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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022. 백치

by 쿠데 2020. 7. 17.

백치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015 / 016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시작

 

 <죄와 벌>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읽는 도스또예프스끼의 5대 장편 작품이다. 9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 조금 두렵긴 하지만 그 명성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겁없이 도전해볼 예정이다. 이번에도 3주에 걸친 여정이 될 것 같다. 

 

 지금까지 도스또예프스끼가 다뤄온 인간 군상 중 가장 의미심장한 유형은 역시 '바보'다. 악의든 선의든 일상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기행을 일삼으며 세상의 완전무결한 논리에 흠집을 내는 인물들이다. 지금까지는 주조연으로 얼굴을 비쳤던 그들을 아예 제목에 내세웠다. 과연 <백치>는 어떤 작품이며, 이 작품으로는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하다.

 

 그럼 그 유명한 미쉬낀 공작을 만나보러 가자.

 

 감상

 

 가장 눈여겨 보고 싶은 점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이 '백치'라는 인간 유형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자본주의와 욕망의 이치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안티 테제로 다룰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인 미쉬낀의 첫 인상은 조금 특이하다. 그는 자신이 백치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백치이다. 그런 그를 중심으로 욕망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등장한다. 이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백치라는 화소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가 개인적인 관전 포인트였다.

 

 그럼 이 작품의 표제인 '백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알아보자.

 

 백치란 무엇인가

 

 사전(출처:네이버)에서는 백치를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실제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미쉬낀은 간질을 앓고 있는 환자다. 하지만 표제의 '백치'는 간질병 환자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백치란 욕망의 백치를 의미한다. 미쉬낀은 사적인 욕망이랄 것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 욕망에 들끓는 사람들의 대립항으로서 존재한다.

 

 욕망, 분노, 울분을 연료로 움직이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움직인다. 스스로 호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 감화된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의 장군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줏대없이 살다가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뻔 했던 장군과 달리 미쉬낀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안다는 것이다.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점에서 그는 장군에 비해 훨씬 성숙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p.141

「예전에 나는 정말로 건강이 안 좋아 거의 백치에 가까웠던 때가 있었지요.

그러나 오래전에 건강을 되찾아 지금은 정상이에요.

그런데도 면전에서 나를 백치라고 부르니까 기분이 좀 언짢군요.

 

당신이 시도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랬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당신은 화를 내면서 벌써 두 번씩이나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어요.

나는 그런 걸 원치 않아요. 특히 당신처럼 초면일 때는 더욱 그렇지요.

 

우린, 지금 사거리에 와 있으니 여기서 헤어지는 편이 낫겠군요.

당신은 집을 향해 오른쪽으로 가세요, 나는 왼쪽으로 갈 테니.

내게 25루블이 있으니 난 여관 방을 하나 얻을 수 있을 거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그 대가로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동시에 무례한 행동은 지적할 줄도 안다. 순수하지만 마냥 호락호락하진 않다. 그의 순수는 무지가 아닌 유지(有知)에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알료샤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 명확하다. 알료샤 또한 순수하고 솔직한 인물이지만, 그의 순수는 현실로부터 괴리된 낭만의 우물에서 끌어올린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순진함은 결국 유린당하고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슬로 변모한다. 하지만 공작의 순수는 비극에서 길어올린 것이기에 단단하다. 그의 순수함은 깨끗한 우물에서 퍼올린 청정수가 아니라 흙탕물을 정화한 증류수다.

 

 그리고 공작이 갖춘 이 순수함이야말로 도스또예프스끼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이상적인 인간의 자질이 아닌가 싶다. 시궁창이나 다를 바 없는 러시아 사회 속에서 고결한 마음을 간직하고자 노력하는 모습말이다. 정리하자면 이 작품에서 말하는 백치란 '욕망이라는 흙탕물에서 살아남은 순수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미쉬낀의 조형은 지금까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나온 다른 주인공들에 비하면 매우 독자적인 위상을 가진다. 기존의 주인공들이 왜곡된 인격을 통해 세계의 참혹상을 고발하는 존재였다면, 미쉬낀은 참혹한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성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알아봐야 할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 미쉬낀 같은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둘, 미쉬낀 같은 존재가 정말 유익한가?
 셋, 미쉬낀의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후의 글은 각각을 백치의 구성 방식 / 백치의 유익성 / 백치의 실패가 갖는 의미로 나누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백치란 앞서 설명한 '욕망의 백치'를 의미한다.

 

 백치의 구성 방식

 

 욕망의 백치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전에 욕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넓은 의미에서 욕망은 인간을 움직이는 삶의 원동력이다. 인간은 모두 크든 작든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미쉬낀 또한 마찬가지이다.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무균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욕망과 생명은 분리할 수 없는 샴쌍둥이다.

 

 그러나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 비범한 존재를 꿈꾸게 되는 순간 욕망은 얼굴을 달리한다. 이전까지는 얌전히 뒤따라오던 욕망이 갑자기 고삐를 쥐고 채찍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권력을 손에 넣은 욕망은 본능마저 제압한다. 사랑받고 싶어도 사랑을 거부하던 나스따시야처럼,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척하던 아글라야처럼 본능을 거부하고 욕망의 노예가 된다.

 

 이 기이한 현상은 욕망이 인간의 자존심과 아주 쉽게 결탁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다. 여기서 자존심이란 단순한 옹고집이 아닌 사회적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신적 기재를 의미한다. (자세한 내용은 <죄와 벌> 리뷰를 참고)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타인의 동의 하에 성립된다. 타인의 몸에서 태어나, 타인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마침내 타인을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타인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이고 언제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난수이기도 하다. 자존심은 그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신적인 보호막이다.

 

 가령 고백을 했다가 차였다고 해보자. 자아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으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때 고개를 드는 것이 자존심이다. '감히 너 따위가! 나도 너 필요없어!'라고 외치며 쑥 들어오는 창을 쳐낸다. 이렇듯 자존심은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타인에게 휘둘리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 자존심이라면, 욕망은 타인을 휘두르고자 하는 의지다. 상처 입은 자존심이 타인을 휘두르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질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의 포마 포미치는 이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결국 인간은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욕망의 노예가 된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욕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타인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고 무참하게 쓰러졌던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성적으로 유린당했던 나스따시야도, 보수적인 가족 속에서 억압 당하며 살아온 아글라야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미쉬낀은 어떠한가? 그는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은 적이 없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일까? <상처받은 사람들>의 알료샤라면 모를까 미쉬낀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른 간질 발작으로 그는 귀한 청춘을 병원에서 보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면박을 받으며 살아왔다. 심지어 작품 속에서도 숱한 모욕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순간마다 자신을 지킨다. 무엇이 미쉬낀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일까?

 

 앞서 말한 고백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위에서는 화를 내는 케이스만을 얘기했지만 사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체념하는 사람도 있고 '왜 나는 안 되느냐'면서 상황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그래, 난 역시 자격이 없어'라며 자학하는 경우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쪽이든 일정 부분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행위라는 것이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분노든 체념이든 부정이든 자학이든, 본질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반응이다.

 

 즉,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며 우리는 그것을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자존심의 복구가 반드시 욕망의 추구와 결부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미쉬낀은 욕망에 의탁하기보다 그 이면의 본질을 보는 방식을 선택한다. 타인의 공격에 집중하는 대신 그 너머에 있는 타인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모두가 나스따시야를 미친년이라고 할 때, 공작은 그녀의 안에서 상처받아 울부짖고 있는 아이를 본다. 그는 나스따시야의 본질을 알기에 그녀가 아무리 화를 내고 울부짖어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 모든 발길질은 표현에 불과할 뿐이며 실제 그녀의 본질은 나약한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의 발길질에 진심으로 상처를 받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바로 그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타인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힘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 그것이 그를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이어져 온 테마는 미쉬낀을 통해 이렇게 구현된다.

 

 백치의 유익성

 

 하지만 과연 이런 존재가 정말 유익한 걸까?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인내할 줄 아는' 이라는 수식어는 얼핏 듣기에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아름다운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작품에서 미쉬낀은 내내 고생만 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조금씩 감화가 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변화하지는 못한다. 작품의 결말까지 함께 생각해보면 미쉬낀은 그저 개고생을 하다 간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쉬낀 같은 존재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결말에 대한 것은 잠시 접어두고 작품 속에 드러났던 미쉬낀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자.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크게 미쉬낀과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나뉜다. 작중 인물들은 모두 크든 작든 저마다의 이득을 위해 미쉬낀을 이용하려고 한다. 실제로 그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안 줘도 될 돈을 주기도 하고 약혼했다가 파혼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미쉬낀은 타의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그 모든 굴욕을 선택하고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후회와 원망으로 점철된 사람들과 달리 그는 후회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는다.

 

 반면 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굴욕에는 적극적으로 불쾌감을 표현한다. 특히나 타인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번 주저없이 반박을 한다.

 

p.490

「그 얘길 들으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그 애가 정말로 당신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그 애는 당신을 <병신>이니 <백치>니 하고 부르기까지 했는데.」

「그런 말씀은 저에게 옮기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공작이 힐난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희생할 줄 안다. 이런 결단은 그에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존재인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정의를 '통제할 수 없는 인력'이라고 규정한다면 사실상 그 정의에 가장 부합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결국 미쉬낀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바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삶으로 귀결된다. 니힐리즘의 본질이 타의에 휘둘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삶이야말로 니힐리즘의 근본적인 대처 방법이다. 그러지 못해 파국으로 치닫는 대표적인 인물이 나스따시야다.

 

 나스따시야는 미쉬낀과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아는 미쉬낀과 달리 그녀는 자기 자신은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 미쉬낀을 사랑하지만 그에게 사랑받는 것이 두려워 도망치고, 그와 결혼하기 직전의 상황이 되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로고진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타인을 견디지 못하는 그녀는 자기 자신 또한 견디지 못한다. 결론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뿐이다.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해 파국에 이르는 것은 아글라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미쉬낀에 대한 사랑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저울질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도망친다. 도망친 곳에서도 그녀는 타의에 휘둘리는 삶을 살게 된다. 나스따시야에게 휘둘리다 살인자가 된 로고진이나 마지막 순간까지 니힐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뽈리뜨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파국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을 지키려 애쓴 것은 오로지 미쉬낀뿐이다.

 

 말하자면 미쉬낀의 삶은 자유를 향한 삶이다. 여기서 자유를 달콤한 의미로 오역하면 안 된다. 자유는 책임과 고통이 따르는 또 다른 족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유를 추구해야하는 이유는 스스로 족쇄를 짊어진 자만이 타의에 모든 것을 내맡긴 니힐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니힐리즘의 결말은 언제나 억울한 파멸이다. 자신이 왜 고통받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비참하게 눈을 감게 된다. 허무의 늪에서 자신을 건져내려는 끊임없는 시도, 그것이 바로 자유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유의 동력원이 타인과 자신을 향한 사랑임을 미쉬낀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백치의 실패가 갖는 의의

 

 하지만 미쉬낀은 결국 실패한다. 그는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 채 무지의 세계로 영영 떠나버린다. 미쉬낀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진 거라면 이 결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쉬낀 정도의 인간조차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새까만 세계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 작품 역시 허무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한 번 생각해보자. 만약 이 작품이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미쉬낀의 노력으로 나스따시야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아글라야가 솔직해지고, 모두가 행복을 되찾게 되었다면? 미쉬낀은 영웅으로 거듭나고 러시아는 행복을 되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작품 안에서 모든 것이 봉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책 속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이야기도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덮은 이후에도 우린 살아가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허무주의와 투쟁하면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있어서 이야기와 현실은 분리할 수 없는 또 다른 샴쌍둥이였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를 기분좋게 봉합하는 대신 작품의 결말을 불합리한 현실과 결부시켜 사람들이 직접 미쉬낀의 존재 가치를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이런 비참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미쉬낀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누군가는 미쉬낀 같은 사람이 존재해선 안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미쉬낀 같은 사람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미쉬낀의 결말을 통해, 우리가 이 문제를 현실과 결부시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미쉬낀이라는 백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감화시켰습니다. 모두 행복해졌습니다.

 

 라고 답을 내려 이야기를 봉합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미쉬낀이라는 백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결국 누구도 감화시키지 못하고 파멸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리고 이것은 옳은 일일까요?

 

 라고 물으며 독자가 각자 처한 현실에 따라 답을 찾게끔 만드는 것이다.

 

 사실 미쉬낀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수백가지의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리뷰에서는 미쉬낀을 긍정적인 인물로서 해석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식으로 화두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미쉬낀의 실패는 우리 스스로 니힐리즘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백치란, 욕망에 휘말리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힘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타자의 표면이 아닌 본질을 들여다보는 힘을 단련할 때에 우리는 (타인을 휘두르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니힐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백치의 삶이 정말 유익한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백치의 삶이 언제나 좋은 쪽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쉬낀의 삶을 추구하고 싶다. 고통스럽고 모욕스러운 삶일지라도, 니힐리즘에 이끌려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면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모욕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가장 비참한 삶은 고통스러운 삶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일 테니까.

 

  문장

「(전략) 어떤 형식이든 간에 자네의 씨앗을 뿌리고, 자네의 <자선과 선행>을 베푼다는 것은 자네 개성의 일부를 타인에게 내주는 동시에 타인 개성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걸세. 자네는 상호 교류를 하고 있는 거라네. 타인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 준다면 자네에게 가는 보상은 가장 예기치 않았던 발견이 될 걸세.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네. 결국 반드시 자네는 과학을 바라보듯이 자네의 행위를 바라보게 될 걸세. 그것은 자네의 모든 삶을 휘어잡아 삶 전체를 가득 채울 수 있게 되는 거지. (중략) 만약 이러한 작업으로 보낸 평생의 삶과 지식 덕분에 마침내 자네가 엄청난 씨앗을 던져, 이 세상에 거대한 사상을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는 상태에 있다면.......」
p.622

 미쉬낀이 보여준 인간성과 그것이 이 세계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엮어서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서 발췌했다. 자선과 선행을 베푸는 것은 나의 씨앗을 상대방에서 주고 그로부터 새로운 씨앗을 받는 것이다. 설령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나의 씨앗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이 세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나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고 '과학을 바라보듯이' 나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논리다. 이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싶다.

 

더보기

 백치

 

 제1부

 

 1

 

 초장부터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주인공인 '미쉬낀' 공작이다. 유약하고 빈곤해 보이는 이 남성이 유명한 미쉬낀 가문의 사람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초반에 등장하는 이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에 엮일지 지켜보겠다.


 2

 

p.41 「(전략) 그런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한 고통은 아마 육체적인 상처에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은, 아마 당신도 아실 테지만, 한 시간 후에, 그 다음엔 10분 후에, 30초 후에, 그리고 지금 당장, 영혼이 육체에서 날아가 버리고 자기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모두 <분명>하다는 게 있어요. 가장 끔찍한 건 바로 그 확실성입니다. (후략)」


  사형 선고, 또는 고문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절망적인 심리를 묘사한다. 이런 일을 직접 당한 도스또예프스끼이기에 더 선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3

 

 장군을 찾아가서 도움을 구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경멸만 당하는 미쉬낀. 하지만 미쉬낀의 선량한 모습에 장군도 흔들린다. 자신이 무지하고 힘없는 백치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되레 꿀리는 것이 없는 미쉬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4

 

p.82 게다가 열정의 노예가 된 인간은 아무리 나이가 들었더라도 완전히 눈이 멀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도 희망을 품는 법이다. 그뿐이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이성을 잃으면 어리석은 아이처럼 유치하게 행동하게 마련이다.


 
나스따시야를 둘러싼 또츠끼와 장군의 복잡한 사정, 그리고 그 사건에 미쉬낀이 얽히게 될 것을 예고하는 장이다. 열정이 사람을 어떻게 미치게 하는지, 인간의 이성이라는 게 얼마나 사소한 것으로 무너지는지 보여주는 구절인 동시에 '백치'라는 작품의 제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문장이라 발췌했다.

 

 5

 

p.97 「(전략) 그에게 목숨이 붙어 있을 시간은 5분 정도밖에 없었던 거지요. 이 5분이 그에게 있어서는 무한대의 시간이고 엄청난 재산처럼 여겨졌다고 그는 술회했어요. 그는 이 5분 동안 많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후략)」

p.97 「(전략) 나는 지금 존재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3분 후면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변할 것이다. 그 존재가 생명체인지 비생명체인지는 모른다. 생명체라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될까? 그리고 어디에서 살게 될까? 그는 이 모든 것을 2분 동안에 다 생각해 보려 했던 것입니다! (중략) <저 빛이야말로 나의 새로운 자연이다. 3분 후에 나는 저 빛과 융합될 것이다> (후략)」


  그 유명한 사형날의 이야기다. 사형 직전, 어떤 생각을 했고 무엇을 느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치 내가 사형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에 놓인 것 같다.

 

p.98 「(전략) 그렇지만 이 순간 그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만약에 이대로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생명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이 영원이 아닐까! 그럼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다! 그때 나는 매 순간을 1세기로 연장시켜 아무것도 잃지 않고, 1분 1초라도 정확히 계산해 두어 결코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라!> 결국 그의 이러한 상념은 독한 마음으로 변하여, 차라리 한순간이라도 빨리 총살을 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생겨났다고 술회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가장 후회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 삶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라니,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진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보내고 있는 1초의 시간조차 누군가에겐 한 세기의 값을 지니는 것임을. 그리고 그런 희망이 너무 간절하고 지독해서 차라리 빨리 죽고 싶었다던 문장에 숨이 막힌다. 얼마나 고독한 상황이었을까.

 

p.103 <사형까지는 오래 걸릴 것이다. 아직도 거리를 세 군데나 지나가야 된다. 그동안 난 살아 있다. 이 거리를 지나가면 다음 거리가 또 남아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 빵 가게가 있는 거리가 또 하나 있다....... 그 빵 가게까지 가려면 아직도 얼마간 더 가야 한다!>

p.103 <수많은 저 군중 중에서 아무도 처형 당하는 이가 없고, 나만 홀로 처형을 당하는 구나!>

p.104 「(전략) 그는 탐욕스럽게 십자가에 키스를 해댔습니다. 그는 비상 시를 위해 무언가를 움켜 잡아 비축해 놓듯이 성급하게 키스를 했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순간에 종교적인 감화를 받은 것 같지는 않았어요.(후략)」

p.105 <저 사람이 날 쳐다보고 있구나. 그런데 이마에 사마귀가 붙어 있군. 여기 이 형리의 아랫단추가 녹이 슬어 있는데......>


  조금이라도 삶을 움켜쥐어보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인생은 지루할 틈이 없다. 그것을 죽음 직전에 깨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6

 

p.121 <사람들은 나를 백치로 여기고 있지만 나는 현명한 인간이다. 저들이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다.......>


  실로 그러하다. 읽다 보니 미쉬낀이 백치인 게 아니라 미쉬낀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백치인 것 같다.

 

 7

 

p.135 「<모든 걸 끝내버리세요>라는 말이 나한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절대로 나를 구속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중략) 그가 내 말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자기 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으면, 정말 나에게 완전히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걸 끝내 버린다면, 난 그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어쩌면 그의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중략) 그는 남을 신뢰할 만한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는 10만 루블 대신에 나에 대한 희망을 확인해 두길 원하는 거예요. (후략)」


  결혼을 앞두고 아글리야의 사랑을 확인받기 위해, 정확히는 아글리야가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정사로 만들기 위해 비열한 편지를 쓴 가냐에 대한 아글리야의 평가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서 또 발췌했다.

 

p.141 「예전에 나는 정말로 건강이 안 좋아 거의 백치에 가까웠던 때가 있었지요. 그러나 오래전에 건강을 되찾아 지금은 정상이에요. 그런데도 면전에서 나를 백치라고 부르니까 기분이 좀 언짢군요. 당신이 시도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랬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당신은 화를 내면서 벌써 두 번씩이나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어요. 나는 그런 걸 원치 않아요. 특히 당신처럼 초면일 때는 더욱 그렇지요. 우린, 지금 사거리에 와 있으니 여기서 헤어지는 편이 낫겠군요. 당신은 집을 향해 오른쪽으로 가세요, 나는 왼쪽으로 갈 테니. 내게 25루블이 있으니 난 여관 방을 하나 얻을 수 있을 거요.」


 미쉬낀이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문단이다. 동시에 도스또예프스끼가 그동안 추구해온 이상적인 인간상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는 타인을 동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변호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이 부분을 기점으로 미쉬낀에 대한 흥미가 더욱 깊어졌다.

 

 8

 

p.160 가냐의 목소리에는 울화가 배어 있었다. 그것은 정도가 너무 심하여 그것을 즐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의 울화였다. 거기에는 아무런 구속도 없이 무한으로 뻗어 가는 돌아올 수 없는 쾌락마저 느껴졌다.

 

자기 분노에 자기가 매료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9

 

 돈 때문에 나스따시야와 결혼하려고 하는 가브릴라와, 그런 가브릴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나스따시야는 자존심 때문에 고군분투하는 가브릴라와 그 가족의 상황을 즐기고 가브릴라가 비열한 짓을 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역시나 정상인 사람은 미쉬낀뿐인 게 아닌가.

 

 10

 

 갑자기 로고진과 레베제프가 나타난다. 작품 초반에 열차에서 만났던 그들이다. 로고진을 가브릴라에 대한 억하 심정을 토로하며 자신이 나스따시야를 사겠다며 나선다. 그 와중에 참다 못한 가브릴라의 동생이 나서고, 나스따시야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던 가브릴라는 동생을 때리려고 든다. 그것을 미쉬낀이 막아서면서 잠시 상황이 중단된다.

 

 11

 

p.194 원래 비열한 인간들이 정직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가브릴라는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며 미쉬낀에서 진심(처럼 보이는 것)을 고백한다. 나스따시야는 자신이 자기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줄 알지만, 사실 자신은 나스따시야의 돈을 위해서 결혼하려 한다는 것이다. 미쉬낀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스따시야가 결혼을 하지 않게 막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스따시야가 퍽 마음에 든 것이다.

 

 12

 

 가브릴라의 아버지를 따라서 나스따시야를 만나러 가려고 하지만, 그는 술에 진탕 취해 전혀 다른 곳으로 그를 끌고갈 뿐이다. 다행히 니꼴라이를 만나 나스따시야가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13

 

p.213 그는 사치에 빠져 들기가 얼마나 쉬운가 하는 것과, 사치에 조금씩 맛들이다 보면 그것이 삶의 필수적 요인이 되어 거기서 헤어나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이 낡은 사고 방식에 안주하여, 자신의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육체가 정신에 미치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철저하게 존중하여 왔다. 나스따시야는 사치가 가져다 주는 것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치를 즐겼다. 그러나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도무지 사치에 굴복 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언제라도 사치스런 생활을 헌신짝 버리듯 떨쳐 버릴 자세가 되어 있었다.

 

 또쯔끼가 어째서 나스따시야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는가에 대한 단서이다. 실제론 사치스런 생활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기 보다 또쯔끼가 자신을 내버리지 못하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지만,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만큼 매력적이고 단단한 존재도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나스따시야가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14

 

 페르디쉬첸꼬의 제안으로 각자 자신의 삶에서 저지른 가장 나쁜 짓을 얘기하기로 한다. 나스따시야는 이 틈을 타서 결혼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데, 흥정의 대상이 되어버린 자신의 삶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있을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15

 

 로고진이 10만 루블을 가져와 나스따시야를 사려고 하고, 그 와중에 공작은 나스따시야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설마 공작이 나스따시야에게 청혼할 줄이야! 이런 점에서는 백치가 맞는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성적인 사랑이라기보다 인간으로서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스따시야의 내면을 꿰뚫어보고 그 외로움을 사랑하게 된 게 아닌가해서 말이다.

 

 16

 

 충격적이고 광기어린 전개가 이어진다. 나스따시야는 공작의 인간성에 놀라면서도, (아마도) 예정대로 로고진을 따라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10만 루블을 불태우며 자신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 가지고 놀았던 가브릴라를 모욕한다. 이 부분의 광기는 그야말로 종이를 찢고 나오는 수준인데 불타는 돈을 보며 자기가 가브릴라 대신 타죽겠다는 사람이 속출하는 것은 물론 끝내 자존심을 지키려다 기절하는 가브릴라까지. 그리고 나스따시야가 자신의 것이 된 것에 눈이 먼 로고진마저 돈에 미친 한 무리의 짐승들을 보는 듯하다. 정말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제2부

 

 1

 

 나스따시야가 로고진과 함께 떠나고, 미쉬낀이 유산 상속을 받으러 떠난 후 모스크바는 어떻게 되었는가? 예상대로 나스따시야와 로고진은 여전히 지독한 밀당 중인 모양이고 미쉬낀은 그런 나스따시야를 걱정하면서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다. 이 지독한 관계는 언제쯤...

 

 2

 

 모스크바로 돌아와 레베제프와 만나는 미쉬낀. 그는 나스따시야가 있는 곳을 알고 싶어한다. 레베제프의 이야기는 묘하게 집중이 안 되서 좀 빠르게 읽었다. 이 이야기와 무슨 관계인지.

 

 3

 

p.331 「자네가 왜 나에게 양보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주 식어버린 건가? (후략)」

p.331 「자네의 사랑은 증오와 분간이 안 되네.」

 

 미쉬낀의 사랑과 로고진의 사랑이 대비된다. 나스따시야를 가지고 싶고 미워하는 로고진과 달리, 미쉬낀은 나스따시야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접어두고자 한다. 욕망의 백치에게 사랑이란 소유가 아닌 조화다.

 

 4

 

p.344 「(전략) 종교적 감정의 본질은 그 어떤 이성적 논리로도 접근할 수 없어, (중략)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가장 선명하게 러시아 인의 가슴속에서 가장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야. 그것이 바로 나의 결론이라네! (후략)」

 

 작가의 종교관을 대변하는 듯한 미쉬낀의 대사. 여기서 종교적 감정이란 단지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5

 

p.350 (간질병 발작 직전의 증후) 그 단계에 들어서면 우수와 정신적 암흑과 억압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그의 뇌는 불꽃을 튀기고 모든 활력은 폭발적으로 긴장한다. 삶의 감각과 자의식은 번개처럼 이어지는 매순간 거의 10배로 증가되었다. 그의 모든 감정, 의심, 걱정은 지극한 평온함으로 바뀜과 동시에 빛을 발하는 기쁨, 조화, 희망이 되고, 그의 이성은 결정적인 원인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 순간들, 이 광채들은 발작 바로 전에 오는 결정적 1초를 예고할 뿐이다.

p.364 (간질병 발작) 이 순간에는 갑자기 얼굴, 특히 시선이 유난히 일그러진다. 전신과 모든 안면 근육은 경련을 일으킨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상상 불가능한 무서운 비명이, 인간적인 모든 것을 일순간에 토해 버리려는 듯 한꺼번에 가슴속에서 터져 나온다. 그래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조차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의 비명이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이 사람의 내부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간질병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언가 신비스러운 듯한, 지독한 공포감을 일으킨다고 한다.

 

 간질병 묘사에 대한 부분이다. 저자가 간질병으로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생생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간질병에 걸린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감정이 자이로드롭을 타는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가 밑바닥으로 치닫는 듯하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p.358 <(전략) 그가 모든 진실을 알아내고 상처받은 그 반 미치광이 여인이 무척이나 가련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게 될 때, 그는 지금까지 그녀로 인해 고통받았던 모든 것을 용서해 주지 않을까? (중략) 연민은 로고진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와 교훈을 줄 것이다. 연민이야말로 모든 인간 존재에게 가장 중요한 유일한 법칙이다.>

 

 나스따시야에 대한 집착과 분노로 괴로워하는 로고진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연민이라는 것을 미쉬낀은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연민이 그리 쉬운가.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일 것이다. 로고진이 어떻게 변화할지도 지켜봐야겠다.

 

 6

 

p.379 이볼긴은, 만성적으로 술에 취해 있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매우 감수성이 강했고, 극도로 타락한 술꾼들이 그렇듯이 행복했던 과거의 추억을 쉽게 추슬러 내지 못했다.

 

 술 취한 사람의 특성만은 아닌 것 같다.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늘 불안에 가득차 있는 사람 또한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가.

 

p.384 「어찌 되었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의 숙녀가 누구이든 또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이 <가난한 기사>는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또한 그 기사는 자기가 그녀를 택했다는 것과 그녀의 <순결한 아름다움>을 믿어 영우너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에 만족한다는 거지요. 또 하나 괜찮은 것은 그녀가 도둑년이라 하더라도 그 기사는 그녀를 믿으며 그녀의 순결한 미를 위해 창을 깎는다는 겁니다.(후략)」

 

 마치 미쉬낀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한 <가난한 기사>의 비유다. 혹시 아글라야도 공작을 사랑하는 걸까? 갑자기 양상이 복잡해진다.

 

 7

 

 갑자기 <빠블리쉬체프의 아들>이라는 부르도프스끼가 친구들을 몰고 나타난다. 공작에게 뭔가 따질 것이 있는 것처럼 험악한 인상인데... 공작이 누군가에게 원망을 살만한 사람이었던가? 아니, 오히려 공작 같은 사람이 원망을 사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8

 

p.426 <적절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내일 단둘이 있는 데서 그런 제안을 했어야 했는데.>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 나는 백치다! 진짜 백치다!>

 

 얼토당토않은 부르도프스끼 일행의 모함에 차분히 대처해놓고서도 그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미쉬낀. 이쯤되면 정말 백치인 것 같긴 하다. 그래도 할말은 다 한다는 점에서 미쉬낀이 좋다.

 

 9

 

 공작이 모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리자베따와 그런 상황을 즐기는 이뽈리뜨의 모습이 이어진다. 리자베따는 공작을 걱정하는 걸까? 아직 이들의 감춰진 욕망이 뭔지 잘 모르겠다.

 

 10

 

 욕망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는 가운데, 나스따시야가 나타나 공작에게 선전 포고를 하고 사라진다. 줄곧 공작을 피하더니 이제와서 다시 공작 앞에 나타난 이유가 뭘까? 정말이지 나스따시야는 자본의 팜므파탈 같은 존재다.

 

 11

 

 나스따시야의 등장으로 패닉이 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공작을 찾아와 그녀와의 관계를 묻기 시작한다. 결혼을 이미 한 건지, 아니면 할 건지. 나스따시야에게 공작의 재산이 들어가는 건 이들이 가장 원하지 않는 루트일 테니 경계하는 게 당연하지만서도...

 

 12

 

 리자베따 역시 나스따시야와 공작의 관계를 물으려고 온다. 그녀의 속내를 알기가 참 어려운데, 자신의 딸인 아글라야와 공작을 결혼시키고 싶지만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자 공작의 접근을 아예 막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글라야가 공작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아직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서 그를 저택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인지... 어렵다!

 

 

 제3부

 

 1

 

p.503 이처럼 러시아 인은 거의 아무런 노력 없이 사무적이고 실무적인 사람이라는 명칭을 얻곤 했다. 실질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장군이 될 수 없는 인물은 오로지 독창성이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일을 그냥 넘기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선망받는 직업인 장군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독창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 인상적이라 발췌했다. 당연시되는 것들을 짚고 넘어가는 그것이 독창성이다.
 

p.515 (로모노소프, 뿌쉬낀, 고골) 「(전략) 오로지 이 세 명의 작가만이 정말로 자기만의 것을, 그 누구에게서도 차용해 오지 않는 무언가 자기 것을 말해 주는 데 성공했지요. 때문에 바로 국민적인 작가가 된 것이오. (후략)」

 

 자기만의 것을 찾고 말하는 것이 예술가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구절이라서 발췌했다. 예술은 사적인 영역에서 태어나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간다.

 

 

p.517 「(전략) 내가 말하는 자유주의자는 러시아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어요. (중략) 자유주의자는 민족의 관습과 러시아의 역사를 증오합니다. (중략)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을 가장 유익한 자유주의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것은 러시아 자유주의자는 아직까지 진정한 러시아적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풀이로 설명할 수 있어요. 내가 보기엔 그 이상으로 해석할 여지가 전혀 없어요.」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자유주의는 기존 질서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것을 짚고, 현재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이 보이는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p.518 공작에게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의 흥미를 끄는 말을 할 때 그 말을 경청하는 그의 태도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질문을 해올 때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려는 그의 태도가 유난히 순진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공작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진솔하다. 쉽게 얻을 수 없는 능력이며, 어쩌면 이런 것은 기질적으로밖에 타고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2

 

 예빤친 가족과 산책을 하러 나갔다가 나스따시야의 시비와 행패를 다시 한 번 마주치는 공작. 가장 복잡한 사람은 공작일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3

 

 아글라야에게 따로 만나자는 편지를 받고, 뒤이어 나타난 로고진이 나스따시야의 소식을 전달한다. 나스따시야는 공작이 아글라야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공작과 아글라야의 결혼을 추진하려고 한다. 공작이 완전히 자기 눈앞에서 사라져야 자신도 미련없이 로고진과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인지?

 

 4

 

 공작의 생일 파티가 열린다. 레베제프가 현재 사회, 특히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쇠락해가는 인류에 대한 논설을 펼치는 장면이 이어진다. 흥미로운 논쟁이지만 이 작품과 얼마나 관계가 있을지 생각해보면, 흠...

 

 5

 

p.605 왜 그는 로스차일드가 되지 못하는가? 그가 로스차일드 같은 백만장자가 되지 못하고, 그가 사육제의 무대만큼 높이 쌓아 올린 임페리얼 금화와 나폴레옹 금화를 갖지 못하는 것은 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그가 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그의 수중에 들어올 텐데! 그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

p.606 나는 문법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문장론까지 진도가 나갈 때면 나는 죽고 말 것이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죽음을 앞둔 이뽈리뜨의 절절한 낭독의 한 구절이다. 오늘내일 하는 그에게 있어서 미래란 모든 가능성의 표상이다. 특히나 문법책의 비유는 아프게 와닿아서 바로 발췌했다.

 

 

p.606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두들 확신하리라고 믿지만, 콜럼버스가 행복을 느꼈던 것은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발견하려고 시도했을 때였다.

 

 행복이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시도의 산물이다. 그것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 아무것도 이룰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은 그에겐 행복 또한 사치품이다.

 

 6

 

p.609 겸손은 가장 무서운 힘이라는 말이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공작에게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공작이 한 말이기 때문이다.

 

 겸손에 대해서 공작에게 묻는 것이 재미있다. 실제로 공작은 겸손하면서도 단단한 인물이지. 겸손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겸손한 사람만이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성장할 수 있기에.

 

p.621 「(전략) 개별적 선은 그것이 개성의 요구이자, 하나의 개성이 다른 한 개성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요구이기 때문에 영원히 남아 있게 마련이지. (후략)」

p.622
「(전략) 어떤 형식이든 간에 자네의 씨앗을 뿌리고, 자네의 <자선과 선행>을 베푼다는 것은 자네 개성의 일부를 타인에게 내주는 동시에 타인 개성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걸세. 자네는 상호 교류를 하고 있는 거라네. 타인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 준다면 자네에게 가는 보상은 가장 예기치 않았던 발견이 될 걸세.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네. (중략) 다른 한편으로 자네의 모든 사상, 자네가 던진 모든 씨앗들, 그것들은 자네에게서 이미 잊혀졌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형체를 얻게 되어 쑥쑥 자라나게 될 거라네. 자네에게서 베풂을 받은 자는 제3자에게 그대로 <베풂>을 전해 주기 때문이라네. (중략) 만약 이러한 작업으로 보낸 평생의 삶과 지식 덕분에 마침내 자네가 엄청난 씨앗을 던져, 이 세상에 거대한 사상을 유산으로 남겨 줄 수 있는 상태에 있다면.......」

 

 타인을 위하는 개성의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구간이다. 이에 대해서는 <악어 외>라는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적이 있으니 참고할 것.

 

 7

 

 자신의 모든 고통과 아픔,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주장하는 유서를 읽은 뒤 자살을 시도하려는 이뽈리뜨와 그런 그를 말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뽈리뜨의 혼란스러운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서 더욱 아프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책을 접하기 전의 나라면 그의 행동을 무작정 비난했을 것이다.

 

 

 8

 

p.609 겸손은 가장 무서운 힘이라는 말이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공작에게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공작이 한 말이기 때문이다.

 

 겸손에 대해서 공작에게 묻는 것이 재미있다. 실제로 공작은 겸손하면서도 단단한 인물이지.

 

 

 9

 

 아글라야에게서 나스따시야의 이야기를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공작 앞에 레베제프가 나타나 자신의 돈을 훔쳐간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토론(?)을 시작한다. 왜 들어갔는지 잘 모르겠는 부분이긴 하다.

 

 10

 

 줄곧 공작과의 만남을 피했던 나스따시야가 나타나, 그의 편지에 대한 대답으로 이별을 고하고 사라진다. 참 어려운 관계다. 공작이 이 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4부

 

 1

 

p.708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일상적 사건들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리 관계를 시시각각으로 유지 (중략) 그들을 빼버린다면 소설의 사실성을 파괴하게 되는 셈이다. 단지 흥미를 위해 실제로 있음 직하지 않은 이상하고 희박한 인물들의 전형으로 소설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아마 재미도 없을 것이다.

p.710 이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틀에 박힌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이다. 전자가 후자보다 행복하다.

틀에 박힌 사람들

p.710
틀에 박힌 <평범한> 사람은 자기가 비범하고 독창적인 인간이라고 가장 편안하게 상상함으로써 아무런 심적 동요 없이 흡족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남들에게서 들은 사상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어떤 책 한 쪽을 다짜고짜 잠깐 들여다보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독자적 사상>이며 자신의 머릿속에서 생겨난 사상이라고 즉시 믿어 버린다.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

p.711 <똑똑한 보통> 사람은 잠깐 동안, 아니 한 평생이라고 해도 괜찮지만, 자기를 천재적이고 지극히 독창적인 사람으로 상상한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는 회의의 벌레가 똑똑한 이 보통 사람을 절망의 늪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하게 때문이다.

p.712 이러한 신사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대체 무엇을 발견해야 하고, 무엇을 발견할 준비를 갖춰야 되는지조차 평생 동안 확고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독자적인 이론이다. 신기한 내용이라서 발췌했다. (동시에 팩폭이기도!) 그렇다면 진정 비범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태어날 때부터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비범한 사람만이 비범한 사람인 걸까?

 

 2

 

 이뽈리뜨가 나타나 가브릴라는 비판한다. 그는 그를 '틀에 박힌 사람들'의 유형으로 규정한다.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범인의 전형이라며 매우 맹렬하게 비판한다. 이뽈리뜨가 이렇게까지 가브릴라를 싫어할 이유가 있었나? 이야기가 분산되어 있어서 파악하기가 힘들다.

 

 3

 

 앞에서 잠깐 나왔던 레베제프의 도난 사건의 결과가 이어진다. 돈은 찾았지만 그거로 이볼긴을 엿먹이려고 했던 레베제프와, 그런 그를 만류하는 공작이 등장한다. 왜 이리 개판인지;

 

 4

 

 자신이 나폴레옹의 시동이었다는 이볼긴 장군의 충격 고백(?)과 함께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나폴레옹의 시동이었다는 것은 거짓말로 보인다. 가브릴라가 틀에 박힌 사람들의 전형이라면, 이볼긴 장군은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의 전형에 속한다. 그 모두를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고 있을 공작이 안타깝다.

 

 5

 

 드디어 아글라야에게 청혼하는 공작. 어느덧 그는 아글라야를 사랑하게 된 모양이다. 하지만 아글라야의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성격 탓에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 모든 고난의 순간마다 현실을 볼 줄 아는 공작이 대단하다.

 

 6

 

p.823 공작은 이 사교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진짜 금화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행복한 기분에 도취한 자신들에게 완전히 만족해 있었다.

 

 아글라야의 약혼자가 되어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공작. 공작의 눈에는 사교계의 사람들이 그저 반짝일 뿐이지만, 사교계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빙산의 일각일 뿐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선 최근의 SNS도 사교계가 아닌가 싶고.

 

 7

 

 결국 파티에서 대형 사고를 치는 공작. 이때 공작이 흥분 상태로 내뱉는 말들은 러시아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러시아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8

 

p.875 「(전략) 공작을 속이고자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속이고도 남지만 누가 속였든 간에 공작은 모든 사람을 용서해 준다는 걸 알게 됐지요. 바로 그런 연유로 난 그를 사랑하게 된 거예요.」

 

 아글라야는 나스따시야와 대면하고 그녀에게 공작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얘기한다. 실로 공작은 그런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는 욕망을 포획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아글라야와 나스따시야가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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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은 그 누구도 선택하지 못한 상태로 (애초에 공작에겐 누구를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스따시야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의 전초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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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스따시야는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로고진과 함께 결혼식을 파기하고 떠난다. 하얗고 묵직한 웨딩 드레스를 입고 로고진과 함께 헐레벌떡 떠나는 나스따시야의 모습이 애처롭다. 또츠끼를, 그리고 자신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텐데.

 

 11

 

p.931 공작은 한발 정도 더 가까이 내딛고는 멈춰 섰다. 그는 선 채로 1, 2분 가량 유심히 안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줄곧 침대 곁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음의 정적이 깔린 방에서 공작의 심장이 뛰는 소리는 마치 방 전체에 쿵쾅대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어둠에 익숙해져 침대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침대 위에는 누군가가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가냘픈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잠을 자는 사람은 머리부터 하얀 시트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사지는 희미하게나마 분간할 수 있었다. 다만 침대가 높아서 손발을 쭉 펴고 누워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아무렇게 벗어 놓은 옷가지와 고가의 흰색 실크 드레스, 꽃송이, 리본 등이 침대 위, 발 언저리, 침대 옆 안락의자, 심지어는 마룻바닥 위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머리맡의 작은 탁자 위에는 벗기어 내던져진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발치에는 갈가리 찢겨진 레이스가 엉켜 있었고, 희끗거리는 그 레이스 위로는 하얀 시트 밑으로 비죽 나와 있는 맨발 끝이 보였다. 발끝은 마치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것처럼 무섭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작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지만, 바라보면 볼수록 방 안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더욱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잠에서 깨어난 파리 한 마리가 갑자기 윙윙거리며 날기 시작하다가 침대 위를 맴돌다가 머리맡에서 잠잠해졌다.

 

 나스따시야의 죽음을 묘사한 부분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하고 인상적인 부분이라 발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손 가득 움켜쥐고 있던 모든 욕망이 한 순간에 쏟아져내린 듯한 모습이다. 어쩌면 나스따시야는 이렇게 되고 싶어서 평생을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슬프고 비극적이다

 

p.938 적어도 여러 시간이 더 경과한 후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때 살인자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열병을 앓고 있었다. 공작은 꼼짝 않고 조용히 옆에 앉아서, 환자의 비명소리와 헛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떨리는 손을 황급히 뻗어 그의 머리와 뺨을 어루만져 달래 주듯이 쓰다듬었다. 하지만 공작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방으로 들어와 그를 에워싼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싸늘하게 변한 나스따시야 옆에서 미쳐가는 로고진을 그저 쓰다듬어 줄 뿐인 공작의 모습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이 와중에서도 로고진을 위로할 뿐인 미쉬낀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인상적이다. 그는 진정 백치였던 것이다...

 

 12 결말

 

 모든 인지를 잃은 공작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뒷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글라야는 최악의 결말은, 다른 사람들 자신들이 살아가던 탐욕의 세계를 계속 살아가게 된다. 결국 미쉬낀의 노력은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일까? 작품 속 인물들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역자 해설 / 삶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파토스

 

p.945 이 작품에서 작가는 평생 동안 그를 쫓아다녔던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화합과 이상을 실현해 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p.946 미쉬낀이 처한 사회의 문제점은 온갖 타락과 악덕에 면역되어 있는 도덕적 백치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낄 줄 모른다.

p.946 장편 『백치』는 그러한 현실의 문제들을 이상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예술적 대처 방안이며, 미쉬낀은 바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중심 인물이다.

p.947 도스또예프스끼에 있어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아름다운 인물은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세계 문학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물로 도스또예프스끼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꼽는다. 그다음으로는 찰스 디킨스의 피크위크,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을 내세우고 있다.

p.948 미쉬낀은 <그리스도 공작>의 분신에 걸맞게 자기 자신을 사욕 없이 타인에게 바치는 고귀한 인간의 소명을 이행하며 인류 간의 상호애(相互愛)를 실행하는 아름다운 인물의 긍정적인 화신이다.

p.955 소설은 암울하게 끝을 맺지만 삶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파토스가 소설의 지배적인 음조로 남게 된다. 그러한 음조는 러시아 고대 민화에 백치와 같은 바보로 등장하는 유로지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미쉬낀의 헌신적 존재를 통해 예술적으로 전달되며, 인류의 밝은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미쉬낀이 어떤 방식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다른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있었지만 미쉬낀에 대한 것만 파악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작품 평론 / 『백치』에 나타난 인물 간의 갈등 양상

 

p.958 이들 사회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들의 권리를 추구하고 있다. 그들 권리의 공동의 척도는 돈이다.


 돈이라는 주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지만, 이 작품에서는 특히나 돈의 존재감이 똬리를 튼 뱀처럼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동시에 돈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p.960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존경을 바라지 않고 있다. (중략) 16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또쯔끼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성적으로 농락당했다. 그녀가 상뜨 뻬쩨르부르그에 온 것은 그 상처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p.961 상처에 대한 대가로 그녀는 다시 한 번 상처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p.964 그녀가 로고진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녀 자신이 로고진으르 보고 있는 그대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로고진을 증오하고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이기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미쉬낀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녀가 미쉬낀이 생각하는 인물처럼 되기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미쉬낀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가 그녀에게서 치욕과 그녀의 죄를 앗아 가겠다고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p.965 최종적인 분석을 하자면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치욕과 죄일 뿐이다.

p.965 만약 나스따시야가 공작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면, 그녀는 순수하고 결백하고 착한 나스따시야를 용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나스따시야를 받아들이려면 그녀는 순결하고 착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던 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상 그녀는 고통과 복수의 일념으로 영혼이 타버린 나스따시야를 포기해야 한다.


 어째서 나스따시야가 공작을 거부하면서도 로고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에 대한 해설이다. 결국 그녀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풀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자학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자학을 포기하면 세상에 복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묵은 분노를 풀어낼 방법이 없어 죽음을 선택한 그녀가 안타깝다.

 

 1. 이뽈리뜨

 

p.967 로고진과 미쉬낀 사이에서 나스따시야가 한 명을 선택해야 되는 문제를 소설 갈등 구조의 핵심으로 정의한다면, 이뽈리뜨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

p.970 그는 도스또예프스끼가 강력하게 주장했던 그리스도, 신념, 겸손, 신의 수용을 거부해야 되는 이유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p.973 이뽈리뜨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가장 중요한 사상들의 하나를 구현시키고 있다. 타락한 본성은 (타락한 본성이란 신이 아닌 자신을 믿는 자이다) 그것이 건드리는 모든 것을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상하고, 선량하고, 동정심이 많고, 거창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p.974 신에게서 등을 돌린 그는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다.

p.975 믿음이 없는 인간은 자신의 의도가 아무리 성실하다 할지라도 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작품을 읽으면서 왜 나왔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 이뽈리뜨였는데 해설을 읽으면서 해소되었다. 니힐리즘의 극단에 있는 그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진리 앞에서 모든 구원의 가능성을 내팽개친다. 그런 점에서 그는 공작과는 대척점에 있는 존재로도 보인다. 언젠가 다시 읽게 되면 그땐 이뽈리뜨를 중심으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2. 레베제프

 

p.978 이들의 사회는 타락해 있으며, 그러한 타락의 거울은 바로 레베제프이다.

p.978 그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켜야 될 고상함이나 체면을 다 떨쳐 버리고 행동함으로써, 가려져 있지 않은 그들 영혼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거울이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는 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천박함을 감추지 않는 인물이 바로 레베제프다. 그가 보여주는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이 작품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해설이 흥미롭다.

 

 3. 미쉬낀 공작

 

p.980 공작은 오직 결백이라는 무기만 들고 이들 사회 속으로 들어온다.

p.980 미쉬낀 공작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사랑이 가득 담긴 인물이다. 미쉬낀은 선한 인간을 창조한다는 외견상 거의 불가능한 과제를 극복하려는 작가의 시도이다.

p.981 공작은 그에게 가해진 상처를 받아들이고 견뎌 냄으로써 상처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그렇게 견딤으로써 그는 상처를 주고받는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있다. 또한 그렇게 악순환을 끊어 버림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변할 수 있게끔 영향력을 행사한다.

p.982 자신에 대한 신념은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으며, 타인에 대한 신념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타인의 성격을 바꿀 수 있다.

p.985 미쉬낀 공작은 심판 행위를 자제하고 있다. 심판 행위는 전횡적인 인간 의지의 행위이며 신의 권리를 가로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른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을 잃는 것이다.

p.988 인간이 서로에게 가하는 상처를 억제하는데 그리스도가 실패를 했듯이, 공작 역시도 실패작이다. 그러나 그는 그 상처를 자기에게 끌어들이려 하고 자신의 믿음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이미지를 안겨 주고 있다.


 미쉬낀이 어떻게 도스또예프스끼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설2이다. 이런 인물에 대한 힌트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계속 표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인물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이었는데 미쉬낀을 통해 그 모델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성녀가 된 창녀만이 그런 이상향에 가까웠던 게 아님을 알아서 또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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