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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006. 백야 외

by 쿠데 2020. 1. 19.

백야 외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중단편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시작

  한 주 쉬고 다시 시작하는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읽기. 이번에도 단편집이다. 바로 <네또츠카 네즈바노바>로 들어가고 싶긴 했지만 역시 발간 순서에 따라서 읽어보고 싶다. 다음 주는 기대하고 고대하던 네또츠카 네즈바노바니까 이번 주는 백야로 열심히 달려보고자 한다.

 

 감상

 백야, 제목만 봐도 신비로우면서도 거창한 스토리의 단편집일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그 기대는 첫 번째 단편을 보는 순간 산산조각이 난다(..) 이 무슨 코미디인가? 싶을 정도로 웃긴 (적어도 지금까지 읽은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중에선 가장 웃긴) 단편이 나온다. 이전 작품까지만 해도 꽤 무게를 잡은 느낌이었는데 이 단편집부터는 한결 여유롭고 가벼워진 느낌이 난다. 독자로서는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좋지만 발췌할 문장이 적은 게 조금 아쉽다면 아쉽긴 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대박으로 잔뜩 고양되어 쓴 <분신>이 혹평을 받고, 이어서 나온 단편들도 반응이 썩 좋지 않아서 마음을 내려놓기라도 한 걸까? 지난 단편집인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들이 여럿 실려있긴 했지만 이번 단편집의 가벼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첫 단편인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은 기대를 져버리지 않을 정도로 웃기다. 지금 읽어도 폭소를 할 만큼!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은 코미디 단편 연극으로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한 편으론 코미디 단편 연극으로 만들면 끝일 것 같은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이런 내용의 연극이 지금까지 대학로에서만 몇백편 이상은 나왔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전형적인 내용의 통속극? 같은 느낌이다. 다만 그래서 재미있고 웃기다. 앞으로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중에 이 작품보다 가볍고 웃긴 작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 만약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제일 먼저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약한 마음>은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행운을 견디지 못하고 파멸해버린 남자와 그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너무 아픈 단편이기도 했다. 사람은 분수에 맞게 행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러하다는 답을 들어버린 것 같아서... 자존감 없는 주인공은 자신의 행복에 끝없는 의문을 가지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행복에 어울리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 붙이다가 결국 파멸해버린다. 행복에도 등급이 있고그에 따라 자격이 필요한 걸까?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우린 스스로를 끝없이 증명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행복에는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마음의 그릇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행복의 크기는 확실히 달라지는 것 같다. 마음의 그릇이라는 걸 사람의 노력으로 넓히고 만들 수 있느냐는 논증이 아니라 증명이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믿지 못하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아픈 이유는 주인공인 바샤가 노력하려고 노력한 사람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샤는 자신이 이 행복을 감당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서를 한다. 하지만 행복의 크기만큼 찾아온 부담감이 그의 어깨를 내리 눌러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인간은 행복을 감당하지 못해 파멸할 수도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부담감을 단기간에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행복이 찾아오기 전에 미리 자신의 그릇을 넓혀둘 필요가 있겠다. 바샤의 경우에는, 너무 갑자기 많은 행복이 찾아왔다는 게 문제겠지.

 

 하지만 가장 소름끼치는 건 나조차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중간 중간 바샤에게 찾아온 행운들을 보면서 '거짓말 같은데ㅋㅋ' '그럴 리가 없는데ㅋㅋㅋ' 하고 주석을 달고 있었다는 것이다...

 

 <뽈준꼬프>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 순진하고 멍청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는 소시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뽈준꼬프의 행동이 너무나 극혐(?)이라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소 사이다도 느껴진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서 이런 주인공들이 나올 때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늘 고민하게 되는데, 뽈준꼬프는 확실하게 부정적인 케이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제발 자기 팔자를 자기가 꼬지 맙시다...

 

 <정직한 도둑>은 개인적으로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편이 될 것 같다. 글에 등장하는 두 화자인 아스따피와 에멜랴의 관계 때문인데, 무력한 사람과 그를 돌보는 사람의 관계를 첨예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또 아니다.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돌보는 쪽이 권력을 가질 것 같지만 이 작품에서는 무력한 에멜랴 쪽이 관계에서 더 강력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에멜랴가 의도적으로 그런 관계를 조성한 것은 아니다. 사실 중간에는 에멜랴가 그런 관계를 조성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까지 보고 나니 이 사람은 그냥 자기 본성대로 살았을 뿐이라는 생각만 든다. 무력한 사람들이 얼마나 비굴하고 자책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단편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은 찝찝한 맛을 가득 남기는 단편이다. 율리안이라는 남자가 11살 짜리의 어린 신부에게 집적거리다 결국 그녀를 손에 넣는다는 내용이다. 신부에게 딸린 지참금을 손에 넣겠다는 계산만으로 어린 여자아이에게 집적거리는 묘사가 굉장히 불쾌하다. 그래서 이 단편이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만... 마지막 결말까지 찝찝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화려한 축제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을 노리고 그렇게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제작인 <백야> 또한 멋진 단편이다. 스스로를 몽상가라 칭하며 현실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한 남자가 나스쩬까라는 어린 소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나스쩬까는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사랑을 응원하며 손을 놔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몽상가에 대한 묘사나 고찰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찌보면 자신을 능욕했다고도 볼 수 있는 나스쩬까에게 진심을 담은 축복과 응원을 보내고 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시각도 이 단편을 읽으면서 조금 줄어들었다. 낮은 자존감은 자존심의 장벽을 낮춰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날카롭게 인지하게끔 한다. 이 단편에서는 화자가 자신과 타인의 심리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만약 그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같은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자존심이 강하면 자신의 감정을 은닉하게 마련이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도 그것을 쉽게 사람들 앞에 꺼내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백야>의 화자는 거침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읽고 싶지 않은 타인의 감정을 읽어낸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무너지기보다 꿋꿋하게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을 선택한다. 어쩌면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그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자존심으로 둘러싸인 사람들은 절대로 할 수 없을 일을 한다는 것에 경이감을 느꼈다. 이 단편은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부분을 읽기 위해서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자신을 떠나는 사람에게 저런 축복의 메시지를 건넬 수 있을지...

 

 마지막 단편인 <꼬마 영웅>은 <백야>의 쌍둥이 같은 작품이다. 플롯은 다르지만 주인공 소년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내용은 <백야>와 똑같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성을 소유한 소년은 M부인이라는 여성을 사랑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관계였기 때문에 M부인의 곁을 맴돌기만 한다. 단지 M부인뿐만이 아니라 그는 세상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다. 인정을 받기엔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피하던 난폭한 말 위에 오른 사건을 통해 소년은 사람들로부터 '꼬마 영웅'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으로부터 완전하지는 않을지언정 약간의 인정을 받아낸 소년. 하지만 정작 가장 인정받고 싶었을 M부인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기에... 그리하여 소년은 진짜 영웅이 되기로 결심한다. M부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도록 그녀의 등을 떠밀어주기로 한다. 소년의 어리숙하지만 진실한 노력에 M부인은 마침내 마음을 연다. 그리고 소년에게 키스와 스카프를 건넨 뒤 떠나버린다. 가슴을 덮은 스카프의 온기에 소년은 쓸쓸한 고양감을 느낀다. 애틋한 첫사랑의 기억과 함께 그렇게 유년기의 해가 저문다.

 

 <백야>도 그렇지만 <꼬마 영웅>도 가슴이 먹먹한 이야기였다. 다만 <백야>의 경우에는 일종의 경의감까지 느껴졌다면 <꼬마 영웅>은 애틋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소년의 사랑은 어차피 가망이 없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기 때문이고 백야의 사랑은 욕심을 내볼 수도 있었던 성년의 사랑이었기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두 이야기 모두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아름다운 호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사랑을 쟁취하는 것은 실패하지만 예술의 한조각을 얻는다. 순간이 아닌 영원에 걸쳐 남을 사랑의 파편을 말이다.

 

 이렇게 이번 단편집도 감상이 끝났다. 독기가 느껴지던 분신을 지나, 아직 딱딱했던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를 거쳐, 조금은 부드럽고 온화해진 도스또예프스끼의 단편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후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들을 걸쳐 등장할 지배적인 정서인 '박애주의'와 '몽상'의 초기 형태를 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결국 예술가란 몽상을 통해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아닐까? 몽상은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지만, 우리는 몽상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그려볼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의 문제에 침전하기 위해 몽상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그 힘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순간 몽상은 망상이 아닌 예술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것이 긍정적이고 따뜻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마침내 예술은 박애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은 박애주의의 산물이다. 도스또예프스끼 식으로 바라본 예술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단지 긍정적이고 밝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내용을 그리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면, 그로 인해 그 작품을 읽기 전후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다면 나는 그것 또한 박애의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예술가가 박애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객관적인 답을 찾진 못했다. (예술에 객관적인 답이 있겠냐만!) 하지만 개인적으로 된다/되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은 필연적으로 박애의 행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쨌든 예술은 마음을 다루는 행위이고 결국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행위이니까. 작품을 통해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게 아닌 이상 예술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연결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박애의 매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박애주의적인(달리 말하자면 기독교적인) 테마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고유한 테마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예술가라는 존재 자체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 박애주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는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전달할 수 있을까? 예술가로서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고민해봐야할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대작가님의 어깨에 올라 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본다.

 

 문장

그러나 나스쩬까, 너는 내가 모욕의 응어리를 쌓아 두리라 생각하는가! 내가 너의 화사하고 평화스러운 행복에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게 할 것 같은가, 너를 신랄하게 비난하여 너의 심장에 우수의 칼을 꽂을 것 같은가, 너의 가슴이 비밀스러운 가책으로 고통받고 행복의 순간에도 우울하게 고동치도록 만들 것 같은가, 네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제대를 향해 걸어갈 때 너의 검은 고수머리에 꽂힌 저 부드러운 꽃 중에서 단 한송이라도 나로 인해 구겨져 버리게 할 것 같은가....... 아, 천만에, 천만에! 너의 하늘이 청명하기를,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오, 하느님!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p.310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압도되었던 부분이다. 표제작인 <백야>의 마지막 장면이다.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나스쩬까를 향한 절절한 사랑(이별)의 고백을 터트리는 문단이다. 독점이 아닌 사랑으로, 연인이 아닌 인간으로서 나스쩬까를 축복하며 떠나보내는 진실된 마음이 그저 경의롭다. 나 또한 이렇게 따뜻하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진정으로 사람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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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야 외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유별난 사건~

 

p.37 흔히들 음악이 좋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음악적 감동이 모든 종류의 감정을 담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즐거운 이는 음악 속에서 기쁨을 찾고, 괴로운 이는 슬픔을 발견하기에....... 그런데 이반 안드로레비치의 귓가에는 폭풍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하도 웃기기만 한 단편이라 발췌할 문장이 거의 없었는데 그 중에 하나 건졌다(..) 같은 음악이어도 감정 이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리 느낀다는 것. 슬픈 음악이 꼭 슬프게 들리거나, 밝은 음악이 꼭 밝게 들리는 것은 아닐 수 있겠다. 좋은 통찰이라서 발췌해두었다.

 

p.55 ⎡(전략)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게 될 거요. 게다가 나는 당신을 우리 집 식사에 초대할 용의도 있소. (후략)⎦


 ㅋㅋㅋ읽다가 빵 터진 부분이다. 우연치 않게 함께 침대 밑에 숨어버린 이반 안드레비치와 불륜남. 불륜남은 어떻게든 이반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데 안드레비치는 끊임없이 떠들어대니 그를 달랜답시고 한 말이 저거다(..) 희극이 따로 없다. 나중에 개그씬을 쓸 일이 생기면 사용해야겠다.

 

p.69 ⎡이자는 악한이에요. 아미쉬까를 죽인 살인자란 말이에요! 게다가 저런 소리마저 늘어놓다니!⎦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p.69 ⎡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우스운 사람이 다 있을까?⎦ 부인은 깔깔 웃어 대며 소리쳤다.


 결국 개를 죽이다 들통나는 바람에 이반 안드레비치와 부부 사이의 날카로운 긴장감이 형성되는 가운데,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안드레비치를 보고 갑자기 웃음이 터지는 부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라 발췌해보았다. 갈등 관계가 이런 식으로도 해소되다니ㅋㅋㅋ 이 단편에서 한 장면을 뽑으라면 여기다.

 

p.75 그러나 이즘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인공을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주 독특하고도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단편 말미에 등장하는 낚시 문구다. 아니, 고명한 대작가 도스또예프스끼 선생님도 이런 낚시 기법을 사용하시다니; 물론 이 단편 자체가 엄청 가볍고 코믹한 필체이긴 하다. 그래도 인상적이라서 적어보았다. 저런 낚시 기법은 언제 봐도 재미있는 것 같다.

 

 약한 마음

 

p.79 같은 지붕 밑, 같은 층, 같은 호에 아르까지 이바노비치 네페제비치와 바샤 슘꼬프라는 젊은 두 친구가 살고 있었다. 여기서 작가는 물론 왜 한 주인공의 이름은 제대로, 다른 한 주인공의 이름은 애칭으로 적었는지 독자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러한 표현 방법이 격식에서 벗어나며 어느 정도 친근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등장 인물들의 지위와 나이, 신분, 직업 그리고 심지어는 등장 인물들의 성격까지도 사전에 설명하고 묘사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는 작가가 많기 때문에, 이 소설의 작가는 그들과 동류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즉, 아마도 소위 자존심 때문에) 곧바로 사건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서두를 마친 후 그는 시작한다.


 도입부터 완전 힙하다. 뭐지? 메타 서술에 기존 작법 비판에 바로 사건으로 진입하는 도입부까지...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요즘 사용해도 재미있다고 느낄 만한 기법은 전부 모아서 이 도입에 때려 박았다. 정말로 도선생은 대중 작가(?)였는가. 이전 작품들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것 같아서 읽기에는 좋다.

 

p.95 마치 마담 레루의 모든 것이, 그 눈길과 제스처, 그 미소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요! 잘 맞혔어요. 당신은 당신을 기다리던 행운을 얻을 자격이 있어요.>


 약혼녀인 리쟌까에게 선물할 모자를 사러 갔다가 만난 모자 가게 여주인의 묘사다. 처음에 읽을 때는 장삿속 묘사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진심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p.104 흥분하기 쉬운 그의 성격적 특성, 대인 관계에 대한 그의 어설픈 지식과 관련된 몇몇 걱정들을 표명했다. (중략) 마침내는 아르까지 이바노비치가 자기들을 내버리지 말고 함께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p.105 ⎡(전략) 그래, 너에 대한 우정은 그녀에 대한 우정이기도 해. 이제 내게 있어 너와 그녀는 분리될 수 없지. 다만 내게 <너>가 하나 대신 둘이 되는 거야.⎦


 이런 독특한 순간들을 잡아내는 게 도스또예프스끼의 위대한 점 중 하나인 것 같다. 아르까지와 바샤의 사이가 너무 좋은 나머지, 바샤의 약혼녀인 리쟌까마저 그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하나가 되자고 말하는 장면들이 참... 정상적인 관계의 심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존재할 법한 광경이라 그것도 놀랍고.

 

p.123 ⎡넌 네가 행복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모두 행복했으면 하고 바랐던 거야. 혼자만 행복하다는 생각에 너는 괴롭고 힘들었던 거지! 지금 이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그래, 양심에 거리낌을 없애기 위해서 너는 무언가 공훈을 세우고 싶었겠지! 열성과 능력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해 자신을 괴롭힐 준비까지 되어 있었고.......⎦


 바샤의 이유모를 고통에 대한 해설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너무 낮은 나머지, 갑자기 덮쳐온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 했던 바샤의 심리를 아르까지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아프다!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p.140 ⎡어떻게 이런 일이? 어쩌다 그가 이렇게 되었지? 도대체 그가 왜 미친 건가?⎦ 율리안 마스따꼬비치가 물었다. ⎡고마움, 고마운 마음에서입니다!⎦ 아르까지 이바노비치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행복을 게워내는 것이 정녕 죄란 말인가.

 

p.145 그런데 이 환상적인 마법의 세계, 꿈의 세계는 곧 사라지고 연기가 되어 어두운 푸른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중략) 그는 이제서야 이 모든 불안감을 이해하고, 자신의 행복을 견뎌 내지 못한 가엾은 바샤가 왜 정신이 나갔는지를 알 것 같았다.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언제 행복이 사라지고 추락할지 몰라 아슬아슬한 기분. 사람은 분수에 맞게 행복해야 하는 걸까? 분수라는 건 무엇일까. 자신의 의지로 정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고 믿지 않으면 아르까지처럼 음울한 인간으로 변모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믿고 싶어서라도 날 지키고 싶다.

 

 뽈준꼬프

 

p.151 내 생각에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고귀한 인간이긴 하지만 한 가지 작은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상대방의 첫마디가 명령하는 데에 따라 선량하고 사심 없이 비굴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또 자존감 없는 새로운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뽈준꼬프, 돈을 빌리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사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주인공들과 비슷하긴 하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마저 똑같다. 너무 순진한 나머지, 자신의 상관의 뒤통수를 쳤다가 다시 고스란히 당하는 이야기가 뽈준꼬프의 메인 스토리다. 자신을 배신하고 뇌물을 챙긴 뽈준꼬프로부터 다시 돈을 돌려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의 비위를 맞추는 페도세이 니꼴라이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뽈준꼬프는 결국 자신이 자신의 팔자를 꼰 것이라 당할 만하다는 생각은 든다(..) 마지막 문장마저도 '그(페도세이)를 비열한 놈이라고 욕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인 걸 보면 더욱ㅋㅋㅋ

 

 정직한 도둑 ~무명인의 수기 중에서~

 

p.182 내가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아스따피 이바노비치가 때때로 자기의 인생 경험을 들려주었다는 사실이다. 내 삶의 만성적인 지루함 속에서 그런 이야기꾼의 존재는 보배나 다름없었다. 한번은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이야기는 나에게 적잖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야기와 이야기꾼의 존재에 대해 긍정하는 문단은 언제나 환영이다. 실로 이야기란 지루한 삶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p.187 아는 사람을 만나고 저녁 때 숙소로 돌아와 보니 방의 트렁크 위에 앉아 있는 에멜랴가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 지저분한 보따리를 옆에 내려놓고 외투 차림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p.187 나리, 저는
그 자리에 앉아 곰곰이 다음과 같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래, 이 방랑벽이 있는 친구가 나에게 큰 방해가 될까?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그리 큰 방해가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p.188 그러나 그가 술집에서 나를 망쳐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게 되자, 나리, 내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떠올라 나를 긴장시켰습니다. 그러나 만일 에멜랴가 나를 떠난다면 내가 그리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의 아버지요 수호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를 타락한 생활에서 구해 내고 술을 끊에 만들어야지 하고 나는 결심했습니다.


  아스따피와 그를 따라다니는 식객 에멜랴의 이야기가 이번 단편의 메인 스토리다. 두 사람의 관계가 굉장히 흥미롭다. 에멜랴는 자력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뻔뻔하게 보일 만큼) 아스따피에게 구걸하며 붙어다니고, 아스따피는 그런 에멜랴를 귀찮아 하기보다 점점 안쓰럽게 여기게 된다. 나중에는 오히려 아스따피가 에멜랴에게 의존하는 듯한 느낌까지 드는데, 무력한 사람에 대한 전능감이 아스따피를 저렇게 만든 걸까? 사실 중간까지는 에멜랴를 뻔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봤는데 마지막 부분에 에멜랴가 죽는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정말로 순박하고 무능한 사람이었던 것뿐이려나? 아스따피의 행동을 전능감에 취한 동정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보았지만 단편을 다 읽고난 뒤에는 아스따피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p.212 나는 아이들을 관찰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삶 속에서 최초의 독립적인 자기 표현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상당히 찝찝하고 열받는 내용의 단편이다. 그렇다고 단편의 퀄리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고, 너무 현실적인 내용이라 그냥 짜증이 난다. 여튼, 이 단편에서 개인적으로 건지고 싶은 부분은 여기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을 관찰한 적이 없어서 왜 이런 부분에 흥미를 느끼는지 궁금했다. 인간이 자아를 가지고 표현하는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일까? 그건 왜 흥미롭지? 우리가 느끼고 표현하는 욕망의 최초 형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려나.

 

 백야 ~감상적 소설, 어느 몽상가의 회상 중에서~

 

 첫 번째 밤

 

p.225 불현듯, 모든 사람들이 외로운 나를 저버리고 나에게서 떠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중략) <도대체 이 모든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중략) 그런 것 없이도 뻬쩨르부르그 전체가 나의 친구인데 말이다.

p.227 나는 또한 건물들과도 친하게 지낸다. 내가 걸어갈 때 건물들은 나보다 앞질러 거리로 뛰어오는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창문을 통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p.228 자, 그러니, 독자여, 당신은 이제 내가 어떤 식으로 뻬쩨르부르그 구석구석과 친교를 맺고 있는지 파악했을 것이다.


 뻬쩨르부르그와 완전히 일체화된 화자가 등장한다.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의 초상이 아닐까 싶다. 이토록 뻬쩨르부르그를 사랑하고 그곳의 공기에 완전히 녹아든 도스또예프스끼였기에 당대의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러시아의 정체성을 문학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거겠지.

 

p.229 이제 그들은 하잘것없는 공무에서 벗어나 가정의 안신처로, 별장으로 홀가분하게 떠나가고 있었다. (중략) <여러분, 우리는 그저 잠깐 지나가는 길에 들렀답니다. 두 시간 뒤에는 별장으로 떠날 거랍니다.>

p.230 나는 찾아갈 별장도 없었거니와 별장으로 갈 이유도 전혀 없었다. (중략) 그러나 아무도, 정말이지 누구 한 사람도 나를 초대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에게 나는 이방인인 것 같았고 실제로 나는 이방인이었다!


 뻬쩨르부르그에 완전히 혼연일체가 된 자신과 달리, 그곳을 단지 스쳐지나가는 장소로 보는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빈부에 따른 열등감도 있을 것이고 당시에 러시아가 아닌 다른 땅을 바라보며 삶의 자아를 부풀려 나아가던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도 있을 것이다. <매핑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서 이런 맥락이 보인다.

 

 두 번째 밤

 

p.256 그는 자신에게도 언젠가 서글픈 시간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걸 예측하지 못하므로 현실을 비참하고 가엾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중략) 그러나 저 무시무시한 시간이 아직은 닥치지 않았으니 그는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욕망을 초월해 있고 모든 걸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충만된 삶을 살고 있고 자신의 삶을 매순간 그때그때의 변덕에 따라 창조할 수 있는 예술가이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몽상가인 자신의 성향에 대해 토로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몽상적 자세에 대해 자아 비판적인 면모를 보여주긴 하지만 상상력이 자아내는 내적 세계의 풍요로움에 대해 묘사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 발췌했다. 글을 읽고 쓰는 이유 또한 이런 것이겠지.

 

p.262 환상도 마침내 지쳐 버린다는 게 느껴집니다. 이 <지칠 줄 모르는> 환상도 영원한 긴장 속에서 쇠약해집니다. 누구나 어른이 되고 자신이 과거에 품었던 이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마련이니까요. 그 이상들은 산산조각 부서져 가루가 됩니다. 만일 다른 삶이 없다면 그 부스러기를 가지고 다시 삶을 꾸며야 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뭔가 다른 것을 원하고 또 요구합니다! 그래서 몽상가는 부질없이 마치 재 속을 헤집듯 자신의 낡은 몽상을 뒤적거립니다. 재 속에서 무슨 불씨라도 하나 찾아내 호호 불어 가지고는 다시 붙은 불로 차가워진 심장을 녹여 보려는 거지요. 그리고 과거에 그토록 다정했던 모든 것, 영혼을 감동시켰던 모든 것, 피를 끟게 하고 눈물을 샘솟게 하던, 그리고 그토록 찬란하게 그를 기만했던 모든 것을 가슴 속에 다시 살아나게 하려는 거죠!


 현실에 순응하고 어린 시절에 꾸었던 순수한 이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반추하는 슬픈 묘사다. 화자 정도로 심각한 몽상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이런 경험을 있을 것이다. 더는 불태울 것이 없어 재가 되어버린 과거를 뒤적이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나스쩬까의 이야기

 

 반전이라면 반전이랄지,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하며 나스쩬까와 연결되고자 하는 화자에게 나스쩬까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한다. 1년 후에 다시 돌아오겠다며 떠난 남자. 하지만 1년이 지나도 그는 나스쩬까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화자는 나스쩬까에게 편지를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심지어 그녀의 편지를 그가 있는 곳으로 가져다 주기까지 한다. 안타깝다! 이때부터 이야기의 결말도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세 번째 밤

 

p.282 이미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의 것이고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데, 나는 정말 그토록 눈이 멀었단 말인가. 나는 몰랐단 말인가, 정작 그녀의 다정함도, 그녀의 배려도, 그녀의 사랑, 그래, 나에 대한 사랑까지도 실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앞에 두고 느끼는 기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자기의 행복을 나에게 옮겨 주고 싶다는 바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화자의 인식이 날카롭고 선명하다. 자존감이 낮은 것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그려지지만, 대신 자존감이 낮은 만큼 자신의 감정도 타인의 감정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날카로운 심리 묘사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자존심이라는 장벽은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막기 때문에.

 

p.289 ⎡어째서 가장 훌륭한 사람까지도 상대방한테 뭔가 숨기고 뭔가 접어두는 것이죠? 쓸데없는 말이 아니란 걸 아는 바에야 어째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 거죠? 마치 저마다 실제 그런 것보다 더 엄격하게 보이고 싶어 애쓰는 것 같아요. 자기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 그것을 능욕당하게 될까 봐서 겁내는 것 같아요.......⎦


 앞서 모든 걸 내려놓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위치를 파악하던 화자와는 정반대의 유형을 표현하는 듯하다. 지나치게 높은 자존심은 종종 자기 자신을 은닉하게 된다.


 네 번째 밤

 

 예정된 비극이 찾아온다. 화자는 좌절한 나스쩬까에게 고백하고 그 마음을 얻어내지만, 나스쩬까는 우연히 다시 만난 옛 남자에게 달려가버린다. 그렇다고 나스쩬까를 마냥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란 늘 인간을 압도하는 법이다...


 아침

 

p.310 그러나 나스쩬까, 너는 내가 모욕의 응어리를 쌓아 두리라 생각하는가! 내가 너의 화사하고 평화스러운 행복에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게 할 것 같은가, 너를 신랄하게 비난하여 너의 심장에 우수의 칼을 꽂을 것 같은가, 너의 가슴이 비밀스러운 가책으로 고통받고 행복의 순간에도 우울하게 고동치도록 만들 것 같은가, 네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제대를 향해 걸어갈 때 너의 검은 고수머리에 꽂힌 저 부드러운 꽃 중에서 단 한송이라도 나로 인해 구겨져 버리게 할 것 같은가....... 아, 천만에, 천만에! 너의 하늘이 청명하기를,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오, 하느님!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경이롭다고까지 느낀 부분이었다. 결국 옛 남자와 결혼하게 된 나스쩬까, 그녀로부터 자신의 결혼식에 와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혼자 묵묵히 읊조리는 화자의 진심이 담겨 있다. 순수하다 못해 경이롭다. 집착할 만큼 나스쩬까의 마음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심지어 그는 나스쩬까와 함께 했던 아주 짧은 시간조차 감사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 내내 스스로를 '몽상가'라 지칭하며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해온 그가, 이 단락에서는 누구보다 현실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있다. 이것을 몽상가라 해야 한다면 무엇이 현실주의자일까?

 

 꼬마 영웅 ~미지의 회상록에서~

 

p.314 그 아름다운 귀부인들 중 많은 이들이 나를 귀여워하였고 내 나이에 맞게 그때는 아직 나를 진지하게 다루려 하지 않았다.

p.315 때로는 내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어린아이로서의 특권들이 부끄럽고, 심지어는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신체의 나이와 정신의 나이가 항상 함께 가는 게 아니라는 건 살다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의 몸에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진 케이스는 쉽게 납득하면서도 그 반대의 케이스는 다들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도 일종의 차별이 아닌가. 그런 에이지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반가웠다.

 

p.322 그녀들 사이에는 일종의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관계는 일종의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사람들 간에 맺어지는 그런 관계였는데, 한 사람이 더 내면이 깊고 강인하고 순수하다면, 다른 한 사람은 고결한 겸손과 고상한 자기 평가의 결과로 상대의 우월을 기꺼이 인정하며 상대에게 복종하는데, 이때 다행히도 그의 마음속에는 상대를 향한 우정이 각인되는 것이다.

p.322 한 사람은 사랑과 겸양의 감정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은 사랑과 존경의 감정을 갖게 되는데, 이 존경의 감정은 자신이 누군가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데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확산되고 또한 인생을 살며 상대의 마음에 한발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질투와 욕망의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미묘한 두 여인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서술했다. 말하자면 외향적이고 잘난 사람과 내성적이고 겸손한 페어다. 단지 두 사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에 그치지 않고, 내성적이고 겸손한 쪽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 지에 대해서도 고찰해두어서 눈여겨 보았다.

 

p.324 많은 사랑을 베푸는 마음씨는 또한 많은 슬픔을 안다.


 정말 그러하다. 아프지 않고는 진심으로 상냥할 수 없는 것 같다.

 

p.341 나는 몸을 떨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심각한 슬픔과 능욕을 맛보았기에, 그전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분노와 증오가 내 안에서 들끓었다. (중략) 형체가 불분명한, 아직 내가 맛보지 못한 어떤 감정이 어린아이에 불과한 나에게 무참히 다가왔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모욕과 분노의 감정을 맛보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강렬한 순간은 그 사람의 인생에 평생에 걸쳐 남게 마련이다. 하물며 어린아이의 몸으로 공개적인 모욕의 순간을 겪었으니 얼마나 강렬했을지.

 

p.346 멋진 외모 하나만 배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식충이 같은 이 말을 위해 무수히 많은 돈을 지불했고 애정 어린 보살핌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지금 딴끄레드가 스스로의 장점을 실추시키지 않았고 또 다른 기수 하나를 굴복시켜 무의미한 월계관 하나를 새로 획득했음을 기뻐했다.


 긍지를 획득하는 방식에도 참 여러가지가 있다는 걸 알게 해준 귀중한 물건. 반드시 올바르고 멋진 일을 해야만 긍지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는 일단 확보한 위치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으로도 인간을 긍지를 느낀다. 정말 흥미롭다.

 

p.351 내가 딴끄레드를 타고 달릴 때 그녀는 공포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러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 특히 M부인을 보는 나의 시선과 당황한 태도와 갑작스러운 홍조를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이해하게 된 지금, 게다가 그녀의 경박한 머리에서 나온 낭만주의적 발상이 사실로 증명되어져 버린 지금, 그녀는 나의 <기사도 정신>에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감동을 받은 나머지 기쁘게 달려와 나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주인공 소년을 악의없이 조롱하다가 그가 보여준 패기 넘치는 행동 한 번에 180도 자세를 바꾸는 금발 부인의 감정 변화가 흥미로워 발췌했다. 역시 보여줄 때는 보여줘야 한다. 무시한 대상일 수록,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대상일 수록 그가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행동은 큰 의미를 갖는다.

 

p.364 나는 삶의 즐거움으로 충만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죽은 자처럼 앉아 있는 이 창백한 부인을 바라보았다. (중략) 이토록 창백하게 죽어 가는 마음을 기쁘게 되살려 놓는 일은 나의 재량 하에 있었으나 나는 어떻게 그 일에 착수해야 할지 몰랐다.


 줄곧 무력한 상황에 처해있던 주인공이 처음으로 상대의 운명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그것도 흠모하는 상대에게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표현이 흥미롭다. 어린아이인 그가 생각하고 실행한 방법은 너무나 순수하고 어리숙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이 더욱 감동적이다.

 

p.366 M부인은 정신없이 편지를 읽고 있었는데 나는 홍조가 피어오른 그녀의 볼 위에서, 눈물로 인해 번쩍이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모든 신경이 기쁨의 환희로 떨고 있는 그 환한 얼굴에서, 이 편지 속에는 행복이 담겨져 있고 이제 그녀의 모든 슬픔은 연기처럼 훨훨 날아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통스러울 만큼 달콤한 감정이 내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나는 이를 감추기가 어려웠다. 나는 이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손수 만든 꽃다발과 함께 편지를 전달하는 우리의 꼬마 영웅.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안도하는 M부인의 모습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모습에, M부인보다도 꼬마 영웅의 감정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p.367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뜨겁고 짧은 입맞춤이 내 입술을 불태웠다. 나는 나직이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으나 그와 동시에 어제의 그 진홍빛 실크 스카프가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마치 태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듯이, 그녀는 이미 없었다.

p.368 나는 내 얼굴을 덮고 있는 그 스카프를 집어 들곤 환희에 가득 차 나 자신도 잊은 채 그것에 입맞추었다.

p.368 그러나 나의 온 영혼은 어떤 예감처럼, 어떤 것을 통찰한 듯 거칠고도 부드럽게 괴로워했다. 나의 놀란 가슴은 어떤 기대로 인해 가볍게 떨면서 무언가를 부끄럽고도 기쁘게 간파해 나갔다. 나의 가슴은 무엇인가에 관통당한 듯 갑자기 아프게 뛰기 시작했도, 눈물이, 그렇다, 달콤한 눈물이 나의 눈에서 쏟아졌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풀잎처럼 몸을 와들와들 떨며,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그런 최초의 발견과 경험에 나의 마음을 아낌없이 헌납했다. 이 순간 나의 첫 유년 시대는 막을 내렸다.


 M부인으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은 나의 벅찬 감정과 더불어, 그로 인해 자신은 절대 M부인과 이루어질 수 없음을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지만) 절감하는 모순된 두 감정의 묘사가 두 페이지에 걸쳐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만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만 담아보았다. 순수하고 헌신적이며 아프다. 어째 이 사람의 작품에는 이런 헌신쟁이들만 나오는지!

 

 몽상과 현실과 문학의 삼중주

 

p.369 (1847년에서 1848년까지)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일종의 과도기적 시기였다.

p.372 이 책에 실린 도스또예프스끼의 중단편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전기적 사실들, 즉 공상적 사회주의의 수용과 인간 본성의 탐구, 신문 칼럼의 집필 등을 반영한다. (중략)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은) 모두 이 시기에 도스또예프스끼를 사로잡았던 몽상과 박애주의를 대변해 준다.


 언제나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해설 부분이다. 이번 단편집은 워낙 다양한 내용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어떤 맥락에서 봐야할지 난감했는데 첫 부분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 '몽상'과 '박애주의'가 이번 단편집의 핵심 테마라고 할 수 있겠다.

 

p.376 (백야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그리고 있는 것은 몽상가의 비극적 종말이 아니다. (중략) 그는 자기가 꿈꾸는 세계 속의 기사처럼 고결한 양심과 헌신적인 사랑으로 상대방을 도와주며, 또한 사랑의 좌절을 위선 없이 선량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고통을 내적으로 승화시킨다.

p.376 몽상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p.377 이렇게 비극적이고 죄스럽기까지 한 몽상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천박하고 범속한 세상을 향한 항변이며 몽상가는 어찌 되었던 그 상상력 덕분에 예술가로 고양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는 몽상은 무엇인가? 몽상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태도는 그야말로 예술가 그 자체를 의미하는 듯하다. 몽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몽상이 존재하기에 예술이 존재한다. 예술가는 쓸모없지만 쓸모있는 존재인 것이다.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예술의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정체성의 해리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p.378 (1849년 4월 22일에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에 유배지로 추방될 때까지 약 8개월 동안) 매우 역설적이게도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실러적인 삶의 환희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창작 의욕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p.378 도스또예프스끼는 선고를 기다리는 수인의 몸으로, 최악의 경우 사형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토록 순수하고 낭만적이고 삶에 대한 긍정으로 충만한 소설을 썼던 것이다. 한마디로 ⎡꼬마 영웅⎦은 자유를 박탈 당한 상황에서 비로소 존재의 신비와 생명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게 된 작가의 환희에 찬 고백록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박애주의란 무엇인가? 박애주의란 대가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기심을 버리고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박애주의란 이기적 개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동이다.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는 <백야>와 <꼬마 영웅>을 통해 이 주제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주고 그 등을 떠밀어줌으로써 자신의 행복이 아닌 타인의 행복을 우선시한다. 동시에 그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고자 끊임없이 씹고 소화해가는 과정이 눈부시게 그려져 있다. 이런 박애주의는 몽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온전한 현실과 이성의 영역에서 박애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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