초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의 힘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멸시키고야 만다.

p.861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색욕가이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무서운 범죄들 때문에 양심에 괴로움을 느낀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어떤 점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분신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죄책감이 아닌 권태로 죽었다는 해석인데 참 흥미롭다. 치트키를 쓰고 한참 게임을 하다가 지겨워져서 게임을 지운 것과 같은 걸까.

 

p.866 그는 자수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가 <겁쟁이이고 비열한>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는 결단코 온순해지거나 회개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그의 마음속에는 교만한 마음이 폭발한다.


 그런 그의 교만한 마음이 어떻게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를 그리는 것이 에필로그다. 라스꼴리니꼬프에게 포커스를 두고 보면 좀 더 분량이 필요했던 부분이긴 하다.

 

 7

 

p.870 그는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계를 뛰어넘어> 보고 싶은 마음에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는 도덕률이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이 선과 악의 저편에서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양심은 편안하다. 그는 <사람들과의 고립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에> 파멸한 것이 아니다. 오,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오만한 고독을 사랑한다. 그는 <신경이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에>, <본성이 항복했기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황당무계한 일이다.


 실제로 작품 내내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람들의 시선보다도 자기 자신의 내면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한다. 사람들이 넘치는 도시를 휘젓고 다니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오롯이 빠져들어 있다.

 

 8

 

p.872 도스또예프스끼에게서 무신앙은 피할 수 없이 인신(人神)으로 가게 되어 있다. 만일 신이 없다면, 내가 곧 신인 것이다. <강한 사람>은 신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구하고, 마침내는 그것을 얻어 낸다. 그의 자유는 무한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그 무한성 속에 그의 파멸이 숨겨져 있다. 신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순전한 악마주의라는 것이 판명된다.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은 곧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무신앙이 지닌 자유의 길을 추적하면서, 독자를 자신의 종교관으로 이끌어 간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이외에 다른 자유란 없으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운명에 의해 지배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에필로그의 결말이 도스또예프스끼의 개인적인 신앙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기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에필로그의 전개를 훨씬 쉽게 납득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회개와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나 갑자기 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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