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시작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읽기를 시작한 이래, 드디어 처음으로 재독하게 되는 책이 나왔다. 일전에 읽었던 <지하로부터의 수기>다. 그때 이 책만 읽었을 때에는 솔직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기가 어려웠는데, 전작들은 모두 읽은 지금에 와서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든다. 과연 그때와는 감상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예전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에는 작가에 대한 호감만으로 책을 접했기 때문에 주인공의 모든 말을 긍정하려고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읽으면서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을 때가 많았지만 화자가 목놓아 외치는 핵심적인 이야기에는 공감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호의적인 태도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확실히 전작들을 모두 읽고 재독을 해서 그런지 전보다 눈에 보이는 게 많아졌다. 특히 바로 이전작인 <상처받은 사람들>과 <죽음의 집의 기록>이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 만약 이 책의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저 두 작품을 먼저 접해보길 권한다. 다른 책도 마찬가지지만 이 책은 특히나 이 한 권만 읽어서는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도스또예프스끼의 입문 도서로 추천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매우 반대하는 바이다...)
감상
무엇이 그대를 지하실에 가뒀는가
이 책의 화자는 도스또예프스끼가 내세워온 인물들의 전형(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그것에 굴하지 않으려 분노를 비롯한 부정적인 형식으로 표현하는)을 따라가고 있다. 이 전형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체념이다. 그들은 모두 사지가 절단된 유형수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노예이다.
그가 그렇게 체념하는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에 충실한 삶이다. 이성과 과학이 만연한 시기에, 컴퓨터처럼 살아가면 모든 것이 행복해지리라는 나이브한 생각에 대해 화자는 결벽증에 가까운 증오를 보인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게 들리지만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머리로는 그만해야겠다 싶으면서도 마음은 끊을 수가 없어서 만남을 질질 이어가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던가. 이렇듯, 인간은 이성으로만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생물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기도 한다. '욕구란 삶의 모든 국면들의 표현(p.46)'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표현한다. 특정한 사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지, 특정한 감정을 얻기 위해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욕구란 그런 표현 방식 그 자체다. 욕구가 잘려나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으며, 결국 인간은 겁쟁이이자 노예로서 (p.72)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이성적인 행동은 필수다. 모두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표현하면 사회는 엉망이 될 테니까. 화자는 이런 사회, 즉 겁쟁이와 노예가 되어야만 존속될 수 있는 사회에 대해 분노하며 체념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불행을 원한다. 그러나 2장을 읽다 보면 그가 말하는 '이성'과 '욕망'이 좀 더 깊은 영역에 있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사회는 모범생을 바란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이성이란, 단순이 사람이 가진 이성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이성을 의미한다. 나이가 들면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한 뒤 결혼을 하는 것이 이성적이라고 사회는 우리에게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 책에서 화자가 말하는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이런 삶에 대해 어떠한 고찰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기에 바쁘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돈을 벌고 멋진 파트너를 갖는 것이 당연히 더 좋은 삶이며 그것이 선(善)이라는 생각에 그 외의 모든 문제는 차마 생각해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이런 나이브한 생각을 화자는 '낭만적'인 태도라고 부른다.
'욕망'은 그런 이성적이고 낭만적인 태도에 대한 반항을 의미한다. 전문직을 얻는 것이 안전하다고 외치는 사회 앞에서 나는 예술을 하고 싶다는 외치는 것 또한 욕망의 표현이다. 이성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사회 앞에서 나는 독신으로 살고 싶다고 외치는 것 또한 욕망의 표현이다. 설령 그 결과, 불행을 얻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차라리 나음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1장의 내용이다.
그러나 정작 화자는 그런 불행(사회적으로 배제되는)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파멸한다. 2장에 등장하는 리자와의 대화에서 그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테이블 위의 양아치
2장에 등장하는 리자와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묵혀온 모든 사상과 생각을 리자에게 폭언하듯이 쏟아붓는다. 언뜻 맞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 회화에는 아주 결정적인 것이 배제되어 있다. 바로 '맥락'이다. 그는 리자의 삶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사상을 쏟아 붓는다. 자유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나쁘다는 전제 하나로 리자의 삶을 짓뭉개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어느 정도 자신의 삶을 컨트롤할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저작에서 빅터 프랭클이 말했듯, 나치 하의 감옥에서도 사람은 희망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맥락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수용소에서 찾을 수 있는 자유와 일반적인 사회에서 찾을 수 있는 자유의 종류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맥락을 배제한 상태로 단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정의하는 행위는 사실상 폭력과 다를 게 없다. 폭력이란 상대의 의지와 맥락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 대한 무지 때문에 화자는 결국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탁상공론으로 만들어낸 이론은 이상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테이블 위에서나 가능한 이상일 뿐이다. 이상을 직시하되 현실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화자는 이상만을 직시하며 현실 자체를 경멸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현실에 기반이 되지 않은 이상을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 어떤 좋은 사상과 진보적인 개념도 현실을 벗어나면 망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사고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남은 분량을 모두 할애하며 증명된다. 정작 리자에게 자유 의지에 대해서 잔뜩 설파해놓고는, 그 자신은 자신의 가난을 두려워하며 이것을 리자에게 들킬까 두려워하고 막상 들켰을 때에는 오히려 찾아온 리자를 모욕하면서 분노한다. 그 자신조차 자신이 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리자에게 그것을 설파한 것에 뒤늦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 말대로 그의 주장 자체는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든 무분별한 추종은 자유 의지에 대한 모욕이기 쉬우니까. 다만, 행동과 생각이 어긋나는 시점에서 이 화자는 화자가 아닌 풍자과 비꼼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화자는 주어가 아닌 목적어로 강등된다. 삶에서 그 누구보다 주어로서 살고 싶었지만, 삶의 맥락에서 벗어난 순간 목적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절규를 담아낸 것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의 존재를 '역설주의자(p.197)'라고 표현한다. 누구보다 자유롭기를 외치지만,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부자유스러운 그의 삶은 존재 자체가 역설이다. 아무리 완벽한 글이라도 읽어줄 사람 하나 없는 지하실에선 의미를 갖지 못한다. 제목이 '지하의 수기'가 아니라 '지하로부터의 수기'인 까닭은, 이것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보내는 편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지하에 파묻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사람의 절규다.
허나 화자처럼 극단적인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우린 누구나 내면에 자신만의 지하실을 가지고 있다. 현실과 괴리되어 자신만의 생각이나 아집에 갇혀 있는 부분들 말이다. 지하실에서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다. 그러나 만약 그 지하실에서의 삶이 답답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한 번쯤은 위를 쳐다볼 필요가 있다. 지상으로 나가는 것이 굴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지하에서의 경험이 지상의 삶에 대한 훌륭한 반추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지하실을 가지자. 하지만 가끔 지상과 오고 가면서 나의 지하실을 견고하게 넓혀나가자. 이성과 욕구 모두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이며, 이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사용하는 방식을 익히는 게 중요하니까. 그것을 위해서는 현실이라는 맥락을 함부로 배제해선 안 되겠다. 무엇을 생각하든 맥락을 고려하자. 맥락을 고려할 때 우린 진정한 주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장
이성은 인간의 사유 능력만을 만족시켜줄 뿐이다. 반면 욕구라는 것은 삶의 모든 국면들의 표현이다.
p.46
욕구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이며, 이것이 이 작품 전체를 꿰뚫는 문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욕구를 천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성의 단정함 못지 않게 욕구의 거칠음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겠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제1부 지하실
1
p.9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약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책의 유명한 첫 구절이다. 스스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병든 인간임을 공지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p.10 내가 치료 받기를 원치 않는 것은 증오심 때문이다.
p.11 그런데 여러분, 내 증오심의 주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당신네들은 알고 있겠죠? 그렇다. 모든 문제는 내가 악하지도 않고 못된 인간이 될 수도 없으며, 내가 자주 심지어는 가장 화가 났을 때조차도, 단지 참새들만을 쓸데없이 놀라게 해서 스스로 위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수치심과 함께 자각한다는 게 있으며, 여기에 바로 가장 추악한 것이 담겨 있다.
p.12 나는 사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스스로의 병적 상태를 방치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증오심' 때문이라고 한다. 뒤로 가면 이는 결국 질서에 대한 증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이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다.
2
p.14 당신께 맹세컨대,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이것은 병이다. 진짜 완전한 병이다.
p.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나친 생각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모든 의식이 병이라는 것을 절대 확신하고 있다.
p.16 그러다가 마침내 이 쓰라린 비애는 어떤 치욕스럽고 저주받을 달콤함으로 바뀌었고, 드디어는 결정적이고 진지한 쾌락으로 변하고 말았다! (중략) 이 경우의 쾌락이란 바로 자신의 비하를 너무나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모든 의식이 병이라는 발상은 참신하고도 날카롭게 느껴진다. 그렇게 너무 많은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화자는, 기어이 그것을 체념하고 자신을 비하함으로서 쾌락을 느끼는 단계로 나아간다.
p.17 나로 말하자면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나는 이것이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자의식과 자존심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고, 이것을 악에 바져 부득불 물고 늘어지는 인물들의 그의 작품에서 늘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p.18 절망 같은 것에도 가장 열렬한 쾌락들이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낄 때 특히 그렇다.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이윽고 모든 것을 체념한 뒤에 오는 홀가분함이 느껴진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쾌락은 조금 더 자기파괴적이다. 그런 자신을 비하함으로서 세상에 억지를 부리는 데서 오는 쾌락인 것이다.
3
p.22 그러나 바로 이러한 차갑고 끔찍스러운 절반의 절망과 절반의 믿음 안에 (중략) 내가 말했던 그 이상한 쾌락의 진수가 있다.
화자의 체념은 분노를 표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체념이 아닌, 악에 바친 자기 비하다. 이후의 내용에서 왜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4
p.25 (고통받는 것이 쾌감인 이유) 첫째는, 당신이 의식하기에는 너무나 굴욕적인 당신 고통의 총체적인 무목적성이다.
p.27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몸을 뒤틀지 않고 신음할 수 있지만 단지 악의와 심술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도 은밀히 알고 있다.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는 것이 쾌감인 이유는, 그것이 의식한 채로 내버려두기엔 너무나 굴욕적이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론 악의와 심술에 바쳐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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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그리고 신사 양반, 모든 것은 권태, 바로 그 권태 때문이었다. 무력감이 억누른다. 의식의 직접적이며 당연하고 솔직한 결말은 정말 이 무기력이다.
스스로를 비하하는 이유가 바로 권태와 무기력 때문이라는 화자의 설명. 스스로의 의지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행동은 바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의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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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 내가 게으름뱅이였다면 권리에 따라 나는 일류 클럽의 회원이 되었을 것이고,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끊임없이 존경하는 일에 헌신했을 것이다. (중략) 그는 이것을 자신의 긍정적인 덕목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을 의심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게으름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소 색다르게 쓰고 있다. 자신을 끊임없이 쇄신하는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라고 부른다.
7
p.35 그리고 만약에 때때로 인간의 이익이, 그가 자신에게 유리한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해로운 어떤 것을 원하는 데에 있을 수 있다고, 있어야만 한다고 판명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p.43 인간은 항상 어디에서나, 그가 누구이든 간에, 절대적으로 이성과 그의 이익이 지시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어떤 것을 원할 수 있고 심지어는 긍정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욕망으로 기우는 화자의 사고 방식이 드러난 장면이다. 이성과 과학으로 모든 것을 컴퓨터처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화자는 인간은 욕망을 완전히 거스를 수 없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다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8
p.44 만약 언젠가 실제로 우리의 모든 욕구들과 변덕들을 위한 공식을 발견한다면 (중략) 그는 곧바로 인간에서 기계의 톱니바퀴나 혹은 그런 어떤 것으로 바뀔 것이다.
p.46 이성은 인간의 사유 능력만을 만족시켜줄 뿐이다. 반면 욕구라는 것은 삶의 모든 국면들의 표현이다.
p.47 나는 이성이 결코 배울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p.47 즉 (욕망은) 우리의 인간성과 개성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이성을 추구하는 인간은 모든 기력을 잃은 채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는 '게으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욕망을 '삶의 모든 국면들의 표현'이라고 비유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증명하는 기재인 것이다.
p.48 그러나 인간이 어리석지 않다 하더라도, 그는 감사할 줄을 모른다. (중략) 나는 심지어 인간에 대한 최고의 정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다리를 가진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
p.38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결함은 아니다. 그의 가장 큰 결함은 끝이 없는 무례함이다. (중략) 무례함이란 따라서 무분별함이다.
뒤통수를 한 대 맞는 듯한 정의다.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며, 무례하고, 그것은 무분별함에서 나온다. 즉, 인간은 본래 무분별한 존재(=욕망의 존재)인 것이다.
p.51 모든 인간의 일이란 정말로 매순간마다 그가 톱니바퀴가 아니라 인간임을 자신에게 입증시키는 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이길 원치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하며, 그것의 기반은 욕망의 표현이다.
9
p.53 어째서 당신은 이성과 산술의 논쟁에 의해 보장된 진정하고 정상적인 이익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항상 인간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며 모든 인류를 위한 법칙이라고 그토록 완벽하게 확신하고 있는가?
p.55 왜 당신은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것만이, 한마디로 평안만이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그토록 확고하고도 엄숙하게 확신하고 있는가?
p.56 나는 인간이 진정한 고통을, 즉, 파괴와 혼돈을 결코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의식의 유일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삶이 정말 완벽하고 행복한 삶인가? 욕망과 불행으로 점철된 삶 또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일 수 있다는 통찰이 무섭다. 흔히들 우린 마약으로 일찍 삶을 마감한 예술가들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점에서 그들은 자신의 모든 욕망을 실현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사례지만,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도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존재인 것이다.
10
p.59 그러나 어쨌든, 당신은 알고 있는가? 나는 나 같은 지하 생활자들은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중략) 만일 그들이 세상에 뛰쳐나와 말문을 터트리면, 그때 그들은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욕망에 근거한 삶이 인간다운 것이라고는 하나,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욕망은 어느 정도 자제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하 생활자들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 이런 점까지는 화자도 인식하고 있는 듯한데...
11
p.60 나는 울화통이 터질 정도로 정상적인 인간을 질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을 보는 나로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사회의 특성상, 그런 이성적인 인간들이 득세할 수밖에 없는 것에 한탄하면서도 그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는 화자의 아집이 드러난다.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1
p.72 예의 바르고 진보적인 인간은 허영을 부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끝없는 요구를 해야 하며 자신을 증오할 정도로까지 자신을 경멸해야했다.
p.72 우리 시대의 모든 예의 바른 사람은 겁쟁이이고 노예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여기서 예의 바르고 진보적인 인간이란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사회의 특성상 그런 이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주류를 이룰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존재들은 결국 겁쟁이인 동시에 노예일 수밖에 없다. 겁쟁이와 노예로 이루어진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 것이다.
p.75 우리 낭만주의자의 성격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보고 그리고 가장 훌륭한 정신과 비교할 경우에라도 더 잘 보는 것이며, 어느 누구와도 혹은 어떤 것과도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느 누구도, 혹은 어떤 것도 또한 싫어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을 우회하고 모든 것을 양보하고 모든 사람을 외교적으로 대하는 것이며, 유용하고 실용적인 목표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어떤 종류의 공공 주택들, 연금들, 훈장들), 몇 권의 서정시들을 통해 그러한 목표를 모든 열의와 구별하는 것과 동시에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그들의 삶이 끝날 때까지 자신 안에 고이 간직하는 것, 그리고 또한 만일, 그 똑같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들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들 자신을 어떤 보석상의 싸구려 보석들처럼 탈지면 안에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이후 화자가 사용하는 '낭만주의자'라는 단어는 기존의 낭만주의자와는 정의가 다르다. 그것을 서술한 부분이라 일단 발췌해둔다. 아무래도 1장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이성적인 인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p.77 나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모든 것을 외부의 감각들로 잠재우기를 원했다. 외부의 감각들 중에서 내게 유일하게 가능했던 것은 독서였다.
p.78 정확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이것으로 주위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이유가 이것이 아닌가하여 발췌했다. 하지만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독서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2
p.90 영웅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완전히 더러워질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진흙 속에 뒹굴어도 괜찮다.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이러한 <아름답고 숭고한 모든 것>의 용솟음은 내가 작은 타락에 빠져 있을 때 일어났고, 바로 내가 나락까지 떨어졌을 때 있었다는 것이다.
열등감으로 얼룩진 화자에게도 종종 자아 존중의 시간이 찾아오곤 한다. 그러나 화자는 이 시간을 통해 성장하기 보다 예술로 도피하거나 스스로의 열등감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내가 성장 지향의 인간이라 그런지 이런 모습을 보면 조금 안타깝다. 아마도 나는 화자가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3
p.98 그 외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즈베르꼬프를 임기응변과 세련된 매너의 전문가로 간주하는 것이 이미 기정 사실처럼 되어 있었다. 이 마지막 사실이 특히 나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나는 거칠고 확신에 찬 그의 어조를, 자신의 농담에 자아 도취된 그의 모습을 혐오했다. 그는 비록 바른말을 잘했지만, 그의 농담들은 항상 매우 어리석은 것이었다. 나는 그의 잘생긴, 그러나 텅 빈 것 같은 얼굴을 혐오했다.
화자와는 정반대의 유형, 즉 이성적이고 낭만적인 유형의 인간으로서 즈베르꼬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적응한 즈베르꼬프에 대해 화자는 경멸을 감추지 못하는데, 즈베르꼬프를 보니 화자가 이런 인물들을 왜 싫어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맹이는 없고 환경에 맞춰 자신을 꾸미기에 바쁜 존재들을 경멸하는 것이다. 그렇게 존경받을 바에는 불행하게 살겠다는 화자의 열등감과 결벽증이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p.105 그들은 필수적인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면한 충격적인 주제들에 관한 모든 관심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것은 상처받은 허영심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발, 나에게 그런 진부하고 지겨운 대화상의 시비는 걸지 말기 바란다. <즉, 나는 단지 몽상가였고, 반면 그들은 이미 그때 현실적인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식 말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어떤 현실적인 삶도 이해하지 못했고, 맹세하건대 바로 이것 때문에 나는 그들에 대해서 더욱더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p.106 정반대로, 그들은 가장 명백하고 눈에 확 띄는 현실을 환상적일 정도로 어리석은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직 성공만을 존경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들은 모욕받고 짓밟힌 것들을 잔인하고 수치스럽게 조롱했다. 그들에게 직위란 지성과 동등한 것이었다. 열여섯에 그들은 이미 편하게 돈벌 수 있는 직업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화자가 생각하는 이성적 낭만주의자의 정의를 보다 날카롭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 발췌했다. 여기서 이성적이라는 건, 개인의 고찰과 고뇌를 통해 얻어낸 이성이 아닌 사회가 부여한 이성을 무분별하게 신뢰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낭만주의자란,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즉 사회가 요구하는 삶을 나이브하게 추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중요한 부분이니 체크해둬야겠다.
4
친구들과 만나 자신의 열등감을 마구 폭발시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읽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정도의 자의식이 구절구절 넘쳐 흐른다. 그의 생각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그 논리를 자신의 성장이 아닌 타인의 인정을 위해 사용하는 시점에서 화자는 우스꽝스러운 꼰대에 불과하다.
5
p.134 <나는 기쁘다. 실제로 내가 그녀에게 혐오스럽게 보일 테니까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2차를 떠난 친구들을 뒤쫓다가 창녀인 리자와 만나게 된 화자. 그런 자신의 모습이 추한 것을 보고도, 그것이 기쁘다고 자기 위로를 한다. 자신의 반항 정신이 외모로 드러난 것이 만족스럽다는 뜻일까? 앞서 그가 열심히 얘기했던 '욕망에 충실한 인간'으로서의 외견이 혐오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6
창녀인 리자에게 자신의 사상 - 자기 자신의 자유(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를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일장 연설로 풀어놓기 시작한다. 물론 그에 대한 리자의 반응은 차갑다. 리자의 현실은 화자가 말하는 이상에 부합하기에는 너무나 먼 곳에 떨어져 있기에... 화자의 사상이 얼마나 탁상공론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7
p.152 습관은 사람들에게 어떤 빌어먹을 짓도 하게 만들지.
습관이라는 건 뇌의 최적화된 행동을 의미하며, 이것은 쉽게 자유 의지를 거스르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나쁜 짓을 하던 사람은 계속 나쁜 짓을 하게 마련이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 또한 습관이 될 수 있다. 습관이 운명을 만드는 것이다.
p.152 가장 비천한 농부는 노동자로 고용될 수도 있어. 그러나 그는 자신을 완전한 노예로 생각지 않아, 그리고 그는 그 기간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 너의 기간은 얼마나 되지? 그냥 생각해 봐, 무엇 때문에 너는 이곳에서 포기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건지 말야. 너는 너의 영혼을 노예로 만들고 있어, 네가 주어서는 안 될 영혼을 말이야, 너의 육체와 함께!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런 얘기를 리자에게 하는 건 너무 가혹한 것 같다.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마음껏 표현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것 또한 일종의 특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맥락이 배제된 단순한 사고와 이론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점에서 화자는 어긋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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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5 내가 계속 정신을 못 차리고 반란을 계속하면, 그는 나를 쳐다보며 갑자기 한숨짓기 시작하는데, 마치 그런 한숨으로 나의 도덕적 타락의 깊이를 재는 것처럼 길고 깊게 한숨지었다.
화자가 스스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아뽈론도 이미 화자의 탁상 공론을 눈치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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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0 「나는 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아....... 정반대로 나는 내 가난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지. 나는 가난하지만 고상하지....... 사람은 가난하지만 고상할 수 있어.」
p.186 「나는 조금 전에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 그러나 실은 부끄러워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부끄럽도 무엇보다도 두렵고 내가 도둑질한 것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있지. 왜냐하면 나는 허영심이 강해서 마치 껍질이라도 벗겨진 듯 공기가 닿기만 해도 아프기 때문이지.」
화자의 자기 기만이 대비되는 부분이다. 겉으로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싶어하지만, 사실 그러지 못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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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0 그리고 나는 지금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상대방에게 자신을 학대하도록 허락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선에까지 와 있다.
p.191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러 온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어떤 파멸에 빠지더라도 그것으로부터의 부활과 구원, 그리고 모든 재생의 기회를 사랑 안에서 찾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파괴적인 인식을 가진 화자와, 그런 인식을 넘어서는 성모로서의 리자가 대비되고 있다. 창녀인 성녀의 모티브는 이때부터 구체화된 게 아닌가 싶다.
p.194 모욕 ㅡ 그것은 결국 정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신랄하고 고통스러운 의식이다!
모욕에 대한 고찰,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발췌했다. 실제로 모욕은 자존심을 긁어내고 그 밑바닥에 위치한 자신을 보게 만든다. 잔인하고 설득력없는 위험한 방법이지만 사실 모욕만큼 정화에 가까운 것도 없을 것이다. 모욕을 잘 견뎌낼 수만 있다면...
p.196 그래, 한 번 시험해 보자, 우리에게 예를 들면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하라, 우리들 중 누구라도 손을 풀어 줘 봐라, 우리의 행동 영역을 확장시켜 봐라, 감독을 약하게 해봐라, 그러면 우리는 아마도....... 나는 당신에게 확언한다. 우리는 곧 다시 한번 감독받게 해달라고 빌 것이다.
p.197 우리는 심지어 인간들이, 진정한 자신의 육체와 피를 가진 그런 인간들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며 전례가 없는 일반적인 인간 같은 것이 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p.198 하지만 이 역설주의자의 <수기>는 이곳에서 끝나지 않고 있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곳에서 중지해도 될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자유 의지(=개인의 욕망에 근거한)를 얼마나 부담스럽고 짐처럼 여기는지, 그것이 인간성을 어떻게 훼손하는지 다시 한번 주장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하지만 작가도 이야기하듯 이 모든 이야기는 '역설주의자'의 수기에 불과하다. 화자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 의지를 발휘하며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와 허구 세계의 뒤틀림
p.199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실제의 삶에 적응할 수 없는 몽상가에 관한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중략) 도스또예프스끼는 이와 같은 병적인 주인공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는가?
p.200 (첫 번째), 지하 생활자는 허구의 세계에서 얻은 간접 체험을 현실에서 직접 실천하려 함으로써 비극을 자초하고 있다. (중략) 지하 생활자가 독서로 인해 자신의 실제의 삶을 망친 더 큰 이유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는 데에 있다.
p.201 (두 번째), 그가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동등한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상하 관계로 인식하는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자아에 대한 심한 열등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집 읽기 진행하면서 읽은 해설 중에 가장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해설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한 부분인 '이런 주인공을 왜 사용했을까?'에 대해서 명확하게 풀이하고 있다. 이 설명은 작품 내적의 논리에 따른 설명이며, 외적인 맥락과의 설명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p.207 의심할 바 없이 지하 생활자는 지식인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를 통해 도스또예프스끼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지적 풍토와 그것을 대변하는 전형을 창조함으로써 당시의 서구 사상에 매료된 지식인들이 그것을 이상화시키고 무리하게 러시아 토양에 접목시키려고 했던 시도에 대하여 일종의 경고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p.208 뾰뜨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강압적으로 실시한 이후로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외래 사상 수용의 첨병으로서 러시아 고유의 문화적 요소들과의 성공적인 접목을 위해 고뇌와 번민의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p.208 당시 러시아 사회의 이념과 제도권에 합류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질적이니 사상으로 인해 민중과도 유리되어 있었던 러시아 지식인의 딜레마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p.209 도스또예프스끼는 지하 생활잘르 통해 인간을 이성과 과학의 틀 안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당시 외래 사상(=이성 중심)을 받아들여야 했던 지식인들의 딜레마가 지하 생활자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화자에 대해 양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입을 빌려 서구 중심의 합리주의에 대해 반박하면서도, 딱히 어떤 사회적 변혁을 일으킬 수 없는 지식인의 무력감을 화자를 통해 다시 한 번 비꼬는 것이다.
인간 소외와 반항의 상징
p.215 지하 생활자의 <수기>가 다루고 있는 시기(184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는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가장 극적인 시기였다. 그 시기에 그 자신이 <몽상가>의 위치에서 젊은 시절에 받아들였던 바로 그런 용솟음치는 이상주의와 감상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몽상가, 또는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자신의 지난 태도에 대한 반성도 함께 이 작품에 드러나있다는 해설이다. 어찌보면 저자 또한 한때 즈베르꼬프 같은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p.217 인간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로서의 자유와 자유 의지에 대한 개념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배적인 사상이며, 『죽음의 집의 기록』의 동기leitmotif이다.
p.218 <즉 존재하는 것을 자신의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영원한 정신적인 저항과 부정이 무척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p.219 도스또예프스끼는 <수정궁>을 거부하고 있다. 그것이 고통받는 수백만의 사람들로부터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정신적인 저항과 부정>을 표명하고 <수정궁>을 이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지하 생활자이다.
본문에서도 계속 얘기하고 있었던 자유 의지에 대한 화자의 거친 철학이, 저자의 머릿 속에서는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 보여주고 있다. <수정궁>이 제공하는 레디메이드의 자유 의지가 아닌 저항과 부정으로 일궈낸 자유 의지를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p.219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더 좋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는 얻어맞기도 하고 일자리를 얻지 못하기도 하며, 배고픔에 죽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아무런 자유도 없는 것 아닌가.
완전한 자유에 대한 관점이 흥미로워서 발췌했다.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유 의지를 온전히 발휘하는 것은 어렵다. 즉, 보호받는 상태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p.221 제1부는 새로운 도덕을 창출하는 데 목적을 둔 교훈적인 작품인 급진적 민주주의자 체르니셰프스끼의 정치 철학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서 표현된 이상들에 대한 날카로운 패러디이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주인공들은 자기의 이익이 공동의 선과 동일하다는 새로운 도덕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그들은 합리주의적인 이기주의자들이다.
p.221 도스또예프스끼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행복과 복지에 관한 체르니셰프스끼의 드높고 도덕적이며 합리적인 철학과, 그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보고 있는 개인의 이익에 대한 강조와 이상을, 인간 본성을 터무니없이 단순화시킨 것으로 비웃고 있다. 자신만만하고 획일적이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이성적인 <새로운 인간>인 체르니셰프스끼의 주인공(중략)에 대하여 도스또예프스끼는 회의하며, 모호하고 결함이 있는 불합리한 <반주인공>을 내세우고 있다. 체르니셰프스끼에 대한 공격은 또한 인간의 선에 대하여 열렬한 믿음을 가졌던 1840년대의 감상적 인도주의에 대한 일격이었다.
즈베르니꼬프 같은 인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설명을 읽다 보니 왠지 체르니셰프스끼에 대한 동족 혐오로 쓴 것 같기도 하다(..) 불과 몇 작품 전만해도 도스또예프스끼 또한 인간의 선의에 기대는 낭만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p.222 <지하실> 몽상가의 비극은, 도스또예프스끼의 개념에서 러시아의 교육받은 계층의 비극과 관련이 있다. 『시대』라는 그의 잡지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의 교육받은 계층이 역사적으로 민중, 토양과 절연되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p.222 지하 생활자는 무엇보다도 민중의 삶과 절연되어 있는 러시아의 유럽화된 교육받은 계층의 상징이다.
이 부분을 읽으니 지하실에 있는 몽상가는 단지 화자만을 의미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주의에 빠져있는 즈베르니꼬프와 같은 이들이야말로 진짜 지하실에 갇힌 지식인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자의 입장을 옹호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나도.
p.227 도스또예프스끼는 지하 생활자의 독립과 자주적인 결정에 대한 요구가 파괴적인 자의식과 세상을 거부하는 것 이상으로 지하 생활자를 추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그는 너무나 깊게 그의 주인공의 고통과 절망적인 반항에 관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작품에 대한 저자의 태도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화자의 얼토당토 않은 의견 안에는 진실도 있고 과장된 부분도 있다. 진실된 부분은 독립과 자주성에 대한 것이고, 과장된 부분은 그 고통에 지나치게 빠져들어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이상에 빠져버린 화자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p.230 <지하실>은 한 인간 안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내면적 삶이다. 이러한 <지하실>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지하 생활자는 그가 두려워하는 현실 세계와 협력 관계를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현실 세계가 그를 <지하실>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p.231 이것이 <지하실>의 비극이다. 이것은 인간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불가사의 외에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공허하고 경직된 <마지막 벽>으로 상징되고 있다.
p.232 <지하실>로서, 이성과 논리의 감옥으로서의 현실에 대한 모든 개념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바탕에 깔려 있다. 개인은 바로 자연의 법칙에 의하여 그것을 망각하도록 선고를 받았다. 지하 생활자는 이러한 인간 소외와 그것에 대한 절망적인 반항의 상징이다.
이성와 논리의 감옥인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지하실에 틀어박히지만, 지하실에 틀어박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답도 찾을 수 없었던 화자의 절망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고 나니 이 책의 복잡하고 질척한 내용들이 이해가 되는 듯하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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