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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023. 영원한 남편 외

by 쿠데 2020. 7. 30.

영원한 남편 외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중단편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119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시작

 

 이번 전집 읽기 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읽게 되는 중단편집이다. 이 책 이후에는 굵직한 후기작 3편만 남는다. 갈 길이 한참 남은 것 같았던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읽기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벌써부터 감개무량하다.

 

 아무튼, 정상에 이르기 전 마지막 쉼터가 아닐까 싶다. 단편이라고 해서 항상 만만했던 건 아니지만 분량이 짧으니 부담이 덜하다. 남은 장편을 읽기 위한 에너지를 축적한다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읽어보고자 한다.

 

 감상

 

 작품이 7개나 실려있는 만큼 각각의 단편에 단평을 다는 식으로 써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단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면 말미에서 서술하겠다.

 

 

 영원한 남편

 

 이 작품의 표제작이자 가장 긴 작품인 <영원한 남편>이다. 제목을 보면 대체 무슨 내용인가 싶은데, 흥미로운 불륜사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인 벨차니노프는 허영심 때문에 망상과 편집증으로 고생하는 전형적인 도끼식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한때 사랑했던 정부의 남편과 만나 우애(?)를 다져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실 <백치>의 미쉬낀보다는 벨차니노프같은 캐릭터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전문 분야(?)이기 때문에 초장부터 캐릭터가 입체감을 가지고 밀려온다. 허영심에 대한 고찰 또한 놀랍다. 허영심에 물든 인간은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고찰에 통감한다. 나 또한 허영심 때문에 고생했던 적이 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답게 비비 꼬인 인간 관계도 흥미롭다. 9년 전 사랑했던 여인의 남편이 나타나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의 딸이 어쩌면 자신이 딸일지도 모르는 상황이 천연덕스럽게 펼쳐진다. 불륜물에서 흔히 묘사되는 성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 없이도 이렇게 드라마를 짜올리는 것이 신기하다.

 

 또한 이 작품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전형적인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망상병 환자인 주인공(지하로부터의 수기)과, 알콜에 중독된 이기적인 아버지(죄와 벌), 남자를 좌지우지하는 팜므파탈(노름꾼), 세상의 악의에 질려 죽어가는 소녀(상처받은 사람들)까지. 이 인물들의 심리와 맥락을 이해할 수 있으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전집을 읽고 있는 입장으로선 마치 지난 작품들의 다이제스트를 보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만이 독자적인 아이덴티티가 있다면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은 저런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장면이 많았던 반면, 이 단편에서는 조금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서술을 한다는 것이다. 심리 묘사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듯한데 덕분에 이 다양한 군상들을 버드 뷰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버드 뷰로 내려다 본 도스또예프스끼의 세계는 위선과 자기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남편>이라는 제목이다.

 

 이 작품에서 영원한 남편은 빠벨 빠블로비치를 의미한다. 그는 혼자서는 좀체 살아갈 수 없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아내가 필요하다. 자신의 결핍된 세계를 메워줄 강력한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사라지자 이번에 그는 벨차니노프에게 의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인정을 받으려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이것은 벨차니노프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빠벨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엮이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의탁할 수만 있다면 악마조차도 사랑할 사람인 것이다.

 

 누군가의 남편이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영원한 남편' 빠벨 빠블로비치. 그런 그를 의심하고 경멸하다 그의 삶에 말려들어가는 벨차니노프. 결국 이 둘의 관계는 파국을 맞이한다. 빠벨 빠블로비치는 벨차니노프를 찌르고, 벨차니코프는 그가 자신과 전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빠벨 빠블로비치는 그렇게 영원히 자신의 삶과 과거로부터 미끄러져나간다.

 

 그러나 벨차니노프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벨차니노프는 빠벨의 집에 놀러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그와의 모든 관계를 청산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가 느낀 감정은 시원함이 아니라 '애석함'이었다. 빠벨과의 강렬했던 눈치 싸움이 그의 영혼에도 흔적을 남긴 것이다. 빠벨이 남긴 칼자국은 그의 손에서 영원하 흉져있을 것이고, 꽃 피우지 못한 리자의 삶 또한 그의 심연 어딘가에서 피어날 것이다. 그의 몸에 남아있는 것은 죄다 남의 것들 뿐이다. 빠벨 빠블로비치가 영원한 남편이라면 벨차니노프는 영원한 정부인 것이다.

 

 보보끄

 

 두 번째 단편인 보보끄는 사자들의 이야기이다. 장례식장에 참여했다가 그곳에 묻혀 있는 유령들의 대화를 듣는 것이 이 단편의 내용이다. 사실 대화의 내용은 특별한 게 없지만 유령들의 숨겨진 대화에서 이야기의 소재를 찾고 흥분하는 작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소설을 쓴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니만큼 유령들과 대화를 하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한 겨울에 얼어죽은 아이의 이야기를 짧게 담아낸 단편이다. 마치 내가 얼어죽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죽은 후의 세상이 그래도 아이에게 따뜻하게 묘사되어서 다행이다. 이후 이어지는 단편 두 개 또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농부 마레이

 

 노예나 다를 바 없는 농부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따뜻함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인간의 고상한 자질은 계층에 상관없이 발현될 수 있다고 믿는 작가의 시각이 따뜻하고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가난하고 약하다고 해서 고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백 살의 노파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눈을 감은 노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노파 역시 사회적 약자에 속하지만,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는 따뜻하고 우아하면서도 평화롭다. 그런 존재에 대해서 경외감을 표현하고 있는 기분 좋은 단편이다. 노파의 죽음이 이렇게 신비하고 경건하게 느껴질 줄이야.

 

 온순한 여자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긴 다른 단편과 달리, 이 단편은 한 부부의 비극적인 일화를 담고 있다. 남편의 일방적인 사랑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 아내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온전히 남편의 시각에서만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아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오로지 맥락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자아도취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에 대한 단편이라고 생각한다.

 

 우스운 사람의 꿈

 

 마지막에 실린 단편으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는데 가장 흥미로웠다. 어느 날, 자살을 꿈꾸다가 진짜로 꿈속에서 자살을 한 후 사후 세계로 건너간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주적인 스케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과감함에 놀랐고, 그 안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추구하는 진리의 모습을 우화적인 형태로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다른 말이 필요할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이 그가 추구하고 신봉하는 진리이다.

 

 

 전반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었다. 다른 단편집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느낌도 있긴 하지만 잡문류를 모아놓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개인적인 추천 단편은 가장 마지막에 실린 '우스운 사람의 꿈'이다. 환상적인 필치로 그려진 단편인 것도 흥미롭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추구하는 진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엿볼 수 있는 단편이기도 하다. 이 단편을 읽고 나면 다른 작품을 읽을 때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6개의 단편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키워드는 이 작품만이 아니라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작품에서 되풀이되는 미덕이기도 하다. 다만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들은 짧은 만큼 그 메시지를 강하고 단편적으로 담고 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영원한 남편>들, 사랑 없이 탐욕만 남은 <보보끄>들, 사랑의 부재 속에서 죽어간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사랑을 깨닫게 해준 <농부 마레이>, 사랑 속에 생을 마감한 <백 살의 노파>, 이기적인 사랑을 견딜 수 없었던 <온순한 여자>, 그리고 사랑이 전부임을 깨닫는 <우스운 사람의 꿈>까지. 형태야 어찌되었든 이들은 사랑이라는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의 답 또한 사랑이다. 특히나 자아도취적인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느낄 때에 그 모든 파국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왜 타인을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지난 작품들에서 수없이 얘기해왔다. 특히나 사랑이 갖는 가치에 대해서는 <백치>의 미쉬낀이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남은 작품들에서도 그는 사랑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이제 남아있는 작품은 장편 세 편뿐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일생에 걸쳐 쌓아올려온 사랑의 대서사시를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싶다.

 

  문장

<무슨 일에나 놀라는 것은 당연히 어리석고, 아무런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이 훨씬 미덕이며 어쩐지 훌륭한 태도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 생각으로는 아무런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이 무슨 일에나 놀라는 것보다 훨씬 어리석다. 게다가 아무런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어리석은 인간은 존경할 능력도 없는 것이다.>
p.238

 감탄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감탄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을 감탄하게 만들 수 있다. 감탄할 수 있다는 건 세상에 대해 마음은 연다는 뜻이고, 마음을 연다는 건 사랑을 주고 받을 용기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즉, 감탄할 수 있는 능력은 두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다. 이 능력만큼은 퇴화되지 않도록 반드시 보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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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남편 외

 

 영원한 남편

 

 1. 벨차니노프

 

p.13 그는 재정 상태가 아주 나빠진 지금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굳이 끊을 필요까지는 없는 많은 교제 관계를 일부러 끊어 버렸다. 사실 거기에는 그의 허영심도 일조를 하고 있었다. 그의 의심과 허영심으로는 예전의 교제 관계를 계속 유지시켜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혀엉심은 고독한 생활 속에서 차츰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허영심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커져 갔던 것이다.

p.13 그것은 일찍이 없었던 어떤 특수한 허영심으로 변해 갔다. 때때로 그 허영심은 전에 흔히 있었던 것과는 다른 이유,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이유, 여태까지보다 <더욱 고상한> 이유로 고통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영심에 대한 놀라운 고찰이다. 허영심이 어떻게 점점 더 심화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고고한 허영심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마침내 세상 모든 것을 경멸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점점 더 혼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2. 모자에 상장을 단 신사

 

 그러던 어느 날, 벨차니노프는 정체불명의 모자를 쓴 남자와 만난다. 그가 자신을 뒤쫓는 듯한 착각에 빠져 불안해하던 벨차니노프는 마침내 그와 대면하게 된다. 그의 정체는 벨차니노프가 9년 전에 만났던 정부의 남편이었다.

 

 3. 빠벨 빠블로비치 뜨루소스끼

 

 9년 전의 정부인 나딸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회에 잠기는 주인공. 그와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9년 전의 일을 서서히 기억해낸다. 극심한 우울증 때문에 기억력이 온전치 않은 그조차도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한 추억이었던 모양이다

 

 4. 아내, 남편 그리고 애인

 

  나딸리야가 어떤 여자였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녀는 매우 독선적이고 이기적이었던 여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오만한 점이 많은 남성들을 끌어당겼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제목인 <영원한 남편>은 아마 모자를 쓴 신사, 빠벨 빠블로비치를 의미하는 듯하다.

 

 5. 리자

 

  리자의 등장으로 갑자기 이야기가 흥미로워진다. 어쩌면 9년 전, 나딸리야가 벨차니노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리자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는 분명히 임신은 착각이었다고 얘기했는데...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저 밑에서 꿈틀거리는 벨차니노프의 충격과 불안이 인상적이다. 어쨌든 벨차니노프는 리자가 자신의 딸이라고 확신하고 그녀를 빠벨 빠블로비치로부터 빼돌린다.

 

 6. 한가한 사람의 새로운 환상

 

  지인인 뽀고렐리세프의 집에 리자를 데려가는 벨차니노프. 리자는 빠벨 빠블로비치가 자살을 할 거라면서 두려워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넬리가 떠오르는 아이다. 넬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7. 남편과 정부가 키스하다

 

p.91 <죽은 적은 좋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적은 더욱 좋다>


 빠벨 빠블로비치가 술에 취해서 꺼낸 현인의 말이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싶어서 발췌했다. 이어지는 이야기까지 함께 읽어 보면 살아 있는 적은 아직 복수할 여지가 좋다는 뜻인 것 같은데, 현인이 그런 뜻으로 말했을 것 같지는 않고... 인간은 적이 존재할 때에 성장할 수 있다는 전제로 한 얘기가 아닌가 싶긴 하다.

 

 8. 리자, 병나다

 

 넬리가 그러했듯 리자도 병이 난다. 흉폭한 아버지였어도 아버지인 것인지, 그에게 버림 받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온 몸이 불처럼 타오른다. 왜 고통 받아야 할 사람들이 고통 받지 못하고 가장 나약한 이들이 아파야하는 걸까.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서 이런 인물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9. 환영

 

 리자를 위해서 빠벨 빠블로비치를 잡아오려는 벨차니노프의 고군분투가 이어진다. 하지만 빠벨 빠블로비치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한밤 중에 아내의 환영을 보고는 새벽녘에 도망쳐버린다. 그 와중에도 빠벨 빠블로비치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단죄하려는 것은 아닌지 계속 눈치를 보는 벨차니노프. 이기적인 인간들 뿐이다.

 

 10. 묘지에서

 

p.128 마침내 그의 집에서 그를 만난 변호사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마음을 졸이던 의뢰인이었던 이 사람이 극도로 맥이 빠진, 무관심한 태도로 시큰둥하게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대해 깜짝 놀랐다.

 

 충격적인 일은 언제나 그보다 충격적인 일로 무마된다. 위로가 되는 듯 되지 않는 세상의 진리.

 

p.128 <리자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나의 모든 지난날의 추악하고 무익한 생활은 정화가 되고, 속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처럼 무위도식과 악행을 일삼고 삶을 낭비한 인간 대신에, 그 순결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사랑으로써 어루만져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존재 때문에 내가 저지른 모든 일은 용서를 받고, 나도 나 자신에 대하여 모든 일을 용서해 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결국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리자를 사랑하려고 했던 벨차니노프의 이기심과 고통이 동시에 드러나는 문장이다. 만약 리자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게 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때에도 벨차니노프는 리자를 향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러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는 리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자신의 짐을 넘기려고 한 것이다.

 

p.129 그 순진 무구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괴롭힌 것은 상처 입은 자존심이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의 사랑을 갑작스러운 미움으로 바꾸고, 추악한 말로써 그녀를 모욕하고, 그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조롱하며, 마침내는 낯선 사람들에게 내동댕이친 아버지와 지낸 3개월 동안의 고통스러운 생활이었을까?

 

 상처 입은 자존심과 고통스러운 생활을 분리한 것이 신기해서 발췌했다. 저 두 가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상처를 입은 것이고 후자는 지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11. 빠벨 빠블로비치, 결혼하다

 

p.131 <안녕하십니까>라는 대답을 하고 난 그는 스스로 놀랐다. 지금 이 사나이를 전혀 아무런 미움의 감정 없이 만나고 있으며, 이 순간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 속에는 무엇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어떤 것이 내재해 있고, 심지어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듯한 충동까지 느껴지는 것이 매우 이상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p.132 벨차니노프는 불현듯 얼른 그와 헤어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감정에 대한 준비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리자 사후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처음으로 돌아간 듯 빠벨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가 그가 결혼을 하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정이 식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큰 사건을 겪은 이후에는 마치 폭풍이 한 차례 쓸고 지나간 것처럼 모든 것이 잠시 소강 상태에 이르는데, 이 소강 상태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다음 폭풍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12. 자흘레비닌의 집에서

 

p.168 벨차니노프는 그때 자신이 바로 이 소곡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인상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중략) 그 소곡에는 어떤 긴장된 정열의 감정이 충만해 있으면서 그것이 한 구절 한 구절,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더 크고 높아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런 긴장감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조화의 불균형일지라도, 아무리 사소한 거짓과 부정이라 할지라도, 오페라에서는 쉽사리 지나가 버리는 것이지만, 곡 전체의 뜻을 금방 망치고 왜곡시킬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별것 아닌 것 같은, 그렇지만 뛰어난 소곡을 부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실을 필요로 했다. 반드시 꾸밈이 없는 풍부한 감흥이 필요했던 것이다. 진정한 열정, 그것을 완전하게 시적으로 소화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곡은 아주 실패작이 되고 말 뿐 아니라, 혐오스럽고 거의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것에 가까워지고 말 것이다.

 

 어떤 곡이기에 이런 묘사를 했나 싶어서 상상하면서 읽은 문단이다. 상당히 거칠고 빠르고 직설적인 곡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곡일수록 제대로 몰입하지 않으면 거칠게 표현이 되기 마련이니까. 모티브가 되는 소곡이 있다면 들어보고 싶다.

 

 13. 어느 쪽이 더 큰가

 

 벨차니노프가 자흘레비닌의 딸들에게 어필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와 신세한탄을 하는 빠벨 빠블로비치. 말하는 걸 보니 조금 불쌍하다. 사실 그는 그저 벨차니노프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미워하는 듯한 이 남자에게...

 

 14. 사센까와 나젠까

 

 나쟈의 남자친구가 와서 빠벨 빠블로비치에게 경고를 하고 사라진다. 한참 어린 아이에게 욕이나 먹고 이게 무슨 일인지!

 

 15. 총결산을 하다

 

p.200 그렇지만 잠을 자고 있던 내내, 그가 잠을 깨던 바로 그 순간까지, 그는 꿈결에서 자신이 조금도 잠을 자고 있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몸이 몹시 쇠약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드디어 그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 들었다.

 

 제대로 잠들지 못해서 현실과 꿈이 뒤죽박죽이 되는 감각을 잘 묘사했다는 생각이 들어 발췌했다. 비몽사몽의 감각이 꿈속에서 살아있는 듯한 느낌과 가장 가깝지 않을까.

 

 16. 분석

 

p.206 특별한, 아주 커다란 기쁨의 감정이 그를 엄습했다. 무엇인가 끝이 나고, 해결이 났다. 모종의 무겁디무거운 수심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중략) 마치 다친 손가락에서 나온 피가 그 수심의 감정까지도 <총결산> 해주는 것만 같았다.

 

 빠벨 빠블로비치에게 공격을 받은 후에야 모든 갈등이 해소되었다고 느끼는 벨차니노프. 터질 사건은 터지게 마련이다. 어떤 홀가분함인지 조금 알 것 같다.

 

 17. 영원한 남편

 

 그 후로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 다시 빠벨 빠블로비치와 만난다. 그는 여전히 다른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있다. 결국 그와는 연을 맺지 않고 다시 헤어지지만, 마지막 구절에서 아쉬워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는 것이 재미있다. 어쩌면 그도 빠벨 빠블로비치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금은 좋아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보보끄

 어느 날 묘지에 갔다가 유령들을 보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죽어서도 서로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재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흥분한 주인공의 모습이 매우 재미있다.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p.265 하지만 중요한 점은, 나에게는 그 모든 일들 ㅡ 지하실에서, 장작더미 뒤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벌어진 일들 ㅡ 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눈앞에 선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들이 정말로 있을 수 있는지는 나 자신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나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지어낼 뿐이다.

 

 크리스마스에 얼어죽은 아이의 이야기를 지어내며 덧붙이는 작가의 말이다. 작가란 진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일어날 법한 사건을 다루는 존재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농부 마레이

 

p.274 그는 우리 집에 묶인 농노였으며 나는 누가 뭐라 해도 그의 상전이었다. (중략) 그것은 빈 들판에서 이루어진 둘만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신만은 이 일자무식한 러시아 농노 ㅡ 당시에는 자신의 자유의 가능성을 기대하지도 못할 뿐더러 짐작조차도 못하던 ㅡ 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깊고도 고상한 인간의 감정을, 그리고 섬세하고 여성스럽기까지 한 그 부드러운 마음을 저 높은 곳에서 보고 있었을 것이다.

p.274 그러고 나서 침상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갑자기 내가 이 불행한 인간들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음을 문득 느꼈던 것이 기억 난다. 또한 나의 모든 적의와 분노가 내 가슴속에서 마치 기적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 기억난다.

 

 어린 시절, 농부인 마레이에게 도움을 받은 후로 그들을 대하는 감정이 달라졌다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고백이 담긴 짧은 단편이다. 고상한 감정은 인간의 계층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백 살의 노파

 

p.279 <아니 웬 돈을? 이런 고마울 데가, 그래요 내 잘 받겠수.> (중략) 노파는 돈을 받았어요. 그 노파가 구걸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 그 정도로 전락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노파는 그 돈을 너무 훌륭한 태도로 받았지요. 마치 내가 결코 적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의의 표시로 혹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호의의 표시로 준다는 느낌이더라고요. 물론 노파는 즐거워하는 기색이었어요.

 

 타인의 동정을 호의로 바꿔서 받는 노인의 노련함이 드러난 부분이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에도 이런 자세로 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p.284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삶이었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이지, 뭐 기억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마찬가지인걸. 그런 식으로 수백만의 인간들이 사라져 간다. 아무런 주의도 못 끈 채 살다가 아무런 주의도 못 끈 채 죽어 가는 것이다. 다만 이런 백 살의 노인들과 노파들의 죽음 속에는 무언가 감동적이고 고요한 것이, 무언가 장엄하고 평화로운 것이 깃들어 있을 듯해 보인다. 오늘날에도 백 년이라는 세월은 인간에게 신비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다. 신이여, 단순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축복을 내리소서!

 

 노파의 죽음에서 의미를 발굴하는 내용이다. 큰 병 없이 살다가 자연스럽게 숨을 거두는 사람들의 존재에는 확실히 신비한 느낌이 깃들어 있다. 가장 약한 존재에게 가장 큰 관심을 보이던 도스또예프스끼 다운 문장이다.

 

 온순한 여자

 

 아내의 자살 이후, 그녀와의 추억을 그려낸 한 남자의 수기를 담은 내용이다.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아내를 너무 몰아붙여서 (의도야 어찌되었든) 결국 자살에 이르게 만든 남자의 절규가 처절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남자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맥 뒤에 가려져 있는 아내의 심상도 흥미롭다. 그녀는 과연 남편을 사랑했을까.

 

 우스운 사람의 꿈 - 환상적인 이야기

 

p.356 인생이나 세계나 결국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이 뚜렷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는, 세계라는 것이 원래 나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그 즉시 세계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편이라고 생각하는데, 한 남자가 우주적인 스케일의 꿈을 꾸고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내용이다. 꿈을 꾸기 전까지 그는 오로지 자기자신=세계로 구성된 생각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문단이다.

 

p.365 그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며, 항상 평온했다. 그들은 우리들처럼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은 이미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지식은 우리들의 학문보다 더 깊고 높다. 우리들의 학문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위해 탐구하며, 타인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삶을 해명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은 학문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주인공은 꿈속에서 사후 낙원으로 넘어가 그들의 삶을 엿보게 된다. 모든 고통과 나약한 감정 없이 본질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가족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 주인공이 작품 말미에서 추구하게 되는 '진리'의 모습일 것이다.

 

p.377 어떻든 우선 긴급한 것은,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교훈이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이게 전부이다. 이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p.377 <삶의 인식은 삶 자체보다 더 귀중하며, 행복의 법칙에 관한 지식도 행복 자체보다 더 귀중하다>는 말, 이 오만한 말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으로 이루어진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비로소 타인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주인공. 삶에 대한 주석이 아닌, 삶 그 자체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에 매진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결심한다. 사상범으로 몰려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났던 도스또예프스끼가 깨달은 가치 또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흥미로운 단편이다.

 

 역자 해설-2 / 작가 일기

 창작 절정기의 사상적 결산 한마당

 

p.386 『작가 일기』는 그런 의미에서 후기 장편소설의 문제 의식들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으며, 이를 평론이라는 비교적 자유롭고 직설적인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또예프스끼 전생애의 문학적 결산이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었다면, 『작가 일기』는 그 사상적 결산을 각론으로 펼친 것이라고 하겠다.

 

 작가 일기는 아직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저서인데, 이 부분을 읽으니 꼭 읽고 싶어졌다. 영문판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해봐야겠다.

 

p.388 도스또예프스끼는 무덤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사자들의 충격적인 대화 장면을 통해 신(神)을 갖지 않은 인류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던 보보끄의 핵심을 설명한 문장이다. 죽어서도 탐욕스러운 인류에 대한 경멸을 담은 단편이다. 탐욕에 대한 경멸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주된 심상 중 하나이니, 상당히 중요한 단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 평론 / 영원한 남편

 온순함과 자만심의 변증법

 

 <영원한 남편>을 쓰는 동안 도스또예프스끼가 남겼던 편지나 일기를 레퍼런스로 쓰인 평론이다. 특별히 인상적인 해석은 없었기에 요약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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