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름꾼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097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시작
도스또예프스끼가 도박중독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죄와 벌>이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작가라는 사실 만큼이나 유명하다. 그런 그가 대놓고 <노름꾼>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썼다. <악령>이나 <백치>를 비롯한 쟁쟁한 후기작들 사이에 노르스름한 얼굴로 끼어 있는 이 작품은, 제목만 봤을 때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영혼 자체를 투영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명작으로는 취급받지 못한다니, 다른 후기작들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궁금하다.
워낙 진득한 작품(죄와 벌)을 3주에 걸쳐 읽은 다음이라,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어 이 작품을 온전히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 하나를 믿고 읽어볼 생각이다. 그만큼 이 제목이 마음에 든다.
감상
일단 첫인상은 역시나 재미있다는 것이고, 두번째 인상은 주인공의 조형이 독특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모두 자폐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 주인공은 상당히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며, 메타 인지도 비교적 높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 <노름꾼>이라는 제목을 생각하면 가장 자폐적인 인물이 주인공이어야 어울릴 것 같은데 그 점이 조금 의외였다.
<죄와 벌>을 쓰면서 그런 유형의 주인공에게 지친 탓이려나? 아무튼, 이번 화자는 훨씬 생동감이 있다. 자신의 고집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그 때문에 공격받는다고 해도 전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지? 하고 되묻는 뻔뻔함이 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뻔뻔함이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원이 된다.
책은 짧지만 갈등 구조는 상당히 복잡하다. 갈등 구조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의 관계가 '돈'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좋다싫다의 관계로 맺어진 인간 관계라면 얼마나 간단하겠는가? 돈 때문에 좋아하는 척하고, 돈 때문에 멀리하는 관계들이 서로에게 억지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모든 관계를 조망하는 인물이 바로 화자다. 그의 성향이 자폐적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던 이들의 관계는 한 사람의 등장으로 완전히 같은 지향점을 가지게 된다. 바로 '할머니'라고 불리는 장군 부인의 등장이다. 작중 모든 인물들은 (아마도 주인공을 제외하고) 장군 부인의 유산을 눈독들이고 있으며 그녀의 사후 재산 분배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오늘내일 하는 줄 알았던 할머니가 떡하니 등장해서 모두를 휘두르고 다니는 장면이 정말 재미있다. 할머니의 완고한 성격까지 시너지를 이루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필적하는(?) 스펙타클이 이어진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처음 작품을 읽을 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전개, 바로 장군과 그 무리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왔던 할머니 자신이 도박에 빠져드는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 할머니라는 사람은 완고하고 아이같은 사람이라 도박에 쉽게 빠져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할머니의 유산을 노리는 이들의 입장으로선, 할머니가 돈을 탕진할까 봐 덜덜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할머니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나는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전까지는 가정교사로서 하찮은 취급을 받아왔던 그가, 마치 한 번의 도박에서 큰 판돈을 벌어들인 사람처럼 VIP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할머니는 파산을 향해 달려가는 급행 열차에 올라탄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파산을 기점으로 이 작품의 진정한 노름꾼, '나'가 표면 위로 떠오른다.
이야기는 미칠듯한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미쳐 날뛰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팝콘 튀기듯이 터져나가며 무시무시한 장관이 만들어진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중에서 이렇게까지 몰입하면서 읽은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빨려 들어가다 못해 끌려가듯이 읽었다. 마치 이 소설 자체가 하나의 도박판처럼 느껴진다. 승부 한 번으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도박처럼, 페이지 한 장을 경계로 이야기가 요동친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가운데, 이들의 관계는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넘어간다. 파국을 맞이하고 나서야 파국을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파국으로 나아간다. 이미 돌아갈 곳은 없기에... 노름꾼은 노는 존재가 아니라 놀아지는 존재임을 증명하며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돈과 사랑의 저울질에 대한 것이다.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된 순간, 나는 그토록 사랑했던 뽈리나에 대한 집착이 잠시 숨을 죽이는 것을 느낀다.
p.221
맹세하건대 난 뽈리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내가 도박에 손을 대고 돈 다발들을 긁어 모으던
그 순간부터 어쩐 일인지 나의 사랑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 같았다.
흔히들 사랑이 돈보다 위대하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쩌면 우린 돈의 위력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서늘한 의문이 떠오르는 문장이었다. 가장 사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인 사랑조차 어마무시한 돈 앞에서는 기력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다. 우리가 신성시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인가 싶어서.
지금까지 읽은 도스또예프스끼의 모든 작품은 사랑을 이야기해왔다. 타인에 대한 편견없는 사랑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 작품에 이르러서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돈 앞에서 무자비하게 스러지는 사랑을 통해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대체 무엇일까?
이야기의 결말부에서 이르러서야 주인공은 모든 일의 진상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를 노름꾼의 운명으로 밀어버렸던 바로 그 일의 진상에 대해서. 그 진실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원점으로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다.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노름판으로 내던진다. 꼭두각시가 된 그의 모습과 함께 작품은 쓸쓸한 결말을 맞이한다.
사람을 죽이고도 구원받았던 라스꼴리니꼬프와 달리 그는 도박에 손을 댄 것만으로도 영원한 파멸의 길을 향해 나아간다. 라스꼴리니꼬프보다도 그의 처우가 더 심각한 것은, 아마 그가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내맡긴 인물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잘못된 생각이긴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움직인 라스꼴리니꼬프와 달리, 그는 사랑하는 뽈리나와 세상의 눈치에 맞춰 살아간다. 심지어 그런 상황을 즐긴다. 뽈리나에게 자신을 좀 더 경멸하라고 하고, 세상에게 자신에게서 좀 더 많은 것을 가져가라고 한다. 그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파멸을 바라는 것뿐이다.
주인공은 당시 외세에 휘둘려 휘청거리던 러시아의 아바타 그 자체다. 자본주의와 유럽 문명의 찬란함에 휘말려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던 러시아의 모습을 상징한다. 작중 그는 러시아인의 기질을 비판하는데, 이는 사실 그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마찬가지다.
p.76
러시아인들은 외국에 나가면 지나치게 겁을 먹는 경향이 종종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마치 코르셋을 입은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얘긴데,
특히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일단 한번 정해진 형식,
선입견에 사로잡힌 그 어떤 형식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주인공은 뽈리나와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공통된 욕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엄청난 돈을 거머쥐게 되자, 그는 자학적인 수준으로 돈을 흥청망청 낭비하면서 다시 빈털터리가 되기를 추구한다. 그리고 빈털터리가 된 후에는 다시 한 번 돈을 벌기 위해 도박판으로 뛰어든다. 이 기형적인 행동 패턴을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을까?
그 문제에 대한 답도 위의 발췌문이 나와있다. 그는 돈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물론 돈이 있으면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무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실제로 엄청난 부자가 된 뒤 그는 유럽 문명의 핵심인 프랑스의 한복판에서 이름을 날리며 살아간다. 블랑쉐의 애인이 되어 그야말로 왕과 같은 삶을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렇듯 문학은 이 부사의 다음부터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다시 나락으로 스스로 걸음을 옮긴다.
결국 사랑하는 뽈리나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결말에서 갱생했어야 한다. 하지만 갱생의 의지를 엿보이는 것에서 끝날 뿐이다. 되돌아오기엔 너무 멀리간 탓도 있지만,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뽈리나의 사랑은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 감동하기도 했고 놀라기도 했고 갱생의 의지를 잠깐 느끼기도 했지만 그 정도다. 그녀의 존재는 이미 어마무시한 돈 앞에서 흐릿하게 뭉개진 상태다.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뽈리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 뽈리나를 위해 모욕을 감수하고 그 많은 돈을 벌고도 다시 빈털터리가 되기를 자처할 만큼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 결국 그가 벌하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이고, 가장 사랑받고 싶은 것 또한 자기 자신이다. 뽈리나도 돈도 그것을 보장하기 못하기에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타락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미워하는 사람에게 매몰찬 대접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이것을 다시 러시아의 이야기로 끌고 오면, 결국 도스또예프스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신념 없이 외세에 휘둘리고 있는 러시아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도박판에 휘둘리는 사람은, 도박판의 결과로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뿐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핸들을 쥐어준 사람만이 도박에 빠질 수 있다. 당시의 러시아는 그야말로 거대한 노름판 그 자체였던 게 아닐까? 누구보다도 치열한 노름꾼인 도스또예프스끼였기에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죄와 벌>이 자신의 삶을 어긋난 방향으로 증명하려다가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라면, <노름꾼>은 자신의 삶을 타의에 저당잡힌 사람의 이야기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혼란한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들끓는 인정 욕구와 자아에 대한 몰이해를 걷어내야만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노름꾼>은 그러지 못해 파멸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다.
문장
「잘 들으세요, 그 부인들에게는 수없이 많은 행운이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해서 아주 훤히 알고 있고 또 자제할 줄 알기 때문이지요.」
p.99
스쳐지나가듯 읽은 문장이지만, 이 문장에 도스또예프스끼가 원했던 이상적인 러시아의 형식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어 발췌했다. 수많은 풍파와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켜낼 줄 아는 형식 말이다. 외세에 휘둘리던 러시아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그가 바란 이상적인 러시아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노름꾼
제1장
p.15 「(전략) 제가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수도원장과 싸우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친절하게 저를 대답하기 시작했어요.」
작중 뽈리나의 노예이기를 자처하는 화자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문장이라 흥미로워서 발췌했다. 과연 이 작품의 끝에서 화자는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그보다 더한 삶을 살게 될지.
제2장
p.25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도박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고 터무니없다는 고루한 생각,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런 생각이 더 우스운 것 같다. 도박이 다른 돈벌이 수단들보다, 예를 들어 장사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가? 백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돈을 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p.27 내 스스로가 돈을 따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인지 몰라도, 도박장으로 들어섰을 때 내게는 그 모든 탐욕과 탐욕의 모든 추악함이 왠지 더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딱히 논리가 없는 모럴 해체적인 발언이다.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자는 도박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다.
제3장
p.40 아, 난 이 모든 것들이 싫다! 정말이지 속 시원히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을 내팽개쳐 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정말 내가 뽈리나를 포기할 수 있을까, 정말로 내가 그녀를 따라다니며 첩자질을 하지 않고 배겨 낼 수 있을까? 첩자질은 물론 비겁한 짓이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뽈리나를 향한 그의 태도는 도박을 향한 태도와 마찬가지다. 뽈리나가 자신을 절대 바라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도박으로 돈을 벌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의 노예로서의 삶이라도 자처하는 것이 중증 도박 환자의 마인드가 아닌지.
제4장
p.44 이쯤 해서 자리를 떴어야 했는데 나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운명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또 그녀를 혼내 주고 약올려 주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걸 수 있는 가장 많은 돈, 4천 굴덴을 걸었지만 잃고 말았다.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서 뒤로 물러섰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도박에 빠져들어 큰 돈을 잃었을 때의 심리가 여실히 드러나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런 묘사가 많아지지 않을까?
p.49 「(전략) 자신이 파멸의 길로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에 희생자 스스로가 기뻐할 지경이 되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상(理想)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후략)」
역시나 도박에 대한 은유다. 이 이야기의 모든 구절은 도박을 향한 끈질긴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5장
뽈리나와 말다툼을 하다가 그녀의 심술에 본때를 보여주려고 남작에게 실수를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기존 작품들의 주인공과 달리 과감하고 뻔뻔한 성격을 지닌 것이 인상적이다. <죄와 벌>을 쓰면서 본인도 그런 인간 군상에 좀 지쳤던 걸까?
제6장
p.66 그녀의 어떤 점이 매력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중략) 머리카락은 불그스레한 빛을 띠고 있고 눈은 진짜 고양이 눈이다. 하지만 그런 눈으로 정말 당당하고 도도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녀이다.
어째서 뽈리나를 그토록 사랑하는가? 사랑이 아닌 결핍과 불안에 가깝게 보이긴 하지만 그는 그녀의 정념과 자신감에 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뽈리나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떄 그토록 충격을 받은 것이다.
p.76 러시아인들은 외국에 나가면 지나치게 겁을 먹는 경향이 종종 있다. (중략) 한마디로 말하면 마치 코르셋을 입은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얘긴데, 특히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일단 한번 정해진 형식, 선입견에 사로잡힌 그 어떤 형식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스스로 코르셋을 조이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라는 논리는 언제나 당연하게 들리면서도 충격적이다. 자꾸 눈치를 보는 상황에선 항상 무엇이 문제인지 돌이켜봐야 한다.
제7장
p.87 그리고 하나의 결론이 나왔는데, 사실 내게는 사건을 일으킬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이었다.
p.89 어제 내가 내친김에 말도 안 되는, 애들 장난 같은 위협을 몇 마디 입 밖에 냈다고 해서,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말들을 지껄였다고 해서 이런 <떠들썩한>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중에 가장 힘없고 낮은 위치에 있는 화자이지만 오히려 잃을 것이 없기에 판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계기야 유치했을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한 개인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제8장
p.95 그리고 내게서 뽈리나는 언제나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중략)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서 정확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문득 놀라 버릴 정도로 그녀는 내게 수수께끼인 것이다. 확실한 얘기를 하기는커녕 모든 것이 터무니없고 괴상하고 당치 않은 것들뿐이었다.
어째서 뽈리나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또 다른 답변이 아닌가 싶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보다도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어야 그 답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내어주고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하게 되는 게 아닌지.
제9장
p.109 주위의 이목을 끄는 주된 원인은 안락 의자에 앉은 채 위로 옮겨지고 있는 할머니의 위압적이고 압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얼굴과 마주칠 때마다 할머니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그 사람을 재보았고, 그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내게 큰 소리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할머니께서 등판하신다; 오늘내일 한다던 할머니는 너무나 정정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권세를 과시한다. 이 문장에서는 타인에게 호기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권세를 갖게 되는 할머니의 모습이 흥미로워 발췌했다.
제10장
p.131 심판들 쪽에서도 어떤 기대를 갖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괴상한 도박꾼이 나타나면 무언가 색다른 일이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도박판까지 섭렵한 우리의 할머니. 이렇게 강렬한 캐릭터는 지금까지 읽은 도끼 작품 중에서도 처음인 것 같다ㅋㅋ 시종일관 낄낄대면서 읽고 있다. 할머니의 등판을 묘사하는 장면이 재미있어서 발췌했다.
제11장
할머니의 도박 등판으로 안절부절하게 된 주위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도도하고 이기적이었던 사람들이, 할머니의 문제가 걸리자 주인공 앞에서 낯빛을 바꾸고 할머니를 말려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과연 할머니는 도박으로 전재산을 잃을 것인가? 그리하여 이 인간들도 함께 파멸할 것인가?
제12장
할머니의 도박은 파멸을 모르고 계속된다. 화자는 끝내 손을 떼지만, 그 이후에도 할머니는 점점 더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 동시에 장군과 그 가족들의 파멸도 가속화된다. 할머니의 돈이 없다면 장군도 뽈리나도 사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13장
결국 할머니는 모든 돈을 잃고 프랑스를 떠난다. 모든 게 끝이 났다. 뽈리나도, 장군도 모든 게 끝났다. 그 와중에 뽈리나는 제발로 주인공을 찾아온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엄청나게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제14장
그렇다, 이 모든 문제는 결국 돈의 문제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뽈리나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한 고양, 그리고 도박의 가능성이 하나의 지점으로 묶이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도박판으로 달려가고, 악마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20만 프랑을 딴다. 현 시가로 따지면 500억을 호가하는 돈이라고 한다. 미쳤다...
제15장
p.217 그런 상태,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당돌한 언행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일까? 나를 찾아오려고 결심했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감 때문일까? 혹시 내가 스스로의 행복에 자만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안리까? 드 그리외와 다를 것 없이 그녀에게 5만 프랑을 줌으로써 그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내 양심에 비추어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생각에 그 원인은 어느 정도 그녀의 허세에서 온 것 같았다. 바로 그 허세 때문에 그녀는 나를 의심했고 또 모욕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뽈리나애게 드 그리외에게 갚은 돈을 주지만 뽈리나는 도리어 그를 모욕하면서 미쳐버린다. 자존심과 허영심이 강한 사람이기에 돈에 휘둘리는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정신나간 듯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다 적을 수도 없을 정도다.
p.221 맹세하건대 난 뽈리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내가 도박에 손을 대고 돈 다발들을 긁어 모으던 그 순간부터 어쩐 일인지 나의 사랑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 같았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어줄 정도로 사랑했던 뽈리나조자 큰 돈을 손에 넣게 되자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격하되는 부분이 너무 소름끼쳐서 발췌했다. 돈이란 대체 무엇인가? 사랑은 대체 뭔가?
제16장
그런 그에게 뽈리나가 아닌 블랑슈가 붙는다. 시종일관 장군의 마음을 사로잡고 돈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 악마가, 이번에는 주인공에게 붙은 것이다. 주인공은 미련없이 그녀와 함께 파리로 떠난다. 그리고 흥청망청 돈을 낭비하면서 살아간다. 뽈리나에 대한 언급은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
역자 해설 / 자화상에 비쳐진 반란자의 공허
p.264 그리고 비록 27일 만에 즉흥적으로 쓰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제기되는 주요한 문제들, 즉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환경>, <개인의 고립>, <신비주의적 세계관>, <의식의 분열> 등의 문제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27일 만에 썼다니... 역시 돈이 궁할 때(?) 글이 제일 잘 써진다. 도끼 작품의 테마가 잘 정리되어 있는 구절이라 발췌했다.
p.266 이 작품의 테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의 결여로 러시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외국에서 도박에 탐닉함으로써 현실을 도피하는 사회적 반란자의 정신적 공허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에 하나 더 추가되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 아니 애증의 테마이다.
p.273 작가는 도박과 사랑의 테마를 중심으로 주인공의 의식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그 속에 투영된 러시아 사회의 <현재>, 그리고 러시아 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에 대해 독특한 답을 내놓고 있다. 독일의 질서와 프랑스의 고상함에 러시아의 꼴사나움과 품위 없음, 격렬함과 성급함이 대비되는데, 이것은 작가가 파악한 러시아의 모습이다. 독일인이나 프랑스인들과 달리 러시아인들은 빨리 그리고 쉽게 부를 얻을고 발버둥친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방탕하며 자신들의 열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러시아인의 재능은 헛되이 썩어 없어지고 젊은 에너지가 무분별하게 낭비된다. 러시아는 공고한 전통을 갖지 못했으며 확립된 형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p.274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중략) 러시아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 서구의 세련되고 품위 있는 문화를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중략) 서구 사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개인주의를 배격했으며, 인간의 연대성과 사랑을 신성화하였다. (중략) 당시 서구 소설이 사회에서 소외되어 고독의 무거운 짐에 눌려 파멸하는 개인을 묘사함으로써 끝나는 데 비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갱니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이탈하도록 만들려는 악령과의 투쟁을 묘사한다.
p.274 도스또예프스끼의 인물들은 비록 현재는 잘못된 삶,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이를 극복할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체념과 회의주의에 빠져 있기보다는 희망에 찬 전투 정신과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으로 시종 고무되어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은 언제나 '러시아인의 정체성 찾기'로 귀결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급하게 쓰여진 만큼, 도스또예프스끼의 내적인 관심사가 더욱 고스란히 표현된 것 같다. 회의주의로 손쉽게 넘어가지 않는 굵직한 태도가 좋다.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평론 / 『노름꾼』과 두 번째 결혼, 외국에서의 생활
p.278 도스또예프스끼의 첫 번째 관심사는 <현대적 요소>를 파악하여 당면한 문제(해외 러시아인들에 관한 문제_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다. 그다음에 하나 시대의 인간, 특정한 사회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인간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다(그것은 바로 미완성의 인간, 금방이라도 반란을 일으킬 것 같지만 감히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다.
p.279 다시 말해서 현재의 역사적 시기의 사상을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개인 속에 구현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적・심리학적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소설은 27일 동안 즉흥적으로 쓰였고, 그 때문에 최초의 계획에서 온전하게 남은 것은 룰렛 도박의 상세한 묘사뿐이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당대의 시대상과 그것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구상이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않았다는 평가.
p.289 유럽의 형식에 대립하는 것이 러시아의 경우인데 러시아에는 일정한 형식이 없다.
p.290 <러시아인들은 그 재능이 너무 많도 다양해서 자신에게 알맞은 형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거예요. 여기서 문제는 바로 형식에 있습니다. 우리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풍부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p.290 러시아의 혼돈이 가라앉으면 과연 러시아의 질서와 조화가 창조될 수 있을까? 러시아의 <긍정적이고 훌륭한 인간>은 언제 나타날 것인가? 이러한 생각과 함께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의 다음 소설 『백치』의 테마로 나아간다.
형식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태에 맞닥뜨렸을 때에 그 사태를 분석하고 조합하는 일련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러시아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서구 문명을 감당할 힘이 없어 이리저리 휘둘리기 바빴다. 그것은 형식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가 생활은 러시아에 그런 '형식'을 부여하기 위한 활동이었고, 후기작으로 갈 수록 그 형식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이르러서는 어떤 형식이 되어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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