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악어 외
악어 외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중단편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131
박혜경 외 옮김 / 열린책들
시작
반 년 가까이 계속 해오고 있는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읽기 프로젝트. 어느덧, 도스또예프스끼의 후기작들을 남겨두고 있다. 이 작품을 끝으로 이후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대작들만 주르륵 남아있는지라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보고 싶다.
대작들로 들어가기 전에 조금 긴장을 풀어줄 요량인지, 이번 책은 단편을 모은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단편작들은 모두 유쾌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이번 책도 조금 쉬어가면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죄와 벌을 시작으로 까라마조프에서 마침표를 찍는 여정을 달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느긋하게 도스또예프스끼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그런데, 제목이 '악어'라니...
감상
이 책은 총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악몽 같은 이야기',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그리고 '악어'이다. 이 이야기들은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각기 다른 측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테마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풀어냈는지 단편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자.
악몽 같은 이야기
개인적인 감상으론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쉽고 우스운 버전인 것 같다.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관리가, 자신의 부하의 결혼식에 들어가서 행패 아닌 행패를 부리고 큰 부끄러움을 당하는 단편이다. 작품의 화자인 이반이 이런 상황에 빠지는 이유 또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과 같다. 현실에 대한 인식보다 자신의 좁은 내면 세계에 빠져 있는 탓이다.
그는 입으로는 혁명과 휴머니즘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그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 상관인 자신이 말없이 결혼식에 찾아와 축하해주는 것을 부하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는 하나 조금이라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행동이 얼마나 경솔한 행동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타인과 현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존재다.
의도적으로 나쁜 일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타인과 현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악(惡)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주변에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휴머니즘을 추종하는 것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한편으론 이런 상황이 지금까지도 여러 번 지난 작품들에서 변주되었었는데 (<분신>이라든가, <지하로부터의 수기>라든가) 무지한 사람이 자의식에 취해 사람들 앞에 나섰다가 큰 멸시를 당하는 장면을 왜 이렇게까지 즐겨 쓰는 건지 모르겠다. 비판적인 어조를 취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화가들은, 작가의 아바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은 내게 있어 매우 자학적인 문학으로 보이기도 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자학적 성향에 대한 논문이 있으면 읽어보고 싶다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제목만 봤을 때 제일 궁금했던 단편이다.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저런 모순적인 제목이 나온 걸까? 그런 의문점은 서문을 읽다 보면 바로 해소된다. 이 단편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유럽 여행을 다녀와 느낀 인상들을 적은 글로, 유럽에 대한 막연한 로망과 낭만이 산산히 부서지는 과정에서 겪은 고찰을 담고 있다.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은 유럽발 자본주의 문명을 필터링 없이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러시아의 대표 지식인 중 하나였던 도스또예프스끼 역시 유럽 추종의 문화에서 자유롭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40의 나이로 운좋게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유럽에서 만난 유럽은 그의 장엄한 기대를 한 순간에 배반하는 초라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도착한 베를린의 정경이 러시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쾰른의 대성당이 기대했던 것만큼 멋지지 않았던 것. 연이은 실망에 도스또예프스끼는 좌절한다. 하지만 유럽 문명의 고점에 있는 것은 바로 파리와 런던. 그는 이 두 도시의 정경을 집중적으로 관찰한다. 과연 파리와 런던은 그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유토피아였을까? 대답은 예상이 되겠지만 당연히 아니오다.
그는 파리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계 장치에 의해서 통제되는, 그리고 기계 장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노예 의식으로 빚어낸 유토피아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더는 그 무엇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무념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쉽게 포기한다. 러시아에서 온 도스또예프스끼의 눈에는 그것이 보인다. 대조적으로 그 모든 유토피아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런던이다. 수정궁을 만들기 위해 기름때 묻은 기관을 돌려가며 온갖 부패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 문명의 진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p.136 ~ 137)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무념의 태도다. 거대한 질서에 모든 이성을 내맡긴 채 악을 자행하는 태도다.
유럽 문명의 질서를 완전한 선이라 믿고, 그와 위배되거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듯 대하는 사람들의 오만한 태도가 문제다. 왜냐하면 이런 이들의 오만함으로 인해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 이들은 바로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한 민중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중의 일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당장 나 한 사람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닌가? 부르주아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념의 태도는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악이 된다. 자유란 무언가를 선택하는 행위이며, 이것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양심과 신념이 기반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념의 태도는 양심도 신념도 요하지 않는다. 그저 동물처럼 하루 하루의 이득에 급급해 살아가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무념의 태도를 가진 이들은 단기적으로 생각하며 눈앞의 이득에 얽매인다. 그리고 본질이 아닌 겉으로 드러난 것들에 집착하며 그런 행위는 자신의 본질조차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당장의 이득과 허영으로 숨긴 자신의 겉모습 뿐이다. 이런 점은 당대의 부르주아뿐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결국 도스또예프스끼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이성의 힘, 그것도 매우 좁은 의미의 이성 - 개별적이고 개인적이며 이기적인 이익을 최우선순위로 두는 사고 - 에 대한 것이다. 뭔가를 추앙하면 그 범위는 자동적으로 좁혀진다. 가령 어떤 가수를 좋아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그의 노래와 외모를 좋아하지만, 추앙의 범주로 가면 그 사람의 사상이나 사생활을 뒤쫓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상의 추앙은 결과적으로 이성의 시야를 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추앙된 이성의 최종 결과물이 자신의 단기적인 이득에 급급하는 - 동물의 형태에 가장 가깝게 변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시사점이다. (이점은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비교해서 생각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동물의 형태를 '악어'로 규정하여 한 편의 이야기를 써낸다.
악어
이 단편은 <백야 외>에 수록된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과 더불어 가장 골때리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개그 단편(..)이다. 왜 이 작품이 표제작이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내용을 보면 납득할 수 밖에 없다. 부르주아의 질서가 러시아에 유입되면서 생겨나는 스파크들은 기이하고도 이상한 사건을 통해 풍자하고 있는 아주 재미있는 단편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화자의 친구 부부가 독일인이 가져온 악어를 구경하러 갔다가, 그 남편인 이반 마뜨베이치가 악어의 뱃속에 갇히면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다루고 있다. 상식적으로 악어에게 먹히는 순간 인간은 죽게 마련이지만, 이 작품 속의 악어는 어디까지나 '자본'의 비유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악랄하진 않다. 그냥 사람을 통째로 삼켜서 텅 빈 뱃속에 넣어둘 뿐이다.
어쨌든 악어의 뱃속에 갇힌 친구를 꺼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 과정에서 악어를 사유 재산으로 취급해 그를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상사와, 오히려 악어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이용해 명성을 얻겠다는 화자의 모습이 매우 황당하고도 유머러스하게 표현된다.
악어는 자본주의가 세운 수정궁 그 자체이며, 악어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친구는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에 모든 것을 내맡긴 존재다. 이야기는 미완성으로 끝을 맺지만 결말이 중요하지 않은 작품이다. 악어 : 친구 = 수정궁 : 자본주의의 노예의 도식만으로도 이 작품은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우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어 뱃속에 갇혀 나오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이어진 도스또예프스끼의 생각 - 자본주의과 부르주아에 대한 - 이 쉽고 명확하게 그려진 단편이기 때문에,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죄와 벌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세 가지 단편을 통해 저자는 이기심과 속물심이 만든 유럽 자본주의 문명에서 한 걸음 물러나 러시아 고유의 인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럽 자본주의 문명의 발달에 압도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파헤쳐보고 러시아의 정체성을 가꾸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그의 작품을 읽어온 바에 따르면 그는 본질이 아닌 현상에 휘둘리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 화려한 부르주아 사회가 되었든, 사람들이 입은 죄수복이 되었든 사회가 덧입힌 물감에 의해 그 본질 자체가 왜곡되는 것에 매우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금박을 잔뜩 덧칠한 유럽 문명은 충분한 경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를 날카롭게 감지하고 있고 그것들을 이 책의 작품들을 통해 풍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비판의 지점은 유효한데 비해 이에 대한 해결책과 방안은 (아직까진) 구체적이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기심을 원동력으로 한 유럽발 자본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온전히 희생할 수 있는 자비와 자애의 힘이 필요하며, 이것은 형제애가 밑바탕에 깔린 러시아의 정신으로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도스또예프스끼 개인의 생각일 뿐이다. 이런 미덕들이 러시아의 토양과 밀착되어있다는 근거는 자의적으로만 성립한다.
결과적으로 아직까지는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한 작가의 날카로운 유럽 비판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후의 대작들이 그것들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니 바로 직후에 읽게 될 죄와 벌이나 후기 대작들을 통해 그 증명 과정을 지켜볼 예정이다. 도스또예프스끼 읽기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문장
자기 의지에 따라 완전히 의식적으로, 그리고 누구에 의해 강요받지도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일이야말로 개성의 최고의 발전, 개성의 최고의 힘, 최고의 자제력, 최고의 자유 의지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유 의지로써 목숨을 바치는 행위,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화형을 당하는 행위는 개성이 가장 강하게 발전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개성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권리를 완전히 확신하고 있고 자신에 대해 이미 어떠한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발전한 개성은 자신의 개성으로 타인을 위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개성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똑같이 자기 권리를 갖는 행복한 개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두를 그들 타인에게 내주는 이상의 아무런 유용함도 없는 것이다.
p.46
자기 희생이야말로 개성이 최고로 발현된 상태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이 생각의 흐름에 반했다. 완전한 개성, 즉 완전한 자신을 완성한 사람만이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행위가 자신의 개성과 존엄성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성향을 타고난 나에게 두고 두고 선물해주고 싶은 명문이라 발췌했다. 기꺼이 자기 희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될 때까지 읽고 쓰고 성장하고 싶다.
악어 외
악몽 같은 이야기
p.9 이 악몽 같은 이야기는,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이 억제할 수 없는 힘과 뭉클한 감동을 일으키는 충동을 안고 부활하여 조국의 모든 용감무쌍한 아들들이 새로운 운명과 희망에 대한 열정을 태우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절에 벌어졌던 일이다.
사회상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도 나오지만 한참 혁명(?)의 불길이 지펴지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 단편은 그 당시, 시대착오적인 자가 당착에 빠져 큰 망신을 당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갑자기 읽기 싫다.)
p.13 이반 일리치 자신도 이따금 자기가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하고 좀스레 군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그가 종종 어떤 병적인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거나 무엇에 대해 쉽사리 후회도 한다는 점이다. (중략) 물론 이런 것들이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기도 했고, 그에게 많은 명예를 가져다 주기도 했으나 30분 후면 이런 생각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삶의 맥락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지 못한 메타 인지는 무용지물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라 흥미로웠다.
p.17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믿음을 가지면 개혁에 대해서도 믿게 되고, 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것, 말하자면 도덕적으로 서로를 포용할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모든 문제를 좋게 풀어나갈 거란 말씀입니다.
이런 생각 자체도 매우 나이브하지만, 실제 이반이 하는 행동은 이와는 정반대라는 점이 우습다.
p.26 우리는 우리 주인공의 이 느낌을 옮겨 보면서 알맹이만이라도, 다시 말하자면 그 느낌 안에 담긴 가장 필수적이고 사실적인 것을 독자들이 떠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는 느낌 중의 많은 것들이 일상의 언어로 옮겨져 버리고 나면 전혀 그럴듯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는 모든 이상도, 현실로 옮겨진 후에는 매우 초라한 것일 때가 많다.
p.79 그에게는 개미들처럼 꺾이지 않는 질긴 생활력이 있었다. 개미집을 부순다면 그 즉시 그들은 다시 집을 만들기 시작할 것이며, 다시 또 부순다고 해도 다시 또 만들기 시작할 것이고, 더 부숴 본다 하더라도 지치지 않고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이들은 주거를 안저시키고 억척스레 살림을 꾸려 가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이번 단편의 피해자인 쁘셀도니모프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이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히려 이런 성격이 안타깝다.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1. 서문을 대신하여
p.103 우리 러시아 인들 대부분은 (잡지라고 읽고 있다면) 러시아보다 유럽을 두 배는 더 잘 알고 있을 걸세. 예의상 두 배라고 했지만 아마 열 배는 될 것이네.
유럽에 대한 로망으로 가득차 있는 러시아 사람들과, 그들과 다르지 않아 유럽 여행을 손꼽아 기대왔지만 여행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도스또예프스끼의 한탄이 적혀 있는 재미있는 단편이다. 제목이 무슨 의미인가 했더니, 유럽에 대한 러시아인의 감상을 뜻하는 듯하다.
2. 기차 안에서
p.114 우리의 삶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이 유럽 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과연 우리 중 어느 누가 이러한 영향이나 호소, 압력에 대항하여 버틸 수 있었겠는가?
러시안으로서 유럽 문명에 젖어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종의 불가항력이었음을 설명하려고 한다.
3. 그리고 완전히 여분의 장
p.128 한마디로 주문과 명령을 받고 들어온 유럽은 뻬쩨르부르그 ㅡ 이 세상의 모든 도시들 중에서 가장 환상적인 역사를 가진 가장 환상적인 도시 ㅡ 에서 시작되어 당시 놀라울 정도로 편안하게 우리 나라에 눌러앉게 되었다.
p.129 그 결과 이제는 달라져서, 뻬쩨르부르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지금 우리는 완전한 유럽 인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p136 제발, 친구들, 내가 지금 갑자기 문명이란 발전이 아니고, 그 반대로 최근 유럽에서는 문명이 모든 발전 위에 채찍과 감옥과 함께 서 있다는 장광설을 늘어놓고 싶어한다고는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p.137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손을 허리에 대고 침을 뱉으며 민중 위에 서 있는 것인가! 틀림이 없다는 믿음, 적발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습지 않은가. 이러한 믿음, 혹은 민중에 대한 단순한 허세, 혹은 유럽 문명의 형식에 대한 아무 생각 없는 노예적인 숭배, 이것이 훨씬 더 우습지 않은가.
유럽 문명의 진보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유럽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아무런 의식 없이 그저 노예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4. 여행자들에게는 여분이 아닌 장
외국인의 소재와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스파이를 사용해서 감시하고, 호텔에서조차 일일이 인상 착의를 보고해야 하는 빅브라더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이게 실화인가?
5. 바알 신
p.151 나는 파리에 대한 정의를 내렸고 (중략) 그것은 바로 파리가 전 지구상에서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선행적인 도시라는 사실이다. 얼마나 대단한 질서인가! 얼마나 분별 있고 확실하며 견고하게 확립된 관계인가. 모든 것이 얼마나 잘 보장되어 있고 구별되어 있는가. 모든 사람이 얼마나 만족스러워 하고, 얼마나 만족스럽고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키려 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사람은 노력에 노력을 더한 결과 실제로 만족스럽고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키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리고......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p.157 이곳에서 당신들이 보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순종적이고 고무된 의식의 상실이다.
노예적인 마인드가 빚어낸 유토피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6. 부르주아 체험
p.167 행운을 쌓아서 가능한 한 더 많은 것을 얻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도덕 법전이 되었으며, 파리 시민들의 교리 문답이 되었다.
파리의 부르주아, 여기서 부르주아들은 현실 감각 없이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세계를 지키는 것에 몰두하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단순히 유산 계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에 유의하자.
p.172 시에스 이후 곧 자유liberte, 평등egalite, 박애 fraternite가 선언되었다.
p.172 자유 : 언제 모든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1백만 프랑을 가지고 있을 때다. (중략) 1백만 프랑이 없는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고 싶은 무슨 일에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다.
p.172 평등 : 평등이 지금 적용되고 있는 형태와 관련해서 프랑스 인들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p.173 박애 : 박애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주어지는 것이며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자연, 일반적으로 서구의 자연 속에는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히려 개인주의 워칙, 즉 독립, 강화된 자기 보존, 자기 산업, 자신만의 <나>안에서의 자결, 자신 이외의 존재하는 모든 것과 완전히 동등하고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자기 권리를 갖는 개별주의 원칙으로써 모든 자연이나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 대비되는 <나>의 원칙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부르주아들이 추구하는 세 가지 가치들, 그러나 이것들은 각각의 이유로 전혀 실현되고 있지 않다.
p.174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개성이 없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진정 무개성 속에 구원이 존재하는가? 반대, 그 반대라고 나는 말하겠다. 무개성이 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개인적이 되어야 하며, 심지어 지금 서구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도 높게 개인적이 되어야 한다. (중략) 자기 의지에 따라 완전히 의식적으로, 그리고 누구에 의해 강요받지도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일이야말로 개성의 최고의 발전, 개성의 최고의 힘, 최고의 자제력, 최고의 자유 의지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174 개성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권리를 완전히 확신하고 있고 자신에 대해 이미 어떠한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발전한 개성은 자신의 개성으로 타인을 위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개성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똑같이 자기 권리를 갖는 행복한 개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이 모두를 그들 타인에게 내주는 이상의 아무런 유용함도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의 개인주의적인 행동이 박애의 성장을 막는다는 것에 대해, 누군가 '그럼 박애를 위해 개성 없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거냐?'는 말에 대한 반박이다. 조금 궤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박애 정신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은 이미 개인으로서 완성된 존재라는 것이 핵심인 것 같다. 개인으로서 완성되지 못한 존재가 제대로 된 박애 정신을 발휘할 수는 없다는 것. 박애 자체가 이미 '완성된 개인'을 전제로 가능한 개념인 것이다.
p.175 박애적인 사랑의 원리가 생기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박애, 공동체, 화합에 이끌려야 한다. (중략) 한마디로 박애적인 공동체는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해야 하며,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태어나든지 아니면 태곳적부터 그러한 습관을 자기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박애를 이성적이고 지각 있는 언어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p.176 <(상략) 나는 사라져서 완전한 무관심과 하나로 합쳐질 것이며 단지 당신들의 박애만이 번영하고 남아있을 것입니다.>
p.176 반대로 박애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서도 모든 것을 가져가기 바란다. 우리는 당신이 가능한 한 더 많은 자유, 가능한 한 더 많은 자기 발현을 누릴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이제 어떠한 적, 어떠한 사람, 어떠한 자연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당신 편이며, 당신의 안전을 보장한다. 우리는 끈기 있게 당신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하략)>
p.177 모든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본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이성에 대한 모욕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박애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저자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박해를 이성적이고 자각있는 언어로 바꿔본다. 그러나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은 감정과 본성에 호소하는 언어이다. 이성의 힘으로는 박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p.177 그러나 서구인들에게 박애주의 정신이 없고, 반대로 계속해서 고립되어 있으면서 손에 칼을 쥐고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개별주의, 개인주의 원칙이 존재하고 있다면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사회주의자들은 박애주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박애주의를 가지도록 설득하기 시작한다. 박애주의가 없기 때문에 박애주의를 만들고 구성하기를 원한다. (중략) 미래의 박애주의에 정의를 내리기 시작하며 무게와 분량을 계산하고 이익이 된다고 유혹하고 설명하고 가르친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서구인들의 이성/개인 중심 사회에서 박애의 정신을 퍼뜨리는 것을 매우 어렵다. 이성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감정과 본성에 기초한 박애보다는 이성에 중심을 둔 개인주의의 방식이 훨씬 와닿기 쉬운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 사회주의는 패퇴하고 부르주아들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p.180 그때부터 부르주아는 안락하게 살게 되었지만, 그 안락함에 대해서 무서운 대가를 지불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모든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얻게 될 때 고통스럽게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친구들이여, 여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네.
그러나 그렇게 득세한 부르주아들의 삶이 과연 행복한가? 그들은 안락을 얻는 대가로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안락을 빼앗길지 모르는 모든 가능성과 상황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자신을 감출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7. 앞 장의 계속
p.180 하인 근성이 부르주아의 본성 속으로 점점 더 많이 계속해서 스며들고 있고 그것이 점점 더 미덕으로 간주되고 있다.
p.181 프랑스 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권력자의 눈앞으로 무섭게 달려들어 그들 앞에서 전혀 아무런 사심 없이, 굽실거리기를 좋아한다.
p.182 양심과 신념의 자유가 이 세상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자유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에 그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p.185 이곳에는 정직한 사람들이 매우 많지만 명예에 대한 감각은 완전히 상실했다. 때문에 자신들이 행하는 것이 선행 때문임을 알지 못한 채 비열한 행동을 하고 있다.
p.187 파리를 제외하고 그들이 전 지구에 대해서 아는 바는 거의 없다. 또한 전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민족적인 성향으로서 매우 특징적이다.
p.189 단지 웅변이 있을 뿐 그 이상의 아무 일도 없으며, 말, 말, 말들이 있을 뿐, 이 말들로부터 결정적인 아무 결론도 나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들은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만으로도 정말, 정말로 만족하고 있다.
안락을 위해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된 부르주아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왜곡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자신들의 좁은 시야에 갇혀 단기적인 이득만을 위해 살아가고,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하여 양심과 신념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프랑스는 바칼로레아 문제 같은 것들로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이런 무념한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국민성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역시 돈앞에 인간은 평등한 모양이다.
8. 브리브리와 마 비슈
p.207 그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정치적 평안이며, 그에게는 좀 더 평안한 안식처를 만들 목적으로 돈을 저축할 권리가 있다.
p.212 귀스타브는 반드시 추악한 말로 욕설을 퍼붓고 1백만 프랑에 침을 뱉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부르주아들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결함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걱정할 것은 없다. 1백만 프랑이 행복한 한 쌍을 지나쳐 버리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마지막에는 항상 선행에 대한 보상의 형태를 띠게 된다. 부르주아는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p.212 브리브리와 마 비슈는 완전히 만족하고 안정을 되찾고 위로받은 상태로 극장에서 나온다.
파리의 부르주아 계급인 브리브리와 그의 아내를 칭하는 마 비슈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얼마나 나이브한 세계관 속에서 밑바닥 없는 안락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귀스타브가 등장하는 멜로드라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현실과 괴리된 세계 속에서 자신들만의 정원을 가꿔나가는 부르주아들의 삶이란.
악어 : 이상한 사건 혹은 아케이드에서의 돌발적 사건
1
p.221 마지막 트림을 하려는 듯한 아가리 속에서 갑자기 순간적으로 얼굴에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반 마뜨베이치의 머리가 튀어나왔고, 그의 안경이 순식간에 코에서 벗겨져 상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절망에 찬 머리는 단지 모든 사물들에 다시 한번 마지막 시선을 보내고, 세상의 모든 만족에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하기 위해 튀어나온 것 같았다.
p.222 여기에는 뭔가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이 들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순간적으로 갑자기 코방귀를 뀌고 말았다.
악어를 보러간 친구가 악어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을 묘사한 장면인데 너무 웃겨서 발췌했다. 첫번째 문단을 읽고 킬킬대면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ㅠㅠ 싶었는데 이어지는 화자의 실소에 안심했다.
p.230 「불쌍한 사람, 어쩌다 그렇게 빠져 버렸는지...... 아무런 재미도 없고 어둡기만 할 텐데....... 내게 그이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게 정말 유감이에요...... 그러고 보니 이제 미망인과 다를 바 없군요.」 그녀는 분명 자신의 새로운 상황에 흥미를 느끼면서 매혹적인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흠, 어쨌든 그이가 안 됐어요!」
p.231 한마디로 젊고 흥미를 끄는 아내가 남편의 파멸에 대해 갖는 명백하고 자연스러운 근심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이 작품 자체가 부르주아를 풍자하는 작품인 만큼, 이 또라이(?)같은 모습도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부르주아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과장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안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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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6 「(전략)그런데 중요한 것은 악어가 사유 재산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모든 행동에는 소위 경제 원칙이라는 게 있네. 경제 원칙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네.(후략)」
p.238 「(전략)우리들 자신이 조국으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경 쓰고 있는 상황에서 (중략) 우리는 외국 소유주를 비호해 주기는커녕 그의 기본적인 자산의 배를 가르려고 하고 있지 않나. 자, 이것이 과연 타당한 행동인가? 내 생각으로는 이반 마뜨베이치가 조국의 진정한 아들로서 자신에 의해서 외국 악어의 가치를 두 배, 아니 어쩌면 세 배로 증대시킨다는 사실에 더욱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 같네.」
p.239 「(전략)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가 그에게 악어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고 했나? 착실한 사람이, 일정한 관등이 있고 합법적인 결혼도 한 사람이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하다니! 있을 수나 있는 일인가?」
이 부분을 읽으니 작가가 정말 비판하고 싶었던 대상은 단지 유럽의 부르주아들이 아니라, 그들이 사고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러시아의 신흥 부르주아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 외에는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
p.240 「이렇게 할 수는 없을까요? 만약 그가 괴물의 뱃속에 있도록 운명 지워졌고, 신의 의지로 괴물의 배가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면, 그가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도록 청원서를 낼 수는 없을까요?」 내가 말했다.
「흠...... 월급이 없는 휴가 형식으로 말이지......?」
「아닙니다, 월급을 받을 수는 없겠습니까?」
「어떤 근거로 말인가?」
「출장 형식으로.......」
「무슨 출장, 그리고 어디로?」
「뱃속으로 말입니다, 악어의 뱃속으로요....... (후략)」
ㅋㅋㅋㅋㅋ아니 진짜ㅋㅋㅋㅋ
3
p.246 「(전략)그 결과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질 테고, 비록 숨겨져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될 걸세. 공휴인 관람객들에게는 설교를 할 생각이야. 경험을 통해 배운 사람으로서 위대함과 운명 앞에서의 겸손함에 대해 본보기가 되어 볼 생각이네! 말하자면 인류를 가르칠 설교자가 되어볼 생각이야.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괴물에 관해 보고할 수 있는 자연 과학적 정보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지.(후략)」
맙소사, 이제는 악어 뱃속에 갇힌 이반조차도 부르주아의 논리(=허영)에 사로잡힌다! 물론 그 말대로 악어 뱃속에 있으면 화제가 되긴 하겠지만... 엔딩이 슬슬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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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작품이라 뒷 이야기가 없지만 여기까지만 읽어도 충분한 것 같다. 결국 악어 뱃속(=수정궁)에 갇혀 있기를 선택한 이반 마뜨베이치와 그에게 사람들의 견해를 들려주기 위해 신문과 잡지를 수집하는 나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어느덧 악어 뱃속에 갇힌 마뜨베이치보다 악어가 더 불쌍하게 느껴진다.
역자 해설 1 / 악몽 같은 이야기 : <토양주의>를 향한 출구 찾기
p.275 도스또예프스끼는 쁘랄린스끼의 형상을 통해 새로이 러시아 사회의 주역이라 자처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 그들의 사회, 정치적 <본질>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분들이 해설 파트에서도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예전에는 내 해석과 해설이 다를 때가 많았는데 서서히 교집합이 생기는 걸 보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세계에 익숙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흐뭇하다.
p.278 도스또예프스끼가 이 중편을 통해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희화화하여 묘사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의 진보주의자와 민주주의자의 좌파 진영에 대해서도 동조하거나 입장을 같이 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도스또예프스끼가 자신의 잡지 『시대』의 노선을 좌나 우에 치우치지 않는 제3세력으로 설정했던 점에 비추어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p.279 고관 쁘랄린스끼의 뜻밖의 출현에 의해 강요된 부자연스러운 상황 속에서 피로연에 참석한 인물 대부분이 어색하게 행동하고 우스꽝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행동하는 유일한 인물로 쁘셀도니모프의 어머니가 형상화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귀결이 아니다. 그녀의 형상은 이후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여성상>의 전형이다.
p.280 자유주의자를 포함한 복고주의자의 본질에 대해 비판하고 대중과 괴리된 진보주의자를 희화화하면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제3의 대안으로 다른 유형의 인물인 쁘셀도니모프의 어머니를 내세운다.
p.281 <진정한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유럽의 모순에 최종적으로 화해하며, 모든 인간적인 것을 결합하는 러시아적인 정신 속에서 유럽적 고뇌의 출구를 제시하며, 그 정신 속에서 형제애로 모든 인간을 받아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위대한 보편적 조화와 그리스도의 복음서 법칙에 의한 전인류의 형제애에 입각한 완전한 화합의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책을 읽으면서 캐치하지 못한 부분이라 발췌했다. 자유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닌 제3의 세력을 표방하였고, 그것이 <구원의 여성상>으로 표현되는 쁘셀도미노프의 어머니로 형상화된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다만 이 이야기가 아직 나이브하게 들리는 건 내가 삐뚤어진 탓일까. 제3세력이라는 건 말은 좋지만... 그리고 사랑과 자애를 기저해 둔 인간상이라는 것도 말은 좋지만... 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p.281 도스또예프스끼가 선택한 소재의 시대적 역동성과 인물 형상에서 나타나는 예술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악몽 같은 이야기』는 동시대의 독자나 비평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거의 받지 못했다.
p.281 이것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60년대>에 나타났던 열광적인 현실 개혁과 진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차원에서 제3의 대안으로 러시아 사회 모순의 출구를 찾았던 도스또예프스끼의 <토양주의>가 자리 잡을 곳이 없었던 사정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이 작품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바로 해설하고 있다. <토양주의>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검색해도 안 나온다) 유럽의 모순적인 문제를 러시아의 토양에서 비롯된 정신, 자애든 사랑이든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견 자체가 근거가 없고 탁상공론인 감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의견이라 설득력이 없었던 게 아닐까? 비판의 지점은 유효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토양주의라는 용어를 쓰신 게 아닐지.
역자 해설 2 /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 러시아 공동체 건설에 대한 믿음
p.285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에는 예술적인 기념물이나 건축물, 교회, 풍경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그림과 같은 인상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삶의 신념, 삶의 원칙들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럽의 관념을 포착했고 유럽인들의 미스테리를 풀고자 했다.
유럽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유럽 여행을 떠났던 도스또예프스끼가 발견한 것은, 통제되고 속물화된 사회였다. 그것에 대한 비판과 러시아인의 갈 길을 고찰하고자 한 것이 이 작품인 것.
p.286 유럽은 우리의 국가적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독자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졌고, 유럽 문명은 더 이상 우리에게 유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롭기까지 하다. 서구에서조차 문명은 타락해 버렸고 발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p.287 파리 :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규정 지어져 있으며 통제되고 있다. (중략) 그들은 <질서의 정적> 속에서 굳어 가고 있는 것이다. (중략) 파리의 부르주아에게 있어서 돈이 최고의 선이며, 돈을 모으는 것이 최고의 선행이다. 따라서 그들은 부정 축재와 부르주아적 위선을 솔직하고 파렴치하게 옹호하는데,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들의 부르주아적 타락상을 당시 파리의 부르주아 연극에 대한 묘사를 통해 패러디하고 있다.
p.287 런던 : 파리의 부르주아 천국과는 반대로 런던은 자본주의적인 지옥이다.
p.288 두 도시에 대한 고찰 이후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역사 철학적인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자유는 백만장자들에게나 부여되었고, 평등은 공격적일 정도의 중요성을 얻었지만 반면 형제애는 얻지 못했다.
p.288 도스또예프스끼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를 강조한다. 만인을 위해 자신의 자유 의사로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개성이 최고로 발달한 것이며, 최고의 자유 의지의 표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러시아인들에게서 가능할 것이다.
p.288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 인들의 본성 속에는 형제애에 대한 요구가 놓여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유럽의 개미탑 대신에 러시아가 형제애적인 공동체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파리와 런던의 사례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속물심이 만들어낸 사회의 부정적인 이면을 확인한 뒤, 그것의 해독제로서 러시아인 고유의 형제애를 제안하고 있다. 이기심에 대응하는 자비심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형제애라는 것이 러시아 고유의 무언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비심에 대한 해석만큼은 개인적으로 놀라웠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개성의 경지에 오른 것이라는 역설말이다.
역자 해설 3 / 악어 : 급진주의에 대한 삐딱한 시선
p.290 「악어」는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발표된 다음 해에 발표된 풍자적 소극으로서, 두 작품의 기본적인 음조는 동일하다. (중략) 체르니셰프스끼를 중심으로 한 급진주의자들과 그들의 이념을 조롱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그들의 관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p.291 악어 내부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페쇄된 감옥에 불과하다. (중략) 그들이 고안해 내는 유토피아 세게는 단지 악어 내부와 같이 페쇄된 공간 안에서만 가능할 뿐, 실제 우리의 현실과는 괴리될 수밖에 없다.
p.291 실제로 도스또예프스끼가 강조하고자 헀던 것은 『작가 일기』에서 볼 수 있듯, 과거 전통과의 유대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상이나 감정을 주장하는 것에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단결심이 없고 서로의 사랑이 없고 공동 합치가 없으면 위대한 일은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다. 이것이 없이는 사회 자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악어>와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어떤 점에서 궤를 함께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가 강조하고 싶었던 '사랑'의 가치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이 책 전체의 테마를 아우르는 내용이기도 하여 발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