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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010. 상처받은 사람들

by 쿠데 2020. 4. 6.

 


상처받은 사람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29 / 130

윤우섭 옮김 / 열린책들

 


  시작

 

  이번엔 무려 두 권까지 작품이다.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써보려고 한다. 제목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제목만 봐도 내가 상처를 받는 기분이라 읽고 싶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인 만큼 이번에도 믿고 읽어본다. 대체 어떤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걸까.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감상

 

 도입은 언제나처럼 강렬하다. 늙은 노인과 늙은 개가 등장하고  챕터가 끝나기도 전에 연달아 죽는다. 그 광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인물인 '바냐'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그들의 죽음을 지켜본 것을 시작으로 바냐의 주변에서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인 바냐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라나 작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작가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도스또예프스끼의 작가론이나 개인적인 작가 생활에서 비롯된 사적인 생각들이 작품에 많이 스며들어있다. 대작가들의 사적인 생각이나 삶에 대해 늘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이번 작품도 즐겁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 바냐는 어디까지나 제3자, 혹은 관객과 비슷한 위치에서 주변 사람들을 조망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바냐 자신의 이야기보다 그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부각된다. 그들은 저마다 치명적인 상처를 하나씩 안고 있으며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거나 악화시켜나간다. 그 방식은 크게 상처를 외면하는 것과 상처를 직시하는 것으로 나뉜다. 이 리뷰에서는 각각의 케이스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행동 양태를 알아보고 상처에 대한 작가의 고찰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상처를 외면하는 사람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리뷰에서 중점적으로 보고 싶은 인물은 바로 '니꼴라이'와 '나따샤', 그리고 '알료샤'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대하지만 궁극적으로 상처를 외면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명 한명 살펴보도록 하겠다.

 

 상처를 부정하는 아버지, 니꼴라이 세르게이치

 

 우선 니꼴라이 세르게이치다. 그는 소지주로서, 고아였던 바냐를 거둬서 키운 아버지같은 인물이다. 바냐는 그의 지원 덕분에 작가로 성장한다. 따뜻하고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인물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이런 그를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발꼬프스끼 공작과의 만남이다. 그는 니꼴라이에게 관리를 맡긴 인물로 처음에는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지만 이내 본색을 드러내고 그와 갈라선다.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하지만 사실 내면에는 인간 이하의 악마가 도사리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발꼬프스끼 공작인 것이다. 

 

 공작은 부당한 누명을 씌워 니꼴라이로부터 돈을 받아내고자 한다. 이 일로 억울함이 존재 자체에 새겨져버린 니꼴라이는 그야말로 분노의 화신이 된다. 공작을 믿고 열심히 일했을 뿐이며, 결국 그 관계가 틀어졌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거기까진 차라리 좋았다. 이후에 벌어진 일로 그는 완전히 무너져내린다. 자신의 딸인 나따샤가 발꼬프스끼 공작의 아들인 알료샤와 사랑에 빠져 도피를 하게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따샤의 부모님인 니꼴라이와 안나의 삶은 완전히 초토화가 된다. 가뜩이나 공작과의 소송으로 자존심이 박살이 난 니꼴라이에게 나따샤의 도피는 그야말로 대못을 박는 행위나 마찬가지. 니꼴라이는 이 상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외면한다. 딸의 도망에 엄청난 상처를 받았지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이 너무나 보고싶지만 그 모든 사실을 부정한다. 이것은 그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그는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자기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상처를 직시하기엔 자존심에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떠난 나따샤의 삶이 행복하지 않으리란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상처를 감내하는 딸, 나따샤

 

 아버지인 니꼴라이가 상처를 부정하면서 회피하려고 한 타입이라면, 나따샤는 상처를 있는 그대로 감내하면서 회피하려고 한 타입이다. 상처를 감내하면서 회피한다는 게 모순된 말로 들리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상처입히면서 진짜 상처로부터 눈을 돌리려고 부단히 애쓴다. 심장이 파여있지만 팔에 남긴 자해상을 보며 아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따샤와 알료샤, 이 둘은 정말로 '좋지 않은 연인'의 대표적인 군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이너스만 될 뿐, 어떤 시너지도 낳을 수 없는 파괴적인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아슬아슬하게 관계를 이어간다. 사실상 이것이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갈등이기도 하다. 나따샤는 이 사랑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인물이고, 알료샤는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르는 무지한 인물이다.

 

 나따샤는 알료샤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의 순수함을 사랑한다. 실제로 알료샤의 순수함은 여느 인간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희소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거짓을 모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선의로 이해한다. 거짓과 기만이 판을 치는 이런 세상에서 알료샤만큼 순수하고 솔직한 인물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그의 순수함이 매우 기울어진 무대 위에서 쌓아올려진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의 순수는 진정한 의미의 순수라기보다 '무지'에 가깝다. 그는 무지하기 때문에 순수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 깨끗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원리다. 

 

 어찌되었든 그의 이런 무지함은 나따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동시에 지배욕을 충족시킨다. 그것이 나따샤를 상처입힌다. 그녀는 알료샤를 붙잡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고자 한다. 그가 외도를 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도 그저 그 모든 것을 참아내기만 한다. 나따샤는 알료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봐 두렵다. 그녀는 철저하게 을의 자세를 취하면서도 그와의 관계에서는 갑의 위치를 차지한다. 알료샤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대신, 그가 자신을 절대 떠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패턴은 이러하다. 나따샤의 사랑에 부담을 느낀 알료샤가 외도를 하거나 돈을 흥청망청 쓰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리고 알료샤가 돌아와서 용서를 구하면 나따샤는 그것을 누구보다 기뻐하며 받아들인다. 알료샤 또한 나따샤의 용서에 모든 죄를 사함받은 듯이 기뻐한다. 그리고 한동안 화기애애하게 지내다가 며칠이 지나면 다시 알료샤의 외도가 시작된다. 그야말로 어리광쟁이와 지배욕을 감춘 어머니라는 두 전형으로서 찰떡 궁합을 자랑한다. 연인이란 단지 좋은 부분이 맞아서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나쁜 부분이 잘 맞아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알료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아픔을 알료샤의 외도를 견디는 것으로 대체한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그녀 또한 자신의 아버지처럼 진짜 상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알료샤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지 알았다면 그녀는 일찌감치 그를 포기하고 자유로워졌을 테니까.

 

 상처를 모르는 남편, 알료샤

 

 마지막으로 상처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그것을 회피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알료샤다. 그는 어떤 점에서는 가장 불행하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통해 성장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든 그는 순수하다. 보통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렇게 순수하고 솔직한 인물에 대해, 그가 아무리 바보 같다고 하더라도 긍정적인 시선을 감추지 않았는데 (<스쩨빤치코보 마을 사람들>의 예고르라든가) 알료샤에 대해서는 꽤 대놓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같은 순수함이라도 폭격 위에 세워진 고결한 순수함이 있고 살찐 밭에서 재배한 금쌀을 먹으며 자란 순수함이 있다. 그 자체만으로 옳고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의식없는 순수함이 쉽게 악으로 변질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것엔 타인에 대한 배려도 자신에 대한 이해도 녹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자 알료샤는 그런 나따샤를 알게 모르게 멀리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는 타인에게 의지의 대상이 될 만한 능력이 없다. 그는 더 강한 누군가에게 휘둘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알료샤는 점점 더 나따샤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연인인 까쨔에게 점점 더 빠져든다. 그녀는 알료샤와 똑같은 어린아이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일 줄 아는 능동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둘의 관계는 예정된 파국을 향해 나아간다. 그들의 위태로운 관계를 눈치 챈 발꼬프스끼 공작이 끼어들면서 이야기를 더욱 급진전된다. 그는 알료샤에게 새로운 연인인 까쨔를 소개한다. 백작 가문의 아가씨인 까쨔는 이들과는 또 다른 전형으로서 흥미로운 인물이다. (작가는 '천진한 어린이와 사고하는 여인의 조합(p.399)'이라고 말했다.) 이 글에서는 별도로 다루지 않겠지만 까쨔라는 인물은 나따샤와 알료샤 사이에 있는 듯한 흥미로운 인물이었다는 것만 밝혀둔다. 아마 그녀의 유형은 이후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작품들에서 다른 형태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공작은 까쨔의 엄청난 재산을 빼돌릴 겸 알료샤와 나따샤 사이를 은밀한 방식으로 이간질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결국 둘의 관계는 무너지고 만다. 알료샤는 까쨔와 함께 떠나버린다.

 

  공작이야 대놓고 나쁜 놈이지만 알료샤는 자신의 행동이 악하다는 걸 모르는 것이 악하다. 무지는 악이라는 말에 들어맞는 캐릭터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알료샤가 어떻게 처벌받을지만 기대하면서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그는 평생 아버지의 농락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그게 그가 받을 가장 엄중한 처벌이라면 처벌이다. 작중 내내 보여준 공작의 사악함을 생각하면 알료샤의 남은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제법 무겁게 느껴져서 그 부분은 조금 위안이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니꼴라이, 나따샤, 알료샤는 각각 자신의 방식으로 상처를 외면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에 따라 결말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결말을 맞이하는 데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들과 달리 자신의 상처를 누구보다도 똑바로 바라보고 비명을 지르며 아파할 줄 아는 '넬리'라는 소녀다.

 

 상처를 직시하는 유일한 소녀, 넬리

 

 알료샤와 나따샤의 기괴한 관계가 계속되는 가운데, 바냐는 한 명의 어린 소녀를 만나게 된다. 소녀의 이름은 넬리. 작품 도입에서 숨을 거뒀던 노인의 손녀다. 그녀는 이 작품의 히든 히어로인 동시에 이 작품 그 자체이기도 하다.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제목에 가장 걸맞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노인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넬리를 바냐가 챙겨주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넬리는 이 작품에서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상처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그 짧은 삶 속에 새겨진 무수한 결들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바냐를 경계하기도 하고 와서 안아주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자신의 부서진 상흔들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상처를 숨기거나 견뎌내려고 했던 니꼴라이나 알료샤와 달리 넬리는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분노할 줄 아는 인물인 것이다.

 

 후반부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넬리는 바로 그 악마같은 발꼬프스끼 공작의 딸이다. 발꼬프스끼 공작은 넬리의 어머니를 속여 막대한 돈을 훔치고 집안을 망하게 만든다. 이 일로 넬리의 어머니는 평생 분노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넬리의 할아버지 또한 평생에 걸쳐 어머니를 미워하게 된다. 결국 둘은 화해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숨은 거둔 뒤에야 할아버지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기력이 다한 할아버지 역시 머지 않아 숨을 거두게 된다.

 

 혼자 남겨진 넬리는 분노한다. 악에 바쳐 살다가 결국 숨을 거두는 넬리를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답답한 마음도 든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지난 과거따위는 빨리 잊고 보란듯이 잘 살아가는 것이 공작에 대한 진짜 복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넬리는 굳이 공작을 잊어주는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상처를 만천하에 내보인다. 집요할 정도로 아파하고, 집요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죽는다. 어째서?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선 복수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공작을 향한 복수는 실패했어도 다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자 했던 넬리의 행위는, 상처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 살아야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킨다. 그들은 넬리의 저항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시한다. 그리고 분노에게 내주었던 삶의 주권을 다시 찾아온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 모든 숭고는 넬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진정한 삶을 상처를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증오가 태우는 것은 상대가 아닌 자신이다. 하지만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증오는 최후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을 구현하는 캐릭터가 바로 넬리다. 단순한 인간 관계라면 모르겠지만 사회적 계층에 의해 저항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은 증오를 꽉 문채 죽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근원인 공작은 마지막까지 처벌받지 않는다. 그것이 당시 러시아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라는 해설이 인상적이었다. 점점 더 부르주아 중심이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그동안 믿어왔던 박애주의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낀 절망감이 분노라는 저항 의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분노는 현실에 대한 비관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여전히 이상을 추구한다. 무의미한 저항과 분노에 의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따샤와 나, 그리고 니꼴라이의 삶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넬리의 희생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바냐,」 그녀가 말했다. 「바냐, 이것은 한바탕의 꿈이었어요!」
 「뭐가 꿈이라고?」 내가 물었다.
 「모든 게, 모든 게,」 그녀가 대답했다. 「이 1년 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바냐, 내가 왜 당신의 행복을 깨뜨렸을까요?」
 그리고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읽었다.
 <우리는 함께 영원히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지난 1년 동안 알료샤와의 미몽에 빠져 현실을 보지 못했던 나따샤. 심지어 알료샤와 헤어진 뒤에도 여전히 그 꿈에 잠겨 있었던 나따샤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넬리의 장례식이다. 그녀는 지난 1년을 '한바탕의 꿈'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바냐를 본다. 짧은 악몽과 영원한 행복의 차이를 비로소 확인한다. 분노를 악문 채 살다간 넬리의 헛헛한 빈자리는 어쩌면 나따샤나 니꼴라이의 자리였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작은 소녀의 분노는 결국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삶을 구원한다. 그녀가 그 모든 분노를 온 몸으로 직시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처를 직시하지 않고는 문제를 볼 수 없다. 문제를 덮고 분노를 억누르는 방식만으로는 상처 너머에 있는 진짜 자신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넬리의 분노는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와닿는다. 그들은 상처를 무시하려고 했던 지난 날을 뒤로한 채, '상처받은 사람들'이 되기를 선택하여 비로소 출발점에 선다. 이 책의 마지막, 나따샤가 바냐 그 자체를 응시하는 그 장면이 바로 그 출발점을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란 결국 넬리와 같은 존재인 게 아닐까? 좋게좋게 정신만으로는 절대 강렬하고 진솔한 글을 쓸 수 없다. 진솔한 글엔 절규가 담겨 있다. 순응하지 않고 그 절규를 지르고자 하는 저항의 심리가 숨어 있다. 상처받았음을, 아픔을, 그리고 괴로움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림으로서,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하는 작업이 바로 자신의 내면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넬리는 그렇게 했다. 글 한 줄 쓰지 않았지만 넬리는 그 누구보다 작가적인 인물인 것이다. 인생을 바쳐 분노를 표현하고 모든 것을 거리낌없이 내놓은, 진정한 의미에서 순수한 예술가이자 작가인 것이다.

 

 예술가는 소리내어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소리내어 울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만큼 삶의 진득함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분노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아픔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진솔한 글을 쓸 수 있을리가 없다. 혹자는 그것을 어리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리광은 예술의 본질이다. 일단 아프면 울어야한다. 그것이 예술이다. 해결은 그 다음의 영역이다.

 

 전집을 읽어나갈 수록 작품에 드러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독기도 점점 더 강해지는 느낌이다. 이것은 그가 조금 더 순수한 의미에서 예술가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리라. 그는 계속 절규할 것이고, 화를 낼 것이고, 어리광을 부릴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후반의 명작들이 태어났으리라 믿는다. 그의 절규가 어떤 메아리로 돌아올지 계속 지켜보겠다.

 

  문장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만이 아니라 용기도 필요해.」
p.371

 이 문장이야말로 이 작품의 본질을 표현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용기란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용기다. 자꾸만 삶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현실을 직시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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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사람들 - 상

 

제1부

 

 1

 

p.11 나는 다음 작품을 구상할 때면 언제나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길 좋아했다.

p.11 [주석] <표도르는 《좁은 집에선 생각까지 좁아진다》고 확신했고, 그는 널찍한 방이 적어도 두 개는 딸린 아파트를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태세가 되어 있었다>라고 씌어 있다. - 그것은 작품을 구상할 때 도스또예프스끼의 습관이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도스또예프스끼를 많이 닮은 모양이다. 뒤에서도 이런 식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실제 행동과 관련된 주석들이 많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작가에 대한 사담을 좋아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고 있다.

 

p.12 [주석] <그는 항상 그 일에서 떨어져 나와 집필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빈둥거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일하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과 감정이 무궁무진해서 한가해도 괴로워하지 않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


 사담이 이어진다. 도스또예프스끼 정도로 성실한 작가가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컴퓨터도 없던 시기에 이만한 분량의 소설을 몇 권이나 써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p.18 <(전략) 그리고 이미 어떤 날카로운 비평가가 내 최신작을 비난 섞어 분석하면서 지적한 것처럼, 최근에 느끼는 이 사소한 일에 대한 값싼 흥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화자인 바냐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왠지 도스또예프스끼의 마음이 그대로 실려있는 것 같아 발췌해보았다. 그도 크고 작은 비난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모양이다. 대작가라고 해서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닐 테니까.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종종 발견하는 대작가의 인간적인 면모에 안심하게 되는 이 심리란...

 

  2

 

p.28 글쓰기의 기계적인 활동이 이미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진정시키고, 냉정해지도록 만들며, 나의 내부에서 과거의 작가적 습관을 일꺠우고, 나의 회상과 병적인 몽환을 일, 즉 작업으로 변환시켜 놓는다.......


 내가 글을 사랑하는 이유와 똑같은 문장이라 반가워서 발췌했다. 글은 사람을 객관적으로 만들고, 묵은 감정을 해소하며, 지리한 삶 속에서도 작은 발전을 이루게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할 만한 문장이다.

 

  3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그를 돌봐준 니꼴라이 세르게이치라는 소지주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이다. 아, 세속적인 욕망에 찌든 발꼬프스끼 공작이라는 사람도 등장한다. 이 인물이 향후 소설에서 주연이 될 거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과연 어떤 식으로 얽히게 될지 궁금하다.

 

  4

 

 니꼴라이 세르게이치와 발꼬프스끼 공작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어 어떻게 파국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간단한 요약이 적혀 있다. 이렇게 갈라선 시점에서 나도 발꼬프스끼 공작과 더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게 될 것 같은데, 흐음.

 

  5

 

 작가로 성공하여 금의환향한 나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이 당시에도 작가는 공직에 비해 천대받는 직업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죽어가고 있는 현재와 달리 한때 꿈과 희망에 가득찼던 시절이 그려지며 괴리감을 자아내고 있다.

 

  6

 

p.54 「(전략)아직 무엇이든 더 써야 하나? 그럼 쓰게나, 가능한 한 빨리! 지금의 성공에 안주하지 말게. 무엇을 기다리나!」

p.54 [주석]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거나 어떤 계획을 격려할 때 즐겨 쓰던 표현들 중 하나이다.


 대작가의 격려라니, 이런 문장을 발췌해놓고 두고두고 봐야 한다. 그나저나 도스또예프스끼가 저렇게 자기계발적인 말을 했다는 게 신기하다. 나는 이 작가에 대해 상당히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렇게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성실할 수 있다니!

 

  7

 

 니꼴라이 세르게이치와 발꼬프스끼 공작의 소송이 계속되는 가운데, 니꼴라이의 딸인 나따샤가 발꼬프스끼 공작의 아들인 알료샤와 사랑에 빠져 도피를 결심하게 된다. 떠나려는 그녀를 뒤쫓는 나의 모습이 등장하는 짧은 챕터다.

 

 8

 

p.76 「(전략) 어쨌든 나는 그의 노예가, 가장 자발적인 노예가 된다는 것이 기뻐요. 그의 모든 것을, 모든 것을 견뎌 내겠어요. 그가 나와 함께만 있는다면, 내가 그를 볼 수만 있다면! 설사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내가 있는 곳에서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거기에 함께 있기만 한다면...... 이것은 지저분한 일일까요, 바냐?」

p.77 「(전략) 그러나 결혼하면 불행해질 테고 나에게 욕을 하기 시작할 거예요. 나는 그가 언제든, 무슨 일로든 나를 비난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어요. 하지만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에요. 그가 만일 저와 치른 결혼으로 불행하게 된다면, 왜 내가 그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하나요?」


 허어... 나따샤의 광기에 가까운 사랑 고백이 기가 차서 일단 발췌했는데 거참... 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건 이해하는 바지만, 자신의 불행을 감내하면서까지 곁에 있고 싶은 상대라니. 물론 이건 나따샤의 문제도 있겠지만, 이쯤 되니 알료샤라는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궁금하다.

 

 9

 

p.78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마치 그의 시선이 모든 나의 의심을 풀어 줄  수 있고, 무엇으로, 어떻게, 이 어린아이 같은 친구가 그녀를 매혹시키고, 그녀에게서 이러한 무분별한 사랑을, 자신의 최우선적인 의무를 잊고, 그녀가 지금까지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기던 것을 주저없이 희생시킬 정도의 사랑을 낳게 할 수 있었는지를 해명해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젊은 공작은 나의 두 손을 꼭 잡아서 쥐었다. 그리고 그의 온화하고 맑은 시선이 나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p.80 그에게는 도대체 꾸밈이란 게 없었다. 그의 마음은 연약하고, 남을 쉽게 잘 믿으며, 소심했다. 그에게는 의지란 게 없었다.

p.81 이런 사람들은 소위 영원한 미성년으로 선고받은 듯하다. 내가 보기에 그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라곤 없는 듯했다. (중략) 나따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그의 주인, 주재자, 심지어 그가 자신의 제물이 될 것이라는 점을 느꼈다.


 마침 바로 알료샤가 등장하고 바냐가 그를 관찰하는 내용이 나온다. 어떤 점에서 나따샤가 정신이 쏙 빠진 건지 좀 알 것 같긴 하다. 번듯한 외모와 훌륭한 사회적 지위를 갖춘 남자가 내면은 완전히 어린아이 수준이니, 남자로서 매력과 동시에 모성애를 함께 느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런 순수한 사람들이 갖춘 솔직함이 양념처럼 작동했겠지. 사람 관계에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게 신뢰를 이런 사람들은 아주 쉽게 얻어낸다. 바보 같지만 솔직하다. 이렇게 포지셔닝이 되면 신뢰가 생기지 않을 수 없지. 사실 솔직하지만 바보인데도.

 

 10

 

 아마도 작품의 히로인일 법한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이 소녀가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에 계속 주시하면서 따라갈 예정이다.

 

 11

 

 소녀는 뒤쫓다가 실패하고 다시 만난 이흐메네프(니꼴라이 세르게이치)와 잠시 얘기를 나눈다. 그는 딸인 나따샤가 알료샤와 함께 도망친 후로 폐인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아내인 안나도 마찬가지. 그들이 고아 소녀를 한 명 입양하기로 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짧은 챕터가 종료된다. 이 소녀가 설마...?

 

 12

 

 나따샤의 어머니에게 나따샤의 소식을 전달한다. 당연히 나따샤는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있었고, 심지어 알료샤는 다른 백작 부인의 양녀와 결혼담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다. 딸을 그리워하는 안나의 안타까운 심리가 병적으로 그려진다. 

 

 13

 

p.123 그러나 그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다. 이런 일은 지극히 선하기는 하지만 나약한 사람들에게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죄 없는 사람, 주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아프게 할지라도 자신의 가슴속에서 끓고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음으로써 자기 쾌락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아픔과 분노에 몰두한다.


 평소에는 분노를 눌러놓고 살던 사람들이 한 번 폭발하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관찰한 르포다. 자기 쾌락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아픔과 분노에 몰두한다는 부분이 참 날카롭다. 

 

p.125 「사람들이 모욕받고 능욕당한 나에게 그 방종한 것에게 가서 용서를 빌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야! (후략)」


  딸을 되찾기 위해 공작에게 가서 사과를 하라는 부인과 사람들의 은근한 시선에 상처를 입은 니꼴라이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피해자더러 가해자에게 사과를 하라는 상황만큼 분통 터지고 자존심이 박살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심지어 그게 불가항력이라면...... 읽다가 나도  같이 화가 나서 발췌했다.
 

 

 14

 

p.129 일은 보통 이렇게 진행되었다. 알료샤가 나와 함께 들어서서 소심하게 그녀에게 말을 붙이고 겁먹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를 본다. (중략) 반대로 그녀는 한층 더 애교부리고 더 부드럽고 명랑하게 대한다. (중략) 마치 알료샤를 용서하는 바로 그 과정 가운데서 그녀는 특별하고 세련된 즐거움을 찾는 듯했다. (중략) 그녀가 온순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자 알료샤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래서 이내 마음을 가볍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가 말하듯 모든 것을 이전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묻지도 않는데 모든 것을 스스로 털어놓는다. 용서를 받고 나면, 그는 희열에 젖어 들고 이따금 기쁨과 감동에 사로잡혀 울기도 하며, 그녀에게 입맞추고 끌어안는다.


 알료샤와 나따샤, 이 정신나간 커플(?)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이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는 게 맞는 것인가? 죄를 저질러놓고도 아이처럼 응석부리고 싶어하는 알료샤와, 그런 알료샤를 어머니처럼 관대하게 품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나따샤다. 왠지 이 커플은 마지막까지 절대 헤어지지 못할 것 같다. 이렇게 나쁜 쪽으로 서로 궁합이 맞아도 연인이 되는 거구나 싶다.

 

 15

 

p.140 「만일 내가 그를 기쁘게 해드린다고 해도, 그는 과거의 행복을 동경할 것이고, 내가 이미 옛날과 똑같은, 어린애로서 사랑하던 때의 나따샤가 아니라서 슬퍼할 거예요.」

p.140 「나따샤, 물론, 그는 이제 당신을 새로이 인식하고 다시금 사랑해야만 할 것이오. 중요한 것은 새로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럼, 그는 당신을 다시 사랑하게 될 거요. (후략)」


 이미 변질되어버린 관계에 대해 두려워하는 나따샤와, 변질되었기 때문에 새로이 쌓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바냐의 대비된 태도가 흥미로워 발췌했다. 관계란 원래 큰 사건이 없어도 변하게 마련이니 그때 그때 치우고 다시 쌓아올리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p.144 「(전략) 하지만 나는 그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나를 떠날 수 있도록 좋은 방법을 찾아야만 하겠어요. 이것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에요. 도와주세요. 나에게 무엇이든 조언해 줄 수 있겠지요?」

p.144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지.」 내가 말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완전히 거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오. (후략)」


 모든 연애에 있어서, 어떤 상황이든 간에 상대가 달라지길 바라는 것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인 것 같다. 상대가 달라지길 바라면 결국 내가 달라지는 수밖에 없다. 과연 나따샤가 그걸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2부

 

  1

 

 반전이라면 반전이랄지 바람나서 떠난 줄 알았던 알료샤가 오히려 아버지와 담판을 뜨고 돌아와 나따샤에게 청혼을 한다. 이야기가 어찌 진행되려고 이러는가...?

 

  2

 

p.186 어떤 표현들은 명백히 준비된 것이었지만, 여러 군데에서 길어지거나 또 그 장황함 때문에 이상해진 연설을 하는 동안, 그는 유머와 태연함과 농담의 형태로 솟구치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고 애쓰며 짐짓 기인인 체했다.


 알료샤에게 폭탄을 맞고(?) 마치 마음을 바꾼 듯이 나따샤를 찾아와 결혼을 허락하는 공작의 모습이다. 그의 발화 중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묘사되어 있어서 발췌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마치 의도한 듯 표현하는 이런 태도는 누구든 한 번은 취해봤을 테니까. 어쨌든 이렇게 일이 쉽게 진행될 것 같지 않은데... 왠지 불안하다.

 

  3


 일전에 만났던 그 소녀가 다시 주인공의 집으로 찾아온다. 소녀의 이름은 엘레나. 척 보기에도 가난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왠지 모를 생명력을 갖춘 이 소녀에게 주인공은 매료된다. 기어이 소녀의 집을 따라가보기까지 하는데... 는 너무 스토커처럼 보여서 좀 싫었던 장면 중 하나다. 소녀가 중요한 인물이니 어떻게든 연결점을 만들기 위해 이런 전개를 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어린 소녀의 뒤를 쫓아 거주지까지 캐내는 성인 남성이라니... 유쾌한 느낌은 아니다.

 

 4

 

 아무튼, 엘레나의 뒤를 따라간 바냐는 그녀가 부브노바라는 집주인으로부터 학대를 받는 광경한다. 하지만 사태를 해결하기도 전에 그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중학교 시절의 친구인 마슬로보예프다.

 

  5

 

 마슬로보예프가 부브노바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특히나 발꼬프스키 공작이 그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바냐는 엘레나를 구하기 위해 그와 좀 더 대화를 나누기로 한다. 그 전에 니꼴라이의 집에 가서 나따샤의 결혼 허가 소식을 알려야하지만.

 

  6

 

p.232 나의 준엄함과 거만한 태도가 시기 적절하고 권위가 있었던 것은, 실제로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를 몹시 책망해 주었으면 하는 저항할 수 없는 욕구를 느끼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간만에 발췌하고 싶은 문장이 나와서 잽싸게 썼다.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던 나따샤와 알료샤 사이에 다시금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어쩌면 공작은 이런 내전을 의도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따샤의 투정에 대해 엄격해지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어떤 태도든 권위가 있는 시기가 있고 없는 시기가 있다. 상대가 지지를 원하는 상황에서 이런 태도는 극약처방이겠지.

 

  7

 

 부브노바로부터 엘레나를 데려오는 장면이다. 엘레나의 학대씬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으서 심적으로 조금 힘들다. 그래도 바냐의 손에 의해 구조되었으니 앞으로는 엘레나의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길 바랄뿐. 

 

  8

 

 드디어 엘레나가 집에 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대된다.

 

  9

 

 엘레나는 도무지 바냐의 호의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이 와중에 나따샤는 나따샤 대로 알료샤가 집에 오지 않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제발 알료샤를 버려!ㅠㅠ

 

  10

 

p.276 「많은 경우 돈은 독립된 입장, 독립된 결정을 가능케 해주네.」


 돈에 대한 생각, 평소 나의 지론과도 일치하는 문장이라 생각난 김에 발췌했다. 그만큼 스토리 전개가 빨라서 발췌할 만한 문장이 없다... 아무튼, 갑자기 집을 찾아온 니꼴라이가 공작과 결투를 할 생각이라며 고집을 부린다. 그 딸에 그 아버지랄지, 복수심에 가득차서 파멸을 선택하고자 하는 니꼴라이의 행동이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11

 

p.27 「차 드시겠어요?」 그녀는 이 대화를 지속하기가 난처하다는 듯 내 말을 끊었다. 이런 현상은 모든 순진하고 성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을 칭찬하는 말을 들을 때 나타내는 것이었다.


 오만하고 무례한 엘레나의 행동 가운데에서도 그녀의 순수하고 좋은 점을 길어 올리려고 하는 바냐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이런 바냐에게 엘레나가 마음을 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 이후, 엘레나는 바냐에게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게 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다양한 수식어로 (비밀스럽고 거의 이해 불가능한, 이 모든 무의미하고 비정상적인 삶으로 가득 찬 끔찍한 지옥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음울하고 괴로운) 겁을 주고 있어서 벌써부터 기대된다.

 

  12

 

 겨우 마음을 연 넬리가 자신의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 과거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보다 뒤에 나온다. 그만큼 그녀의 존재는, 그녀의 이야기는 이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제3부

 

 1

 

 결혼 약속 이후 알료샤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공작의 진짜 의도와 목적을 파악한 나따샤가 그와 전면전을 펼치는 내용이다. 나따샤가 그 정도의 이성을 갖춘 똑똑한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알료샤에 대한 사랑으로 눈이 멀긴 했지만 이제 그것마저도 서서히 벗겨지는 듯하다. 나따사갸 너무 불쌍하다. 그녀는 그저 사랑을 했을 뿐인데.

 

2

 

p.309 「<네가 만일 까쨔에게 갈 이유가 있었다면, 여기 와야 할 이유는 그 두 배다>라는 말씀이죠. 아버지께 전적으로 동의하며, 더욱이 제 입장에서 덧붙이자면 두 배가 아니라 수천 배의 이유가 있다고요! (하략)」


 이 문장에서 악역의 새로운 전형을 봤다고 하면 조금 오버일까? 단순히 상대에게 악의를 내비치는 것만이 악인이 아니라, 자신의 선량함을 강조하면서 교묘하게 사태에서 벗어나는 사람 또한 악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악의가 없는 것이 바로 악의다. 이 작품에서 공작 못지 않게 해로운 인물이 바로 알료샤라고 생각한다. 

 

p.321 「모든 사랑은 사라지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영원히 남는다.」


 캐릭터는 패고 싶을 만큼 얄밉지만 종종 공작이 던지는 고찰에서 통찰력이 느껴져서 곤란하다. 

 

 3

 

p.329 「그는 그녀에게 전 생애를 바칠 것이다. 새 여인에게는 단지 1분만....... 그리고 나따샤가 이 1분조차 시기한다면 그녀는 얼마나 고마움을 모르는 여자랴?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이런 비겁한 논리에 당할까봐 두렵다. 관대함이란 것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남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이 요구한 관대함은 폭력이다.

 

4

 

p.341 나따샤는 그를 잡지 않았고 오히려 가라고 충고했다. 그녀는 알료샤가 의도적으로 또는 과도하게 자기 옆에 하루 종일 앉아 싫증내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나따샤가 얼마나 비참했을지... 읽기만 해도 그녀의 비참한 심정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떠나가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원치 않는 배려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아프다. 

 

 5

 

 징검다리 같은 에피소드지만 중요한 내용을 다수 담고 있다. 마슬로보예프가 공작과 넬리 사이에 무언가 다리를 놓으려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고, 알료샤의 마음이 완전히 떠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6

 

p.371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만이 아니라 용기도 필요해.」


 마슬로보예프가 나따샤의 이야기를 듣고 내린 총평이다. 실제로 그러한 것 같다. 단지 상황을 이성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기만당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멋진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7

 

 마치 예정된 일이었다는 듯 공작이 나를 찾아온다. 공작이 찾아올 때마다 악마의 방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실제로 이후 그가 보여주는 행동들도 악마에 가깝다.

 

 8

 

p.387 그는 마치 내 물음을 전혀 듣지 못한 듯 갑자기 되물었다.

p.387 즉 그가 마치 내 물음을 알아듣지도 못한 것처럼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마도 내가 대담하게도 그런 물음을 던짐으로써 주제넘었고 거리낌 없이 굴었다는 것을 내게 인식시키려는 듯, 자신 쪽에서 다른 물음을 던져 내 물음을 끊는 조야하고 상류층 같은 태도를 보였다. 나는 이 고상한 태도가 정말 증오할 정도로 역겨웠으며, 전에 알료샤로 하여금 그 버릇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었다.


 이 부분이 왜 상류층의 태도라고 하는 건지 궁금해서 여러 번 읽었는데,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대화를 이끌어나가겠다는 태도 때문인 듯하다. 그것이 상류층만의 태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대를 얕잡아 보는 사람의 화법인 것만은 분명하다.  

 

 9

 

p.399 완전히 어린아이 같은 생각과 상상이 진지한 경험으로부터 획득한 느낌과 삶의 관찰들에(까쨔는 이미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혼합되는지, 그리고 동시에 아직 그녀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경험으로부터 유래하지도 않았지만, 책에서 얻은 추상적인 생각들과 이것이 어떻게 혼합되는지 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중략) 그녀는 아마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런 생각에 이르렀다고 여길 것이다. 

p.399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녀에게 어떤 특별한 매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고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렇게 꼼꼼하지도 않고, 아주 어린아이 같은 명랑함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은 첫눈에 그녀의 모든 기발함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용인하게 되는 것이었다. 

p.399 이 천진한 어린이와 사고하는 여인의 혼합, 그리고 진실과 정의에 대한 아이 같고 성실한 갈구, 그리고 자신의 추구에 대한 굳건한 믿음,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얼굴을 아름다운 내면의 빛으로 빛나게 했고, 그 얼굴에 일종의 높은 정신적 아름다움을 부여하였다.


 알료샤의 새로운 연인인 까쨔에 대한 주인공의 관찰일기다. 이 부분은 읽고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은연 중에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인간의 유형에 대해 도스또예프스끼가 정확하게 해석을 해준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런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고, 이런 매력을 풍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구체적으로 인식한 적은 없는 유형인데 단 한 페이지의 문장을 통해 이 유형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파악하게 된 것이 놀랍다. 대작가의 통찰력을 발견하는 이런 순간 때문에 계속 그의 작품을 읽게 된다.

 

p.400 나는 알료샤가 그녀에게 열정적으로 끌리게 된 것을 이해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는 그는, 그를 위해 사고하거나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사람을 사랑했을 것이고, 까쨔는 이미 그를 자신의 후견하에 둔 것이었다. 

p.400 그에게 자신의 의지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끈기 있고, 강하고 열정적인 의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알료샤는 무엇인가로 자신을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그런 사람만 따랐던 것이다.


 알료샤같은 철부지가 그녀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의 통찰도 놀라웠다. 알료샤 자신은 스스로 움직이고 판단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는 아무런 의지도 신념도 없는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 그에게 있어 까쨔는 풍부한 내면을 갖춘 리더였을 것이다. 끌리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평생 저렇게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다.

 

p.411 나는 세 시간에 걸친 까쨔와의 대화로부터 다른 것들과 더불어, 그녀가 남자와 여자 관계의 모든 비밀을 하나도 알지 못할 정도로 아직 완전히 어린아이라는 어떤 이상한, 그러나 동시에 깊은 확신을 얻었다. 이것은 그녀가 여러 가지 판단과 여러 가지 매우 중요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띠었던 심각한 어조에 대단한 희극성을 부여하였다. 


 동시에 까쨔의 한계를 확인하는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똑똑하고 매력적이고 순수한 그녀지만, 인간사의 복잡미묘함과 질척임까지 알기에는 한낮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가 말하는 중요한 문제들도 딱 그 선에서 완결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아직 피안의 너머를 볼 수 없는 맹인이다. 작품 이후 그녀에게 닥쳐올 공작의 검은 손이 걱정됨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안 너머의 통찰력은 실제로 아프고 바닥에 떨어졌던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성배이기에.

 

 10

 

p.420 <일생에서 조역으로 만족할 줄 안다면, 그것은 이미 가장 위대한 인간의 승리일 것이다>


 공작과 술을 마시면서 그의 속내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는 에피소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명언을 내뱉는 공작. 재미있는 건 그는 자신이 말한 모든 명언과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실제로 저것을 행하는 사람은 화자인 바냐와 나따샤 뿐이라고 생각한다. 

 

 제4부

 

 1

 

 공작의 온갖 개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열로 쓰러진 넬리를 보살피는 에피소드다. 넬리의 상태가 걱정된다. 그리고 그 예감은 결국 이루어지고 만다...

 

 2


 한 번 크게 아팠던 이후 넬리가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내용이 이어진다. 사람들의 그런 친절과 배려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듯한 넬리지만, 한편으론 절대로 넬리가 그 삶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녀에겐 지금의 삶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 듯하다. 

 

 3


 감정적으로 기복을 보이던 넬리가 집을 떠나고 만다. 이유는 화자인 바냐 빼고는 다 알 것이다(?) 넬리는 바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어떤 식으로도 해방될 수 없음을 알고 도망친 것이다. 타인의 감정에는 예민하면서 자신을 향한 감정에는 둔한 바냐의 캐릭터성이 은연 중에 드러난다.

 

 4

 

p.481 그녀는 모욕을 당했고, 그녀의 상처는 아물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의로 이 비밀스러운 행동을 통해, 우리 모두에 대한 불신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자극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이 고통의 이기주의를 즐기는 듯했다. 이것은 고통의 자극이었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욕당하고 경멸당한 많은 사람들의, 운명에 이해 억눌리고 운명의 부당함을 인식한 뭇 사람들의 향락이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책의 제목이 걸맞는 이야기다. 아무리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줘도 결국 분노와 고통으로 돌아가버리는 넬리에 대해서, 화자는 그것을 '향락'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녀의 이런 대처는 결국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행위로 보이지만 모든 선택지가 배제되고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자 긍지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안타깝지만 어떤 점에서는 유효한 행위인 것이다. 

 

 5

 

p.494 그(알료샤)가 나따샤에게 달려가곤 했던 것은, 도대체 자기의 약한 마음으로는 고통을 이겨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따샤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안감을 견디지 못해 그녀에게 거짓 사랑을 끊임없이 고해야했던 알료샤의 비참한 모습이 표현되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약하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앞으로도 불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것이기에.

 

 6

 

p.514 나에게는 그녀가 일부러 자신의 상처를 파헤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욕구를, 절망하고 괴로워하고픈 욕구를 느끼면서 말이다....... 이런 일은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상처받은 나따샤, 그녀의 상처가 언젠가 치유되기를 바란다. 극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통을 직면하려는 나따샤의 태도가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용기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고통을 직면하지 못해 스스로에게 계속 거짓을 고하는 알료샤보다야.

 

 7

 

 나따샤의 일이 일단락되는 것과 동시에 넬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마치 그간의 모든 불행을 짊어지고 사라지려는 것처럼, 죽음의 문턱에 한발자국 다가선다. 그리고 넬리는 자신의 지난 삶을 이야기한다. 남자(공작)에게 빠져 할아버지를 빈털터리로 만들고 그 자신도 가난하게 살며 평생 할아버지에게 사죄해야했던 불쌍한 어머니의 삶을 말이다.

 

 8

 

p.555 「엄마가 지금 죽어가고 있으니 마차를 잡자고 할아버지를 재촉했어요. 그러나 할아버지에겐 7꼬뻬이까밖에 없었어요. 할아버지는 마차를 세워서 흥정해 보았지만, 마부들은 하나같이 비아냥거릴 뿐이었고, 아조르까조차 보고 웃어대는 것 같았어요. 아조르까도 우리와 함께 뛰었고, 우린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렸어요. 할아버지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내내 서둘러 달렸죠.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갑자기 넘어져 모자가 벗겨졌어요. 저는 할아버지를 일으켜 드리고 모자를 다시 씌워 드렸죠.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고 뛰었어요. 우리는 밤이 다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도착했어요....... 그러나 엄마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


 평생을 외면해온 딸이 죽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자 태도를 바꾸어 긴박하게 뛰기 시작하는 할아버지와 넬리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발췌했다. 이전까지의 냉담한 태도는 온데간데 없고 전심전력으로 뛰는 늙은이의 모습이라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에 드디어 니꼴라이 세르게이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이야기의 추체험이란 이렇게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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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0 「오, 신이여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에, 당신의 분노에도, 당신의 은총에도! 그리고 천둥이 지나고 지금 우리를 비추는 당신의 이 태양에도! 이 모든 순간에도 감사합니다! 오! 우리 비록 멸시당하고 모욕받았다 할지라도, 또다시 함께하게 되었도다! 오만하고 교만한, 우리를 멸시하고 모욕한 그자들, 어디 잔치를 벌일 테면 벌이라지! 그래, 맘껏 우리에게 돌을 던져보라지! 나따샤, 두려워 말거라....... 우리 손잡고 가자꾸나, 가서 내가 그놈들에게 말해 주마. 이 애는 귀하고 사랑스러운 내 딸이라고, 그리고 너희들이 모욕하고 멸시했던 죄 없는 내 딸을 난, 나는 사랑하고 있으며 영원히 축복할 거라고!」


 드디어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는 니꼴라이의 모습이다. 딸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온화해지는 그의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세상의 오만함과 거짓된 모든 것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용기를 보이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다. 마음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에 꼭 다시 읽고 싶은 문장이라 발췌했다.

 

에필로그 : 마지막 회상

 

p.571 (원고를 서둘러 쓴 게 아니냐는 말에) 「어쩔 도리가 없었소! 한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오. 그런 긴장된 작업을 할 때는 특히 온 신경이 바짝 흥분돼요. 그럴 때면 집중력은 더욱 강해지고, 느낌은 생생하고 더 깊어진다오. 거기에다 글도 마음먹은 대로 떠오르고, 그래서 긴장해서 작업할 때 더 좋은 것이 나오게 되오. 모든 게 다 잘되었지.......」


 바냐의 대사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작업 과정을 엿보는 듯해서 발췌했다. 실제로 마감에 쪼들려야 글이 나오긴 하니까(..) 그 상황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텐데, 여기선 오히려 좋은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서 신기했다.

 

p.585 우리는 그녀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엄마와 하인리히와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이제 그때의 추억들이 또렷하게 그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녀는 흥분해서 여행 중에 본 푸른 하늘, 눈과 얼음으로 덮인 산들, 산속 폭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호수와 계곡, 꽃과 나무들, 마을 주민들, 그리고 그들의 의복과 거무스름한 얼굴과 까만 눈동자에 관해서, 그리고 그 사람들과의 다양한 만남과 그들이 겪은 갖가지 불빛들로 장식되는 높고 둥근 지붕을 가진 교회, 그리고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있는 더운 남쪽 도시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죽기 직전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넬리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이 기억들이 행복하고 좋았으면 저렇게 상세하게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었을까 싶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도 이 아이의 삶에서 저렇게 추억할 만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에...

 

 틈새로 본 러시아의 세태와 모순

 

p.611 이 작품은 러시아 사회 생활과 문학이 한창 발달하던 시기에 씌어졌다. (중략) 그리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로 농노제가 지목되었다.

p.612 위에 인용한 것처럼 뻬쩨르부르그의 세태, 즉 하층민들의 괴로운 삶과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상층부의 모습, 이 해결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모순과 갈등을 그리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점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이 쓰여질 당시의 사회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공작과 니꼴라이의 관계는 농노제의 폐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기적인 공작의 모습과 그로 인해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의 문제점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p.616 이 작품은 문학적으로 높은 성과를 거둔 작품은 아니다. 작품에 너무나 많은 우연성이 존재하고 있고, 작품의 진행을 위해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요소들이 많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p.627 이 작품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몇몇 흥미로운 인물 유형을 창조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중략) 그들의 심리에는 모순적인 특징들이 결합되어 있다.

p.618 (발꼬프스끼 공작) 어쨌든 그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이후의 여러 작품에서 창조한 이론가의 첫 번째 형상이다.

p.619 넬리는 증오로 뭉친 존재이다. (중략) 그녀는 자신의 증오를 증폭시키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한다.


 이 작품이 갖는 의의 중에서도 인물 유형의 창조가 중요하다는 취지의 글이다. 발꼬프스끼 공작의 유형을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유의하면서 봐야겠고 넬리의 경우에는 그 악바침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상처받은 사람들』에 나타난 비극의 근원

 

p.623 (이 작품에서 다루는 중요한 두 가지 과제는) <교만에 대한 겸손의 우월성 보여주기>와 (중략) <여성의 사랑할 권리>이다.

p.625 이 점에서도 우리는 넬리의 인물 유형을 높이 평가한다. (중략) 우리는 넬리의 유형은 소설의 경계를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논문의 초점은 넬리의 인물 유형에 맞춰진다. 넬리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부정성과 복잡성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좋을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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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32 넬리는 <생각하는 아이>, 특히 네또츠까 네즈바노바가 발전된 전형이다.

p.632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들』이 앞서 언급했던 도스또예프스끼의 모든 작품들과 엄격히 구분되는 이유는, 작가의 원숙한 소설들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인 비극의 근원이 이 작품 속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이 비극의 근원을 지닌 인물이 넬리이다.


p.632 네또츠까와 넬리 사이에는 지나칠 수 없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중략) 네또츠까의 유형은 삶을 지향하고 있다. 넬리의 유형에는 비극적 운명의 흔적이 드리워져 있다. 그녀의 유형은 죽음을 지향하고 있다.

p.633 시베리아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유토피아적 환상과 아울러 박애주의자들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버렸다.

p.635 즉 부르주아 시대의 대도시는 넬리의 정신적인 아버지로서 그녀의 절망과 증오를 내포하고 있다.

p.636 그래서 스스로 약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이행할, 즉 증오할 힘을 잃지 않기 위해 넬리는 행복을 포기했다. (중략) 증오할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멸시와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어 내야 하며 항상 가난해야 한다.


 <네또츠카 네즈바노바>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사회상에 대한 의식이 넬리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는 해설이다. 과거엔 박애주의의 가치를 지향하던 도스또예프스끼였지만 부르주아 사회에 이르러 그것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저자의 절망감과 저항 의식이 넬리에게 거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 분노하는 것은 저항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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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51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가장 큰 공로는 이 새로운 숙명이 그 당시의 세계 위에 군림했다는 것에 대해 놀랄 만한 힘을 기울여 묘사하고 나서, 삶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화해의 어려움을 찬양했다는 데 있다.

p.653 고독한 어린아이의 마음속 깊숙이 스며든 세계악은 무엇보다도 먼저 넬리 자신을 파괴한다. (중략)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는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이 반란의 영웅적 정신을 찬양하고 있으며, 그의 생각은 항상 운명에 대한 인간의 영원한 불복종에 동요하고 있다.

 

 그 방법이 파괴적인 것일지언정, 불합리한 운명과 사회에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 낫다. 적어도 그것이 더 우월한 가치를 가지진 않을지언정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작가의 반골 기질이 드러나는 작품이며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 넬리라는 인물임을 해설하는 논문이다. 저항의 측면에서 이 책을 다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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