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소설

002. 가난한 사람들

by 쿠데 2020. 1. 1.

 


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시작

 2020년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정말 끝내주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목표를 하나 세웠다.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다 읽는 것이다. 거의 반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쏟아야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도스토옙스키는 반드시 지나가야 할 관문 같은 느낌이 드는 존재니까.

 

 책은 발간 순서대로 읽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책이 선두주자가 되었다. 기존에 읽었던 <지하생활자의 수기>나 <죄와 벌>과는 전혀 다른 말랑말랑함에 깜짝 놀라며 한줄 두줄 읽어내려가고 있다. 일전에 읽은 <매핑 도스토옙스키>의 해설에 기대어 꼼꼼히 읽어보련다. 새해 벽두를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시작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고 몹시 기대된다.

 감상

 정말 도스토옙스키답지 않은 글이었다. 말랑말랑한 건 둘째치고 잘 읽히는 데다가 현학적이지도 않다. 그냥 평범한 서간 소설을 읽는 것 같다. 이 작품으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고 하던데 독자 입장에서도 이해가 될 정도였다. (다른 작품들은 솔직히 왜...? 하는 생각이 들었던지라) 가난한 하급 관리인 마까르와 가난한 여인인 바렌까가 주고 받는 편지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바로 옆집의 궁핍을 들여다보는 듯한 생생한 묘사와 더불어 진득한 사랑의 고백이 샌드위치처럼 서로 포개져있다.

 

 도끼 선생이야 워낙 가난에 대한 묘사로 유명한 분이긴 하지만 아파도 이렇게 아플 수 있는 건가 싶었다. 기존의 자연주의 작품들과는 비슷하지만 그것보다 심적으로 훨씬 아프게 다가온다. 이 정도로 가난할 수도 있구나 같은 나이브한 감상을 떠나서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지? 그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생각까지 이어진다. 불쌍하다 못해 아프다. 이런 일이 없었으면 싶을 정도로 아프다. 자극적인 정도로 따지면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들이 훨씬 강렬하지만 이 작품은 마치 내가 가난해진 느낌이 든다.

 

 주인공 일행이 느끼는 굴욕감과 멸시가 문장을 물고 늘어진다. 빨려 들어가듯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가 마치 그들의 입장이 된 것처럼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도끼 선생은 마까르의 입을 빌어 관음적인 문학을 비판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 가난은 훌륭한 엔터테인먼트다.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이야기 중 대부분은 빈자나 약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라는 것이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다루는 시뮬레이션의 일종이라고 볼때, 현대 사회에서 죽음을 제외하면 가난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기재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엔터테인먼트가 되기 위해서는 박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은 결국 대상화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대상과 내가 일치되는 순간 엔터테인먼트는 그 본질을 잃는다. 그렇다고 너무 멀어져도 안 되기 때문에 대상과 나의 거리를 얼마나 절묘하게 조절하느냐가 엔터테인먼트의 핵심이다. 즉, 무언가가 엔터테인먼트로 성립하려면 그것을 '대상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마까르가 비판하는 문학들은 그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화한다.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지만, 박제당한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마까르는 분노하고 절규한다. 너희가 무엇인데 우리를 박제하느냐며 소리지른다.

 

 그런 점에서 마까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마까르가 얼마나 궁핍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단 몇페이지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쓴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지는 않을지언정 마까르는 끊임없이 얼굴을 붉히고, 수치스러워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다. 언뜻 이런 행위들은 미성숙하고 융통성 없이 보이기도 하지만 쉽게 박제되지 않겠다는 숭고한 발버둥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이 부조리에 대해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물론 발버둥을 치는 것만으로 세상이 달라지진 않는다.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실질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학적인 의미에서 가치를 확보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적고 또 적는다. 책의 말미로 갈 수록 그의 문장은 점점 더 절절해진다. 박제된 자는 절대로 쓸 수 없는 삶의 애환과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리하여 그는 생명을 얻는다. 너무나 적나라한 책의 제목(가난한 사람들)조차 그 아픈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고 적어내려가겠다는 작가의 의지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시각들이 석영중 교수님의 해설을 읽으면 다소 뒤집힌다. 마까르가 어느 정도 생명력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인 건 사실이나, 그 발버둥이 성공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마까르의 한계를 지적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문학은 픽션이다. 지나친 대상화는 비판받을 만한 부분이긴 하지만 대상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문학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문학은 예술이고 예술은 필연적으로 대상화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말로는 박제를 거부하지만 삼류 연애 소설에 심취하는 마까르의 모습에서 그 한계가 드러난다. 그가 열광하는 연애 소설 또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을 박제한 엔터테인먼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바렌까는 이를 안타까워한다. 이미 이 지점에서부터 바렌까와 마까르의 차이가 드러난다. 문학적인 깊이의 차이는 두 사람 간의 심적/물리적 거리의 차이이기도 하다. 실제로 바렌까와 마까르는 작중에 몇 번 만나지 않는다. (아마 직접 만난 경우는 없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바렌까가 마까르를 떠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렌까가 마까르를 초월한 입체적인 인간상이었느냐고 하면 사실 모르겠다. 마까르와 달리 바렌까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자존심을 앞세우기 보다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실용적으로 움직인다. 그 결말이 지주의 아내라는 건 조금 쓸쓸하지만. 지주의 아내가 된 바렌까의 미래가 얼마나 불행할지는 굳이 묘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불행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끔찍한 가난과 병마의 늪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마까르는 그녀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보내지 못했을) 마지막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인물 개개인으로 보면 바렌까와 마까르는 각자 한계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결국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저마다의 결말을 맞이하긴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문학을 통해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개별성을 확보했느냐는 것이다. 가난한 하급 관리에 불과한 마까르, 언제 팔려갈지 모르는 가난한 더부살이 바렌까. 그러나 둘은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들의 삶에 개별성을 부여한다. 사회의 시선이 그들을 '빈자'의 카테고리에 넣어 공장처럼 찍어내려고 할 때, 이들은 '편지를 쓰는 존재'로서 자신을 개별화한다. 자신의 생각을 쓰고 타인의 이야기를 읽을 줄 아는 한 그들은 단순한 마트료시카일 수 없다. 의식했건 의식하지 않았건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순간 개별자로 존재하게 된다.

 

 글은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구체화한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하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존재감은 옅어진다. 그리고 타인에 의해 규정된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규정을 받아들인 채 살아가는 것이다. 굳이 문학이라는 방식이 아니어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발굴해야 한다. 단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흐려지는 자신의 존재를 고찰하고 입밖에 낼 수 있어야 한다. 치열하게 자신을 찾아가야 한다. 아마, 그것이 이 책의 주제일 것이다.

 

 문장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는 책, 그가 쓰는 글이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미학 공식은 이미 첫번째 소설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p.227

  가능하면 본문에서 고르고 싶었지만 다 읽고 나니 이 문장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사람은 자신이 읽는 것을 닮고, 자신이 쓴대로 변한다. 글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문장이다. 나 또한 실제로 그러하다고 믿는다. 글(=언어)는 사람의 삶을 조율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나 또한 내가 닮고자 하는 것을 읽고,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을 써야겠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가치는 충분했다.

 

 본문

더보기

 

 가난한 사람들

 

p.7 오오, 나는 이 글쟁이들에게 정말 질려버렸다! 유익하고 즐겁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은 모두지 쓰려 들지 않고 땅속에 숨겨진 온갖 더러운 비밀만 캐고 있다......!


 V.F. 오도예프스키 공작이라는 사람의 작품을 인용하는 서문이다. (안타깝지만 어떤 작가인지 전혀 모른다!) 이 말을 서문으로 삼은 이유가 공감해서인지 반발심이 들어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완독한 다음에 다시 와서 읽어봐야지. 우선 궁금한 점은 '유익하고 즐겁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과 '땅속에 숨겨진 온갖 더러운 비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책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면 좋겠다. 아니더라도 혼자 고민하면서 읽어보려고 한다.

 

 

4월 8일 ~ 6월 1일

바렌까와 알렉세예비치

 

p.11 소중한 아가씨. 어쨌거나 봄이 왔습니다. 머릿속은 즐겁고 재치가 번득이고 재미있는 생각으로 가득하고, 상상하는 것은 모두 분홍 빛깔의 감미로운 것뿐입니다.


 마침 새해에 읽고 있는데 이런 문장이 나와서 기뻤다. 바로 밑줄 긋고 표시했지. 새해란 그런 법이다. 신기하게도 날짜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그 날짜조차 인간이 인위적으로 규정한 것에 불과한데도 인간은 새해가 되면 변한다. 매일 매일 새해같은 삶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흥미로운 건 이렇게 잔뜩 흥분하고 있었던 알렉세예비치의 감정이 이후 다시 바닥으로 치닫는다는 것. 그 부분의 묘사가 꽤 의미심장했다.

p.15 바렌까, 차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마시는 셈이지요, 체면치레로 품위 유지를 위해서요.


 차를 마시는 행동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 차 한잔 마시는 것조차 여유를 부리는 것에 가까운 하층민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기호품이 아닌 사치품에 가까운 것이다.

p.18 다시 한번 간곡이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 때문에 자꾸 돈을 쓰지 마세요. 저를 사랑하고 계신 건 알고 있지만, 당신도 그렇게 여유가 많은 분은 아니니까요.

p.19 아아,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제 운명은 대체 어떻게 전개될까요? 불확실한 내일과 보장 없는 미래, 그리고 앞으로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현실만 생각하면 전 괴롭기만 합니다.


 가난의 반대말은 여유일지도. 달리 말하자면 여유의 반대말은 가난. 돈이 많아도 여유가 없다면 가난한 것이고, 돈이 없어도 여유가 있다면 부유한 것이다... 라고 나이브하게 말하고 싶지만 돈 없이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인간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선 극히 드문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돈은 반드시 필요하다.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라도. 여유가 없으면 삶도 없다. 사랑조차 사치인 삶이라니. 요즘이라도 해도 크게 다르지 않나.

p.28 제 방에 대해서는 지난 번에 말씀드렸죠. 더이상 말할 것도 없어요. 편합이다. 이건 정말입니다. (중략) 하지만 괜찮습니다. 살면서 익숙해지겠죠.


 그 와중에도 미친듯이 긍정적인 태도로 열악한 삶을 받아들여가는 알렉세예비치의 태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혼란스럽다. 가난해서 긍정적일 수밖에 없는 걸까? 긍정적이라서 가난을 이겨낼 수 있는 걸까? 전자에 가깝다고 보지만 이건 좀 더 읽어본 뒤에 고민을... 후자라고 하기엔 이 사람,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아직 자세한 상황을 모르니 이겨내고 싶어도 이겨낼 수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쨌든 긍정은 위대하다. 그런 결론이길 바라.

p.31 그건 정말 사람이 우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낮고 애절하던지 제 가슴이 다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밤새도록 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제 뇌리를 떠나지 않아 저는 잠을 다시 설쳐야만 했습니다.


 '사람이 우는 소리'라는 표현이 폐부를 찌른다. 사람이라는 주어가 너무 아프게 다가온다. 동물도 눈물을 흘린다지만, 가장 강렬하게 우는 건 역시 인간이니까. 인간이라서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으로 운다는 의미가 너무 처절하게 내포된 문장이다. 나는 살면서 이런 울음 소리를 아직 들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1

바렌까의 삶

 

p.39 아버지는 항상 집에 안 계셨고 어머니는 잠시도 편할 새가 없으셨다. 나는 모두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다.


 유년기에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정말로 잊혀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이렇게 타인의 문장으로 보니 그날의 기억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모두의 시선에서 배제되어있는 그 느낌. 그렇다고 바쁜 부모님에게 날 좀 봐달라고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태.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기억은 아니다. 덕분에 삶에서 꼭 필요한 몇 가지를 일찌감치 터득할 수 있었다. 고독한 삶에 익숙해지는 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 아닌가.

 

p.45 안나 표도르브나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자였다. (중략) 그녀는 항상 정신없이 바빴고 걱정도 많았다. 어디론가 멀리 다녀오기도 했고 하루에 여러 차례 외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바쁜 일이 그리 많고 무엇을 신경을 쓰는지 나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는 사람도 많았고 그 부류도 아주 다양했다. 대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주 그녀를 찾아왔지만 항상 일 때문인 것 같았고, 그들은 아주 잠깐만 있다가 돌아갔다.


 부자의 삶이란 이런 것일까? 빈자의 입장에서 본 부자의 삶에 대한 묘사라서 흥미롭게 읽은 대목이다. 대충 정리하자면 '매우 바쁘고 하는 일이 많다'는 것. 모든 부자가 이렇게 바쁘지는 않겠지만, 좋게 말하면 부지런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부산스러운 것일 테다. 안나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현재 책의 맥락으론 알 수 없다.

 

p.53 그가 보여 주었던 인간적인 고결한 감정의 유일한 징후는 아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뿐이었다. 사람들은 젊은 뽀끄로프스키가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착한 아내에 대한 추억이 다 죽어 가는 노인의 가슴에 아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낳게 했던 건 아닐까?

p.54 ⎡저 말이지. 나는 말이다, 뻬쩬까. 그저 잠깐 들른 거야. 어디 먼데 갔다 오는 길인데 요 옆을 지나게 되었기에 잠깐 쉬려고 온 거야⎦


 뻬쩬까의 아버지에 대한 묘사들. 너무 아프고 인상적이라 발췌했다. 에구, 읽는 내내 너무 아팠다. 늙은 부모란 왜 이리 불편하고 아픈 존재인지. 더 얘기하자니 아파서 여기서 줄인다.

 

p.54 아들이 말이라도 시키면 그는 항상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조용하고 고분고분하게, 공경심을 가지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항상 엄선된 말, 다시 말해서 아주 우스꽝스러운 표현만 사용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아들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 자체로도 아프긴 하지만, 자존감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 의존하는 대상에게 보이는 태도로도 보이기 때문에 더 아프다. 나도 이런 적이 있거든. 멋있어 보이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상대방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거. 이 책 왜 이렇게 아프냐.

 

p.57 나는 책의 무게로 인해 금방이라도 꺾어질 듯 휘어 있는 기다란 선반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화가 났고 슬펐다. 어떤 광기 같은 것이 나를 엄습해 왔다. 나는 그의 책을 마지막 한 권까지 전부 다 읽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꼭 그렇게 하고 말리라며 그 자리에서 마음을 먹었다. 나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나는 그가 아는 것을 나도 다 알아야 그와 우정을 나눌 자격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나는 첫번째 선반으로 냉큼 다가섰다. 아무 생각 없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먼지투성이의 낡은 책 한 권을 움켜잡았다.


 여기서부터 바렌까가 뻬쩬까에게 빠져드는 묘사가 나오는데, 너무 인상적이라 긴 문단임에도 옮겨보았다. 동경과 사랑, 열등감과 독점욕이 동시에 느껴지는 멋진 묘사다. 사랑이라는 건 결국 상대방을 원한다는 것이고, 그건 결국 스스로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상대에게 바라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에 열등감과 독점욕이 따라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사랑 = 동경 + 열등감 + 독점욕?

 

p.61 ⎡책을 한 권 가져왔어요. 받으세요. 그걸 읽으면 심심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책을 받았다. 어떤 책이었는지 지금은 기억 나지 않는다. 밤을 꼬박 새우긴 했지만, 그 책을 보았을 리는 없다. 묘한 흥분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한자리에 잠자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소파에서 몇 번이고 일어나서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내면에서 생긴 희열 같은 것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뽀끄로프스끼가 보인 관심 때문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바렌까의 들뜬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랑이 막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을 관음하는 것만 같다. 아니 도끼 선생님 이렇게 평범하게 잘 읽히게 쓰면서 왜 나중에 나오는 작품들(특히 명작으로 분류되는 것들은)은 그 모양이죠ㅠ

 

p.62 하지만 그가 나로 인해 지긋지긋한 책들을 잊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은밀한 기쁨과 만족감을 느꼈고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했다. 한번은 농담 삼아 내가 선반에 있던 책들을 떨어뜨렸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이상한 순간이었다. 나는 갑자기 솔직하도 대담해졌다. 뜨거운 열정과 기이한 격정에 휩싸여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중략)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숨기거나 감추지 않았다. 그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하루가 다르게 내게 더 깊은 애정을 보여주었다.


 바로 위의 발췌문에 이어서 바렌까의 감정을 관음하는 듯한 놀라운 장면들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걸 나누고 하나가 되고 싶은 바렌까의 강렬한 욕망이 2페이지에 걸쳐서 진득하게 묘사된다. 바렌까 자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떠들고, 뻬쩬까는 그것이 사랑임을 알고 당혹스러워한다. 너무 좋네. 이런 사적인 감정을 관음할 수 있는 소설인 줄 몰랐다...

 

p.64 추억은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항상 괴로운 것이다. 최소한 나한테는 그렇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또 달착지근한 것이다. 마치 타는 듯한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면 이슬이 폭염에 바싹 마른 꽃에 신선함을 주어 소생시키듯이, 추억은 괴롭고 아프고 지치고 슬픈 내 가슴에 새로운 힘을 주어 소생시키는 것이다.


 추억에 대한 정의가 인상적이라 옮겨보았다. 괴롭지만 달짝지근한 것, 그렇기에 새로운 힘을 주는 것. 단짠의 공식은 인간의 감정에도 적용이 되는 모양이다. 아파서 달고, 달아서 아픈 추억의 공식.

 

p.64 뽀끄로프스키는 내게 책을 자주 가져다 주었다. 처음 나는 잠이 들지 않기 위해 책을 읽었고, 시간이 좀 지나자 진지하게 그리고 나중에 책 속으로 몰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낯설고 새로운 것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느낌들이 거센 물결처럼 한꺼번에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런 흥분이 거세어질수록, 새로운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황스럽고 벅찰수록, 나는 점점 더 깊이 그 낯선 느낌에 빠져 들었고, 그 느낌은 점점 더 달콤하게 내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새로운 느낌들은 한꺼번에 내 가슴속에 들어와 북적거렸고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기이한 혼돈 상태가 나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책 덕후라 이런 묘사 보면 귀신 같이 받아 적는다. 새로운 지식과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두뇌가 열리는 묘사를 적나라하게 해두었다. 아니, 보면 볼 수록 너무 글을 잘 쓰는데... 석영중 교수님의 번역이 뛰어나서인 걸까? 죄와 벌을 읽었을 때의 당혹감이 조금도 없다. 오버 조금 보태서 지금 이 책을 내 읽는 기분이 마치 저 문단과 같다.

 

p.69 ⎡저기, 당신은 열 권만 그 애에게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주시는 당신의 선물로 열권만..... 그럼 저는 마지막 열한 번째 책을 제가 주는 선물로, 저만의 선물로 해서 그 아이에게 주도록 하겠습니다. (중략) 저는 저만의 선물을 통해 제가 나아지고 있고 바르게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 아이에게 증명해보이고 싶은 겁니다.⎦


 읽다가 정말 기가 찼던 부분이다. 뻬쩬까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엄밀히 말하자면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순수하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 속내를 숨기지도 않는 순수함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p.76 하지만 무엇보다 괴롭고 힘들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들이었다. 굳어가는 혀로 그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해달라고 했는데 나는 그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가슴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중략) 마침내 나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달라고 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이 주는 빛, 태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허, 바렌까와 편지를 주고 받던 사람이 뻬쩬까가 아니었단 말인가? 하긴 편지에서 자꾸 자기를 나이 든 노인이라고 묘사하기에 뭐지? 했는데 설마 뻬쩬까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였을 줄이야. 놀랍고 이상하다... 그것과 별개로 이 부분은 임종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라 신기했다. 지금까지 듣고 상상해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지인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만 같아서 이 부분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p.77 노인은 그녀와 말다툼을 하고 소란을 부리면서 뺏을 수 있는 만큼 책을 빼앗아 옷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에 모두 쑤셔 넣고, 모자 안에도 넣고, 그 밖에 넣을 수 있는 곳에는 모두 다 넣었다. 그리고 사흘 내내 그렇게 가지고 다녔다. 심지어는 교회에 갈 때조차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며칠 동안 그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 (중략) 마부가 속력을 냈다. 노인이 그 뒤를 쫓아가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의 울음소리는 달리는 속도에 따라서 떨리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했다. 가엾은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줍기 위해 멈춰 서지도 않았다.

p.78 옷에 달린 주머니에서는 온통 책들이 비어져 나왔다. 그가 내내 꼭 쥐고 있던 커다란 책은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다. (중략) 그의 주머니에선 계속 책들이 빠져나와 진흙탕 속으로 떨어졌다.


 아침에 읽다가 무심코 울었다. 자식이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과,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지 생각했다. 뻬쩬까의 죽음으로 인해 오열하는 마까르의 모습이 구구절절 표현되어 있다. 드디어 뻬쩬까에게 선물을 사줄 수 있어서 기뻐하던 마까르의 모습이 자꾸 오버랩된다. 코트에 책들을 우겨 넣고 아들의 뒤를 쫓다가, 그게 밖으로 흘러 넘치는 광경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아무리 움켜쥐려고 해도 자꾸만 빠져나가는 것이 마까르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 장면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6월 11일 ~ 9월 30일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

 

p.82 도대체 국민으로서 최고의 선행은 어떤 것일까요? 얼마전 예프스따피이바노비치는 사적인 대화에서 국민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돈벌이를 잘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중략) 도덕이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제 좀 내가 알던 도끼 선생다운(?) 부분이 나온다. 아들이 죽은 후, 바렌까와 사랑에 가까운 우정을 쌓아가며 편지를 나누는 부분이 계속 이어진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착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배제되어서 살아온 마까르의 분노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그 한 가운데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마까르. 그 뒤의 도끼 선생.

 

p.91 문학이란 정말 심오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교훈을 주기도 하고, 그리고 또 저기...... 아무튼 문학 속에는 그런 다양한 이야기가 씌어 있어요. 정말 훌륭합니다! 문학은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선 그림 같고 또 거울 같기도 합니다. 욕망에 대한 표현, 신랄한 비평, 가르침을 주는 교훈들, 방대한 자료가 그 안에 들어 있어요.

p.96 가끔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내가 글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날까?> (중략) <저기 문학자이자 시인인 제부쉬낀이 간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제부쉬낀이야!>라고 하면 저는 기분이 어떨까요?


  <매핑 도스토옙스키>에서 살짝 스포(?)를 당해서 마까르가 문학을 통해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문학에 매료되어가는 그를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좋다. 이와 함께 필력도 조금씩 좋아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연출인지 우연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문장이 절절해지긴 한다.

 

p.106 낯선 사람이 뭔지 제가 말씀드리지요. 낯선 사람의 빵을 먹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전 그것을 압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렌까, 낯선 사람은 사악합니다. 흉측하다고요. 너무나 사악해서 당신의 연약한 심장은 배겨 내지도 못할 겁니다. 질책과 비난과 섬뜩한 눈초리로 당신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 겁니다.


 눈칫밥의 무서움은 정말 당해본 사람만 알듯. 비인륜적인 행동을 제외하고 인류의 존엄성을 가장 많이 갉아먹는 행위가 있다면 바로 눈칫밥일 테니까. 인간성을 위해 인간성을 버리는 부조리한 행동. 인간의 존엄성이 설 자리는 이미 어디에도 없다.

 

p.110 쓸데없이 제게 고통을 주지 말아요. 의지가 없는 나의 연약한 새여,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 어떻게 스스로를 먹여 살리고, 파멸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악당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것입니까!


  이거 봐, 문장력이 점점 좋아진다니까?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하면서 수사적인 표현을 쓰게 된 걸 보여주려고 했던 걸까? 이런 점까지 노리고 쓴 거라면... 아니 그럴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다. 인물의 성장이 편지 너머로 진득하게 새어나온다.

 

p.112 어떤 여배우에게 홀딱 반해서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적이 있었어요.

p.114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빚을 잔뜩 진 다음에야 저는 그녀가 싫어지더군요.


 흔히 권태기가 오는 이유는 더이상 상대가 나의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권태기를 이겨내려면 서로가 생존에 필요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그 점을 도끼 선생의 방식으로 풀어낸 문장인 것 같다. 시간과 돈을 허비한 시점에서 그 여배우는 이제 생존에 방해가 되는 대상이 되었을 뿐이니까. 무섭다, 인간의 본성이란!

 

p.116 다른 사람의 사생활로 글을 써내는 이유가 뭐냐고요!

p.118 벌써 한 개인의 사회 생활과 가정사가 문학 작품에 실려 인쇄되고, 사람들에게 읽히고, 비웃음을 당하고, 도마 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해부되고 있잖아요! (중략) 하다못해 그의 머리에 서류를 쏟아 부었다는 얘기 다음에라도 <그럼게도 불구하고 그는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 훌륭한 시민이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함부로 대접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윗사람 말도 잘 들었다(여기서 다른 어떤 예를 들어도 좋겠죠). 다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하느님을 믿다가 숨을 거두었다(만약 작가가 그의 죽음을 꼭 바란다면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애도했다>라는 말들이 덧붙여졌다면 좋았을 거 아닙니까.

p.119 악은 응징되고 선은 승리하는 거예요. (중략) 이런 몹쓸 책이에요. 진실성이 결여된 책이라고요. 그런 관리는 있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가난을 관음하는 문학에 분노하는 마까르. 사랑이 없는 관찰은 관음에 불과하다. 서문에 나온 인용문은 이걸 의미하는가 보다. 빈자와 약자를 누구보다도 사랑한 도끼 선생님의 철학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문단이라 마음에 든다. 어쩌면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남길 문장은 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p.122 아, 나의 친구시여! 불행은 전염병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나도 불행은 전염된다고 생각한다. 불행한 사람들끼리 모여있으면 점점 더 불행해진다. 행복한 사람들끼리 있으면 점점 더 행복해진다. 비참한 일이다. 불행하고 싶어서 불행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는데...

 

p.123 한동안 제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살긴 했습니다만, 그 와중에도 그 사실은 제게 위안을 주더군요. 지금껏 살면서 제게 가장 컸던 충격과 어려운 일들은 이제 다행히 지나갔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결국 나를 강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장이다. 하지만 이후로 이어진 마까르의 삶을 생각해보면 씁쓸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한 순간이나마 이렇게 생각한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으로 느껴진다. 그에게도 잠시 평온한 삶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편지에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p.129 가난한 사람은 까다로워요.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 사나운 놈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들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가난해서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생각해서 가난해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눈치를 살피고 주눅드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다는 뜻. 눈치를 살피는 것만큼 비참하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일이 있을까.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 슬프다.

 

p.131 천박스럽기 짝이 없는 풍자 작가들은 여기저기 살피고 다니면서 이런 말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길을 걸을 때 발바닥을 전부 땅에 대고 걷다, 아니면 까치걸음을 하나?>


 작가가 앞서 말했던 천박한 작가들의 사례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관음하듯 해부하는 이들. 그리고 그걸 경멸하는 이들. 도끼 선생이 아마도 평생에 걸쳐 가장 미워했을 부류의 존재다. 하지만 이해가 된다. 타인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헤집는 걸 즐기는 행위를 그 누가 정당한 문학이라 할 수 있겠나.

 

p.135 바렌까, 그 순간 제 가슴이 얼마나 세게 뛰었는지 아십니까. 혼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신께서 뾰뜨르 뾰뜨르비치라는 은인의 마음을 움직여 돈을 꿀 수 있게 될지도 몰라!>


 희망이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돈을 빌릴 수 있는 것이 가슴이 터질 정도의 희망이라는 것에 놀랐다. 가난이란 건 대체 사람을 얼마나 찍어누르는 걸까. 이 상태가 되면 자존심이라는 것도 먹고 살기 위한 교환재에 불과할 뿐이다. 교환재조차 되지 못하는 것 같지만.

 

p.142 저는 제가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습니다.


 이때는 마까르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나나 싶었는데 뒷 내용을 읽고 보니 치열한 절망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잠깐 번뜩인 치열함을 희망으로 잘못 봤을 뿐. 하지만 이 상황에서 마까르가 딱히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p.143 마까르 알렉세예비치, 당신은 정말 성격이 이상하세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신은 너무 민감하게 가슴속으로 받아들이신다고요. 바로 그런 성격 때문에 당신은 항상 매우 불행한 사람이 되시는 거예요.

p.146 마까르 알렉세예비치! 슬퍼하지 마세요. 절망도 하지 마세요.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세요. 부탁드려요. 제발 부탁드려요. 다 잘될 거예요. 모든 일이 다 잘풀릴 거라고요. 그런 날이 오고야 말 거예요. 안 그러면 당신은 남의 슬픔 때문에 영원히 괴로워하고 아파하느라 사는 게 고통, 그 자체일 거예요.


 여기까지 읽을 때는 계속 마까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면서 읽으려고 했지만, 바렌까의 말을 들으니 모두가 가난하고 힘든 상황이라고 해서 마까르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바렌까가 훨씬 어리지만 현실을 대하는 태도는 그녀가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격의 차이일까? 아니면 위험에 훨씬 더 노출되기 쉬운 여성의 몸으로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일까.

 

p.150 그렇게 대수롭지 않지만 짜증나는 일들이 항상 사람을 미치게 만들곤 하죠. 사람으로 하여금 겁도 나게 만들고, 굳게 먹은 마음을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게도 하고요.


 맞아.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작은 짜증이다. 큰 사건 앞에서 오히려 인간은 작아진다. 작아진 인간의 틈을 작은 짜증과 헛도는 일들이 파고든다. 총알은 작지만 사람을 죽이기엔 충분하다.

 

p.158 언제나 그러셨듯 당신은 또 당신이 저지른 일이 부끄러워지시겠죠. 하지만 그러지 마세요. 그건 거짓 부끄러움이니까. 당신이 정말로 진정한 참회를 하시면 좋겠군요. 하느님을 믿고 희망을 가지세요. 그분은 모든 걸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겁니다.


 똑같이 가난하지만 상황을 보고 긍정하고자 하는 바렌까. 조금 멋지다는 생각도 든다. 절대 마까르보다 덜 힘들거나 덜 민감한 것이 아닐 텐데도. 적어도 그녀는 강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p.161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의 천사여, 저는 외롭기만 했습니다. 그땐 이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치 잠을 잤던 것 같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자각시킨다. 잠을 잤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라서 적어보았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상태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꿈의 세계가 있고 현실의 세계가 있듯 유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p.162 운명에 치이다 보니 제가 가지고 있던 장점도 스스로 부인하게 되고, 거듭되는 불행에 의기 소침해져서 그만 맥이 풀렸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닫는 기분 알지. 스스로 아무리 북돋워보려고 해도 안 되는 순간들이 있다는 걸 안다. 의기소침한 마음에 주눅이 들게 되고, 다시 또 의기소침해지고 점점 더 늪으로 빠져드는 아픔. 자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게 가장 아프다.

 

p.172 <나의 은인이시여, 어머니는 다 죽어 가고 있고 세 아이는 굶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제 자식들을 도와주신 은혜는 저승에 가서도 잊지 않곘습니다.>

p.173 이런 쪽지나 들고 다니면서 아이는 무엇을 배울까요? 마음만 잔인해질 테죠.


 잔인함을 배우게 된다는 게 인상적. 무자비 앞에서 잔인함을 배우게 되는 건 너무 당연한가.

 

p.174 소중한 사람, 제가 이런 얘기를 당신께 쓴 이유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전에 비해 훨씬 나아진 제 문장력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당신도 알아차렸곘지만 얼마전부터 저의 문체도 좋아지고 있거든요.


 정말로 문체가 좋아지고 있구나! 역시 작가의 의도였던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문장력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좀 더 눈여겨 봐야겠다. 

 

p.185 그런데 그때, 바로 그때, 지금 생각해도 펜을 그러쥘 힘조차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저의 단추가, 가느다란 실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망할 놈의 단추가 갑자기 실을 끊고 툭 떨어지더니 바닥으로 튀어 버린 겁니다. (아마 제가 저도 모르게 잡아당겼던 모양입니다.) 떨어진 단추는 소리를 내며 굴러가더니 그 저주받을 단추는 곧장, 그야말로 곧장 각하의 발을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침묵하고 있는 사이에 말입니다! 제가 각하께 대답하려던 모든 것을, 즉 변명과 사죄를 단추가 대신한 셈이었죠!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각하가 저의 겉모습과 의복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셨으니까요. 저는 거울 속에서 보았던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단추를 잡으려고 뛰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말입니까! 몸을 굽혀 단추를 집으려는데 단추가 구르고 돌고 하는 바람에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민첩한 행동을 구경시켜 드린 거죠, 헛헛. 마지막 남아 있던 힘마저 쓱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젠 끝장이구나!> 싶더군요.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지고 저라는 사람은 완전히 파멸된 것이었습니다.


 길지만 비참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라 발췌해보았다. 문서를 잘못 작성하는 바람에 각하에게 불려간 마까르. 하지만 정작 그가 가장 많은 지문을 할애하는 부분은 문서 작성으로 인해 혼나는 장면이 아니라 바로 이 장면이다. 혼나는 와중에 단추가 떨어지고, 각하가 있는 곳으로 단추가 굴러가고, 그것을 붙잡으려다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이고 만 장면을 마까르는 훨씬 더 굴욕적으로 느끼고 있다. 더 이상 추락할 게 없는 상황에서도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그의 모습이, 제멋대로 떨어지고 굴러가는 단추와 닮았다. 그러나 이후, 그에겐 놀라울 정도로 좋은 일이 벌어지는데...

 

p.187 제게 귀중한 것은 1백 루블이 아닙니다. 각하께서 친히 지푸라기같이 하잘것없는 이 주정뱅이의 손을, 이 천한 손을 잡아 주신 것이 감동스러울 따름입니다! 이것으로 각하는 저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신 겁니다.


 1백 루블. 감이 딱 오진 않지만 이것보다 훨씬 적은 돈에도 벌벌 기던 마까르의 모습을 상상할 때 굉장히 큰 금액인 건 확실하다. 각하로부터 동정을 받아 1백 루블을 공짜로 얻게 된 마까르는, 그것을 발판으로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인간성을 되찾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돈을 받은 게 기뻤겠지. 동정심만 보여주고 돈은 주지 않았다면 과연 마까르가 저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였을까 싶어 안타깝다.

 

p.192 바렌까, 산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특히 여기 뻬쩨르부르그에 산다는 것은 더욱 그래요. 저는 어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주님 앞에서 참회했습니다. 불평 불만, 자유 사상들, 추태며 도박 등등 제가 힘들었던 때에 저지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사 하고 빌었습니다.


 각하로부터 1백 루블을 받은 후, 마까르는 완전히 달라진다. 인생을 긍정하고 지난 날의 아픔을 낮추어 보기 시작한다. 잘 되어서 다행인 장면일 텐데, 이상하게도 이 장면이 가장 비참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삶의 가치 같은 건 결국 사회적 재화인 돈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성이란 건 뭐지? 무섭다. 돈 벌어야겠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도. 돈이 생존의 문제처럼 느껴진다. (당연한가?)

 

p.197 식사를 마치고 그는 아내에게 <여보, 잠깐만, 나 잠깐 눈 좀 붙일게>라고 말하고 침대로 가더랍니다. 딸아이를 불러서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쓰다듬기도 했고요. 그러더니 아내에게 <뻬쩬까는 어떻게 된 거야? 우리 뻬쨔 말이야, 뻬쩬까, 응?......> 하더래요. 아내가 성호를 그으며 <걘 죽었잖아요>라고 얘기했더니, <알아, 나도 안다고, 뻬쩬까는 지금 하늘 나라에 가 있어>라고 대답하더래요.

p.198 어느 순간 그녀는 불안한 느낌 때문에 퍼뜩 정신이 들었고, 방 안을 감도는 무덤 같은 정적에 소스라치게 놀랐대요. 침대 쪽을 보니까, 남편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누워 있더랍니다. 그래서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들추고 보았더니, 남편은 벌써 차갑게 식어 있더랍니다, 죽은 거예요.


 마까르가 줄곧 동정해온 고르쉬꼬프의 죽음. 언뜻 보기에도 비참한 마까르보다 훨씬 더 궁핍하고 빈곤한 삶을 살았다던 그의 삶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랜 재판 끝에 겨우 무죄 판결을 받아내자마자 숨을 거두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발췌했다. 딸아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듯 머리를 오래 쓰다듬는 장면도, 이미 죽은 아이를 찾는 장면도 너무 슬프다.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기력이 다해 죽었다는 느낌이 들어 더욱 아프다. 사람은 이렇게도 죽는다.

 

p.219 아, 소중한 이여, 문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저는 지금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쓴 것을 다시 읽어 보지도 않습니다. 문장을 고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뭔가를 쓰기 위해 저는 이러고 있습니다, 당신께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얘길 쓰려고요....... 사랑하는 이여, 소중하고 소중한 내 사람이여!


 이후, 마까르의 형편은 조금 나아지지만 바렌까는 비꼬르에게 청혼을 받고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마음은 원하지 않아도 바렌까는 비꼬르만이 자신을 이 궁핍과 죽음에서 구해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따라 나선다. 이후 바렌까가 떠나기 전까지 마까르와 주고 받는 편지가 정말 압권이다. 전부 다 싣을 수는 없어 마까르의 편지 마지막 부분을 싣어 보았다.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바렌까와 그녀를 잡기 위해 펜으로 거품을 물고 외치는 마까르의 모습이 절절하게 이어진다. 이후 편지는 없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편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까르의 마지막 편지에 '날짜'가 적혀 있지 않거든. 그는 아마 이 편지를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붙일 방법조차 없었겠지. 그렇게 두 사람의 편지는 막을 내린다.

 

 

 문학적 빈곤에 관한 짤막한 고찰

 

p.222 하급 관리, 비극적인 연애, 서한체 소설 등, 이 소설의 세가지 특성은 모두 당대 유행했던 고골 식의 자연주의, 생리학적 스케치, 루소나 리처드슨의 감상주의 소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는 기존 문학의 관계를 소설 속에 투입시키는 동시에 그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함으로써 이미 첫 작품에서부터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그는 상투적인 하급 관리 이야기를 가난에 관한 심리적 분석으로, 낡아빠진 서한체 연애 소설을 문학에 관한 진지한 담론으로 변형시킨 진정한 천재성을 이미 이때부터 보여 주었던 것이다.


 석영중 교수님의 짧은 고찰이 이어진다. 왜 이 작품이 당대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지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다. 기존의 자연주의 작품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에 그쳐 관음적인, 또는 관성적인 문학으로 평가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자연주의 작품의 문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동시에 그 나이브한 문법을 비판하는 형태로 이 작품을 썼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고, 작가란 역시 기술이 아닌 마음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p.223 스스로의 모습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는 것. 이 점이야말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인물을 구별지어주는 가장 괄목한 만한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여기에서 자연주의식의 박애주의와 도스또예프스끼의 박애주의의 차이가 드러난다. 요컨대 전자가 인간 이하의 인간을 보여 줌으로써 독자로부터 초보적인 수준의 동정심을 짜내려고 안간힘을 썼다면 후자는 인간다운 인간, 사고나 감정, 자기 성찰 등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한층 고차원적인 동정심을 이끌어냈다.

p.224 자연주의가 가난의 사회학을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그것으로부터 가난의 심리학을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나이브한 자연주의의 화법을 비판하고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 의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문학 의식 아래, 오히려 인간을 박제하는 것에 그쳐버린 자연주의식 박애주의와 달리 도스또예프스끼는 박제된 인간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다. 자연주의식 작품들의 하급 관리와 마까르의 조형을 비교하면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마까르는 하급 관리지만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자존심이 있고 동정심이 있으며, 문학을 읽고 글을 쓸 줄 아는 인간인 것이다.

 

p.224 한편 제부쉬낀의 빈곤은 심리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적 차원으로까지 올라간다.

p.225 그는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싸구려 연애 소설의 궁핍한 공간에 숨어 버림으로써 이중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p.225 반면 문화적으로 제부쉬낀보다 풍요로운 과거를 갖고 있는 바르바라는 책, 독서, 문화, 문학에 대해 정확한 가치 평가를 내린다.

p.226 요컨대 제부쉬낀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지적이고 문학적인 뽀끄로프스끼를 사랑한 적이 있는 바르바라에게 제부쉬낀은 어느 정도 이상은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문학적 빈곤의 상징인 것이다.

p.226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간의 좁여질 수 없는 거리는 독서뿐 아니라 글쓰기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중략) 제부쉬낀의 열렬한 애정과는 달리 바르바라의 감정은 상대방의 호의에 대한 의례적인 답례라는 사실이다.

p.227 그러니까 두 사람의 문체론적 차이는 감정의 차이와 나란히 양자의 비극적인 결별을 예고해 주는 셈이다. 바르바라가 제부쉬낀을 배우자로 선택하지 않은 것은 나이나 물리적인 빈곤 못잖에 제부쉬낀을 비참하게 만들어주는 문학적 빈곤 때문인 것이다.


 제부쉬낀과 바르바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의 관계를 단순한 남녀의 문제로 보지 않고, 문학적 수준(=인간적 수준)의 차이로 본 교수님의 통찰에 놀랐다. 읽으면서 쎄하다고 싶었던 부분들을 적나라하게 풀어주고 있다. 둘의 관계를 마냥 좋게만 보면서 읽었을 때와는 많이 다르다. 어쩌면 정말 바르바라는 처음부터 제부쉬낀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싶다. 다만 궁핍하고 힘든 가운데 의지가 되는 사람으로서 대했을지도 모른다. 문학적 수준의 차이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제부쉬낀이 보다 솔직한 문학관을 가진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여기서는 제부쉬낀이 가진 문학의 인식이 아직 자연주의 수준에 머물러있음을, 그러면서도 자신은 연애 소설에 심취할 정도로 문학의 공상적 부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점점 짧아지는 바르바라의 편지와 달리, 점점 길어지고 간절해지는 제부쉬낀의 편지를 대조해보면 더욱 명확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은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p.227 이렇게 도스또예프스끼는 외관상 물리적 빈곤을 테마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문학에 관한 문제를 진지하게 제시하면서 미학과 존재론의 상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는 책, 그가 쓰는 글이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미학 공식은 이미 첫번째 소설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제부쉬낀과 바르바라는 이후 도스또예프스끼의 위대한 소설에 등장하게 된 무수한 작가들, 독서가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는 책, 그가 쓰는 글이다. 눈이 번쩍 떠지는 놀라운 고찰이고 그것이 도스또예프스끼의 미학 공식이라니 또한 놀랍다. 실제로 사람은 자신이 읽는 것을 닮고, 자신이 쓰는 대로 변해간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다면 도스또예프스끼의 글은 내게도 유효하겠지.

 

'문학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007.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0) 2020.02.15
006. 백야 외  (0) 2020.01.19
004.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0) 2020.01.13
003. 분신  (0) 2020.01.05
001. 매핑 도스토옙스키  (0) 2019.12.2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